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을 받아 매일 아침 제철 식재료를 더해 국수를 뽑는 솔향기국수의 고운 국수 가닥.
제철의 영양과 기질을 담은 기능성 국수 모든 음식은 기억으로 먹는다고 했던가. 익숙한 손맛, 추억이 어린 음식은 쉽게 끊을 수가 없다. 국수도 그중 하나다. 국수 면발에 즐거울 때와 배고프던 시절의 기억이 겹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국수 역사가 3천 년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늘상 우리 곁에 있던 음식인 셈이지요. 특이할 게 없어서 특별한 데가 있으니 이런 반전 있는 음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국수 요리가 그러하듯 친근하면서도 국수만큼 무한한 창의성을 지닌 식재료도 없다는 것이 30년간 국수 공장을 운영해온 솔향기국수 대표 김현규 씨의 설명이다. 몇 가지 양념과 국물을 다양한 재료와 모양의 국수와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개성 있는 국수 요리를 만들 수 있듯, 국수의 면발 또한 어떤 재료를 섞느냐에 따라 영양을 더하고 저마다 다른 색과 맛과 향을 낸다는 것.
“익숙한 음식이라도 더 좋은 것을 먹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잖아요. 국수의 기본 재료인 밀가루에는 탄수화물을 빼곤 별다른 영양분이 없어요. 그래서 제철 식재료를 넣어 밀가루의 맛과 향을 중화하고, 영양과 색을 더한 거죠.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 그의 시에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다 들어 있듯이 내 국수에도 사계를 다 녹여내고 싶었습니다.” 김현규 씨의 국수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빛깔 고운 국수에 사계절의 기질을 고스란히 담는 것. 그의 말마따나 ‘향수鄕愁 부르는 국수’로, 제철 식재료의 기질을 최대한 살려 넣는 것이 비결이다. 식재료의 기질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결합수’다. 낯선 단어인 만큼 그 정의 또한 아직 애매한 점이 있으나, 그의 설명을 빌리면 결합수야말로 식물이 지닌 영양소이자 생명력이다.
솔향기국수의 김현규 대표. 그의 국수에서는 제철의 향기가 난다.
식물에는 결합수와 유리수(자유수)가 있는데, 유리수는 털면 없어지고 햇볕에 금세 마르는 반면 결합수는 식물의 영양분을 형성하는 물로서 잘 증발하지 않고 일반 방법으로는 쉽게 분리하거나 제거할 수도 없는 물이라고. “돌 속에도, 쇠 속에도 소량이나마 물이 있습니다. 식물이나 동물은 말할 것도 없지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물이 결합수입니다. 예를 들어 잎으로 치면 이슬은 유리수로 햇볕에 금세 날아가버리는데, 결합수는 쉽게 증발하지 않아요. 결합수가 마르면 낙엽이 되고 소멸하는 거지요. 식물의 광합성을 일으키는 것도 결합수이고, 고기로 치면 육즙인 셈입니다. 그래서 밀가루의 부족한 영양을 보충해줄 수 있는 결합수를 살리는 국수를 제조하고자 늘 궁리하는 겁니다.”
그가 뽑는 국수가 특별한 것은 특등급 밀가루를 사용하고, 반죽할 때 고기는 물론 과일, 채소 등 종류를 불문하고 제철 식재료의 영양을 최대한 살려 통째로 넣기 때문이다. 이때 곡물은 갈아서 보통 밀가루의 10% 비율로 넣으면 가장 맛있고, 과일과 채소는 밀가루의 40% 비율로 넣는데, 과일은 소금을 넣은 물에 껍질째 졸여서 잼처럼 되면 밀가루에 넣어 섞고, 무는 참기름을 약간 넣어 볶은 후 분쇄해 사용하고, 고구마와 감자는 푹삶아서 섞는다. “모든 식재료에는 기질이 있어요.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어느 순간 물성 자체에서 답을 주더군요. 그렇게 기질을 찾아나가는 거죠.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예요. 뭐든 해봐야 아니까요.” 그 덕분에 그가 뽑은 국수는 제철 식재료의 빛깔을 담아 색이 곱고 향이 은은하며, 일반 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 밀가루 등 잡냄새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밀가루 10kg용 국수 제조 시설을 갖추고 소량만 수작업으로 주문 생산해 주문이 밀려들 때는 버겁기도 하지만, 그는 명실공히 식재료 고유의 맛과 영양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국수 제조자다. 기능성 국수의 달인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이유다.
색이 곱고 향이 은은한 국수에는 제철 식재료 저마다의 기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흑미생면, 쌀생면, 부추생면, 감귤생면, 고추생면.
국수 공장 사장에서 국수 제조의 달인으로 공장에서 기계로 뽑아낸 국수가 대부분인 요즘 소규모 제면소 풍경은 그 자체가 이색적인 볼거리다. 김현규 씨는 아내 손신향 씨와 함께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국수 가락을 뽑고, 건면으로 말릴 때는 긴 막대기에 양쪽으로 갈라서 넌다. 그 국수 끝을 톡톡 잘라 먹으면 맛이 얼마나 쫄깃하고 씹을수록 꿀맛인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국수와 함께한 인생은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다. 충남 당진에서 23년간 국수 공장을 운영하다가 2000년대 들어 대기업이 국수 시장에 진출하면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
귀향해 경남 거창군 거창읍 장팔리에서 규모가 작은 주문 생산식 제면소를 시작한 것은 2007년의 일이다. “직원을 여럿 두고 국수 공장을 할 때는 기계 구조도 몰랐어요. 그래도 20년 넘게 국수 만드는 일을 해왔는데, 생계도 생계이고 대기업에 밀려 죽어버린 시장을 살려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더군요. 요즘에야 틈새시장 소리를 듣지만 이건 엄연히 존재해야 할 시장이니까요. 그래서 건강한 식재료로 국수를 가공하는 이는 흔치않으니 내가 해보자 했지요.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 다양한 식생활도 존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1 국수를 뽑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금의 배합량. 중요한 만큼 소금도 직접 만들어 쓴다. 2 감귤국수는 감귤을 소금 넣은 물에 잼처럼 조려 밀가루에 섞어 반죽한 후 기계로 뽑는다. 3 솔향기 국수는 1회에 밀가루 10kg용 국수 제조시설을 갖추고 주문 생산만 한다. 면발이 뽑히기 전 반죽을 여러 번 되감는 과정.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어려운 환경 때문일지언정 ‘삯국수’라고 수타식 국수는 아니더라도 제면기가 없는 집에서 기계 삯을 주고 국수 가락을 뽑아 그걸 집에서 말린 다음 양동이에 이고 행상을 다니며 파는 이들도 있지 않았던가. 요즘 기계 소면이나 중면은 제조 공장의 특징이 없이 다 비슷하지만, 예전에는 국수 제조 시장도 다양해 손맛 나는 국수를 맛볼 기회가 심심찮게 있었고, 그 음식이 추억이 되어 국수를 솔 푸드로 꼽는 이 또한 많은 것이 아닐는지. 게다가 우리나라 옛 문헌에 나오는 국수만 살펴 봐도 밀가루국수, 녹두국수, 메밀국수, 콩가루국수, 참깨국수, 칡뿌리국수, 수수국수, 감자국수, 마국수, 밤국수, 백합국수, 꽃국수, 진주국수, 연밭국수, 마른 새우를 갈아 섞은 홍紅국수 등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길은 잡초가 무성해 흐릿해지게 마련. 머릿속에서는 그림이 훤히 그려지는데, 국수 공장을 운영만 했지 직접 제조하는 기술자가 아닌 김현규 씨는 국수를 직접 뽑기까지, 게다가 제철 식재료를 더해 기능성 국수를 뽑기까지 그 고생길이 국수 가락 길이만큼 길고 고단했단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잖아요. 긴 세월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게 있었지만, 기술은 턱없이 부족했지요. 그래서 부족한 기술을보완하기 위해 기계도 나름대로 개조하고, 조리사 자격증도 따서 공부도 하고, 여기저기 쫓아다니기도 했는데, 2년간은 국수가 안 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처음 만든 국수를 아무도 안 써주더군요. 국수가 짜다, 끊어진다…. 그 말을 귀담아듣고 와서 또 연구했지요. 그렇게 한길만 파니까 어느 순간 나만의 제조법이 만들어지더라고요.”
김현규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풋콩 국수. 보통 여름에 즐기지만 그는 9월에 풋콩을 수확하면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그대로 갈아 국물을 만들고 겨울까지 즐긴다.
국수 살리는 빛 같은 소금 두드리면 열리는 법. 김현규 씨가 2년 여간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찾아낸 그만의 제조법은 일명 ‘프리믹스’. 말그대로 국수를 만드는 수십, 수백 종의 재료 중 제일 좋은 것만 골라내고 비율을 따져 만든 것으로, 그 덕에 숙성 과정 없이도 쫄깃한 식감을 낼 수 있게 됐다. 또 한 가지 깨달음은 바로 소금의 배합 비율이다. 밀가루 단백질의 주성분은 글루텐인데, 글루텐은 글리아딘gliadin과 글루테닌glutenin으로 구성돼 있다. 밀가루에 물을 붓고 반죽하면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이 물과 섞이면서 글루텐이 형성돼 밀가루의 특유한 점성이 생기는데, 여기에 소금을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 국수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 말하자면 소금이 국수 면발의 쫄깃함을 결정하는 비결로, 자칫 소금을 많이 넣으면 삶은 후에도 짠맛이 강해진다.
“생면을 만들 때는 소금물의 염도가 염도계로 2도 정도가 적당하고, 3분 정도 반죽해서 바로 뽑아내지만, 태양국수라고도 하는 건면은 좀 더 까다롭습니다. 소금물의 염도가 염도계로 13도 정도가 기본인데, 계절과 날씨에 따라 반죽과 건조 시간이 달라지지요. 반죽은 겨울에는 15분, 여름에는 6분 정도 한 후 선선한 곳에서 하룻밤 정도 숙성시켜서 말립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햇빛에 하루 동안 건조하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엔 실내에서 3일간 저온 건조해야 맛이 나지요.” 소금의 배합이 완벽하면 반죽의 촉감도 다른데, 보들보들한 것이 마치 손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소금이 중요한 만큼 직접 만들어 쓴다. 천일염을 3년간 묵힌 뒤 물에 1~2년 동안 담가둔다. 이렇게 하면 염도가 20도 가까이 되는데, 이 소금을 물에서 건져 씻은 뒤 햇볕에 말려 사용하는 것.
모두 불순물을 빼는 과정으로, 그가 만든 소금은 그 맛이 다디달다. 명불허전이 아니라 면麵불허전, 국숫집 명성이 널리 알려진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처음 뽑은 쌀국수와 부추국수 생면을 구입해 사용한 ‘능이칼국수’집은 거창 지역 제일의 맛집으로 꼽힌다. 그의 국수를 찾는 사람이 늘고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맛있기도 하거니와 자연을 온전히 담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리라. 향수 부르는 솔향기국수는 맛과 향, 고운 빛깔과 함께 한 가지 깨달음을 던진다. ‘서두르지 말고, 이기려 하지 말며, 지나친 욕심을 갖지 말라. 느린 듯 빠르고, 지는 듯 이기며, 비운 듯 채워라.’ 그것이 행복이고 웰빙이고 삶의 지혜일 것이다.
햇볕에 건조시켜 태양국수라고도 부르는 건면. 왼쪽부터 쌀국수, 포도국수, 사과국수, 고추국수, 메밀국수. 포도국수는 거창 포도 축제 때 빠지지 않고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