따지고 보면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드는 ‘일터’에 지나지 않건만 이곳은 우리 뇌리 속에 평화롭고 여유로운 ‘천국’의 이미지로 남아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래서일까. 이 천국 같은 풍경이 펼쳐진 무대,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Napa Valley 는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이상향으로 사랑받고 있다.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서 포도밭은 삶 자체입니다. 포도를 생산하는 농부, 와인을 만드는 제조자, 와이너리 경영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건축가…. 이곳에서는 모두가 ‘포도밭’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나파밸리와 소노마 등 포도 경작지에 와이너리를 건축하며 이곳에 ‘자연스러운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건축가 하워드 배켄Howard Backen 씨. 오리건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뒤 캘리포니아에서 활동을 시작, 일반 주택은 물론 리조트와 레지던스, 상업 공간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건축 디자인을 펼쳐왔다. 하워드 배켄 씨는 특히 1980년대 엔터테인먼트 관련 분야 건축을 하면서 로버트 레드퍼드, 조지 루카스 등 할리우드 유명 배우와 감독의 인스티튜트와 스튜디오 등을 디자인했는가 하면, 샌프란시스코의 낙후된 지역인 딜런시 스트리트 Delancey Street 개발을 위한 공동 주거단지를 개발하며 독창적으로 디자인해 샌프란시스코의 환경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만능 건축가’로서의 면모를 자랑하는 그는 이 중에서도 자신을 ‘와이너리 건축가’로 기억하길 바라고, 또 남은 삶도 여기에 집중할 생각이다. 그 어떤 나라, 어떤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광활한 포도밭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와이너리 디자인의 견본 흔히 와이너리라고 하면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볼 수 있는 고색창연한 고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지역의 와이너리는 유럽의 그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목가적인 농장에서부터 최첨단 시설을 갖춘 모던한 와이너리, 스파와 수영장 등 리조트 기능을 겸비한 와이너리가 공존하면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캘리포니아만의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와이너리 디자인은 와인 제조 방식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오크 통에 발효 숙성시키는지, 스틸 통에서 압착하는지 등 제조 방식의 차이는 와이너리 디자인에 결정적 요소가 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는 비교적 자유롭게 디자인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유럽은 와인 제조 역사가 긴 만큼 와이너리의 전통을 유지, 보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반면 캘리포니아의 와인 제조 방법은 자유롭고 창의적이지요. 그리고 이는 와인의 맛과 와이너리의 모습에 영향을 주어 와이너리 디자인을 다채롭게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1, 4 캘리포니아 오크빌에 자리한 ‘본드Bond 와이너리’. 프리미엄 와인을 생산하는 본드 가문의 와이너리로 하워드 배켄은 이곳에 새로운 테이스팅 룸과 동굴 저장고를 지었다. 외관은 소박한 농가 같지만 드넓은 포도 농원을 조망할 수 있게끔 모던한 통유리 창을 과감하게 낸 점이 눈에 띈다. 2 지난 10월 방한한 하워드 배켄 씨. 언젠가 한국에도 멋진 와이너리를 지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3 그가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로 여기는 ‘할런Harlan 에스테이트 이스트 와이너리’의 숙성 저장고. 오크 통을 위로 쌓는 것이 아니라 일렬로 가지런히 놓음으로써 테이스팅을 쉽게 할 수 있게 만든 점이 특징. 5 캘리포니아 세인트헬레나에 자리한 ‘에지우드 Edgewood’ 와이너리는 적참나무 느낌을 살려 레노베이션한 곳이다. 6 캘리포니아 욘트빌에 자리한 ‘클리프 리드Cliff Lede’ 포도 농장. 각각의 양조 과정이 일렬로 자리한 4개의 건물을 거쳐 완성된다. 7 현대적 디자인의 ‘폴 홉스Paul Hobbs’ 와이너리.
1976년 조던Jordan과 같은 유명 와이너리를 짓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의 나파밸리를 아름다운 ‘와이너리 밸리’로 만든 주인공인 하워드 배켄 씨는 캘리포니아 와이너리 건축을 한마디로 ‘창의적인 미국 와인’ 그 자체라고 표현한다. 전통 와인 제조 비법을 고집하고 와이너리 건축 규제 또한 엄격한 유럽과 달리 나파밸리의 와인과 와이너리 디자인은 ‘창조의 자유’가 허락되기 때문에 그 어느 곳보다 개성이 넘칠 수밖에 없다고. 배켄 씨가 만든 와이너리 역시 이런 ‘창조의 자유’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오크 통을 이용해 레드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는 그에 맞게 전원풍으로 지었는데, 자세히 보면 펜트하우스 못지않게 사방을 큰 유리창으로 처리해 세련된 주택의 면모를 뽐낸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최첨단 시스템의 현대적 와이너리는 심플하면서도 모던한 모습을 자랑하는데 외장재로는 낡은 듯한 나무를 사용해 전체적으로 따뜻한 전원의 느낌을 전달한다. 전통 비법 그대로 와인을 만드는 곳은 와이너리 내부를 거친 돌로 마감하여 유럽의 고색창연한 와인 저장고 못지않은 분위기를 냈는데, 이곳은 전체가 첨단 시스템을 도입해 와인이 잘 숙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나파밸리의 자연미에 첨단 기술과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조화시키는 하워드 배켄 씨. 그가 설계하는 개성적인 와이너리는 캘리포니아 와이너리의 전형이자 역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위 캘리포니아 세인트헬레나에 자리한 ‘ 나파밸리 리저브Napa Valley Reserv e ’ 와이너리. 현지에서 생산되는 재료로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이곳은 하워드 배켄 씨가 새롭게 시도한 ‘ 환상형 동굴 와인 저장 고 ’ 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하에 둥근 방사형 동굴을 만들어 최대한 자연 조건에서 와인이 숙성될 수 있도록 했다. 아래 나파밸리 리저브의 전망 좋은 테이스팅 룸.
최고의 환경 건축, 와이너리하워드 배켄 씨가 와이너리를 디자인할 때 중요시하는 점은 바로 자연환경과의 조화. 와이너리는 대개 와인을 만드는 공장 격인 양조장과 와인 맛을 테스트할 수 있는 테이스팅 룸 등으로 구성되는데, 그는 이를 모두 현지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이용해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는 빛깔과 외양을 갖춰 만든다. 소박한 듯하면서도 고급스럽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반영된 모습은 리조트나 부티크 호텔 이상으로 느껴질 정도. 그는 와이너리 시스템도 자연환경 조건을 적극 반영한다. 산비탈에 지은 양조장에는 비탈의 경사각을 활용, 포도송이가 그 경사와 중력에 의해 떨어지면서 자연스레 숙성 통에 모아지도록 하는 ‘자연 프로세스’를 설치, 명실상부한 ‘친환경 건축’을 완성했다. 포도밭과 떨어져 있던 와이너리를 포도밭 한가운데로 끌어들이는 과감한 디자인도 시도했는데, 이는 배켄 씨의 디자인 캐릭터이자 이제 와이너리 건축의 한 패턴으로 자리잡을 만큼 ‘고전’이 되었다. “실내 어디서든 포도밭을 감상하고 자연을 볼 수 있게 만든 와이너리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같은 와인도 아름답고 광활한 풍광 속에서 즐긴다면 분명 그 맛의 가치가 달라지지요. 와이너리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변 환경을 보듬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숙성되는 와인, 그리고 대자연 안에서 와인을 음미하는 사람들의 모습. 하워드 배켄 씨는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질 때 비로소 와이너리의 의미가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콘셉트가 일정하게 반영되고 있는 배켄 씨의 ‘작품’은 미국의 와인 마니아뿐만 아니라 와이너리 기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꼭 한번 가고픈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중 대부분은 개인 소유의 와이너리로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한다. 거대 와인 브랜드부터 전 세계 부호들이 주말 농장처럼 사용하는 와이너리는 아직 일부에게만 허락된 낙원이라고. 그래도 지면으로나마 꼭 소개하고픈 캘리포니아 최고의 프라이빗 와이너리를 꼽는다면, 단연 자연환경과의 멋진 조화로 탄생한 본드Bond 가문의 와이너리와 할런 에스테이트 이스트Harlan Estate East 와이너리, 원형의 석재 지하 동굴로 만든 저장고가 있는 나파밸리 리저브Napa Valley Reserve를 추천한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혁신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디자인이 일품이란다. “와인은 자연이 빚어낸 예술입니다. 그리고 이 예술을 자연이라는 보다 큰 세계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이 바로 와이너리지요.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와이너리에서 심신의 안정과 자연의 의미를 만끽할 수 있게끔 부티크 호텔 스타일로 개발하는 데 주력할 계획입니다.” 현재 하워드 배켄 씨는 캐나다와 캐러비언 부근에 부티크 호텔 형식의 와이너리를 짓고 있다고 하니, 캘리포니아 최고급 와이너리의 매력을 몸소 느낄 수 있는 날은 그리 머지않은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