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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특집] 포토에세이 당신이 아는 제주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한 번도 왕실의 수도였던 적 없기에 이렇다 할 유적지가 없는 제주도. 하지만 제대로 들여다보면 이 땅에서 숨 쉬는 이들의 삶 자체가 문화유산입니다. 푸른 바다의 뚜껑을 열고 깊고 푸른 곳까지 헤엄쳐 들어갔다 올라오는 ‘바다의 장인’ 해녀, 고통을 주는 나무에서 ‘대학나무’로 신분 상승한 귤나무, 제주 사람의 생활 본거지였던 오름까지 이 모두가 국보보다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던 제주는 껍데기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우리 시대의 ‘지식 노매드’ 주강현 교수가 인문학적으로 바라본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보시죠. 이제 제주는 테마파크의 섬이 아니라 인문학의 섬입니다.


화산의 섬,
‘여러 오름들이 별처럼 여기저기 벌리어’
드러누운 용의 자태를 닮은 용눈이오름, 억새꽃 물결이 능선 따라 춤추는 따라비오름, 새알처럼 귀여운 알오름…. 제주의 오름은 천의 얼굴을 지녔습니다. 조선 중기 제주목사 이형상은 <남환박물>에 썼지요. “한라산은 한가운데가 우뚝 솟아 있고 여러 오름이 별처럼 여기저기 벌리어 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인다면 연잎 위 이슬 구슬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연잎 위 이슬 구슬’, 이렇게 좋은 표현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제주의 오름은 단지 관조와 감상, 등정의 대상이기만 할까요? 오름은 제주 사람의 생활 본거지이기도 했습니다. 오름에서 노루를 쫓아 가죽과 고기를 구했고, 집 짓고 테우(제주도의 전통 배) 만들 목재와 일상의 땔감을 구했지요. 병에 걸리면 오름에서 약초도 구했습니다. 그 무엇보다 오름 언저리에서 태어나 죽어서는 오름 자락의 무덤인 산담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무덤은 오름을 빼놓고는 제주인의 삶과 죽음을 설명할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오름이 어찌 일상의 평화로운 공간이기만 했을까요. 왜구의 침략, 방화, 인신 노예의 공포가 해안을 엄습할 때마다 오름에는 봉수대가 들어서 오름과 오름을 연결했습니다. 전쟁, 반란, 토벌 등의 사건이 오름에서 줄지어 스쳐갔고요. 그 고난의 역사를 어찌 몇 줄로 담을 수 있을까요?


귤의 섬,
‘원한의 과일에서 꿈의 과일로’

중세까지 귤은 임금과 세도가나 맛볼 수 있는 황금의 열매였습니다. 한여름 더위도, 혹심한 추위도 지속되는 중층적 기후대에서 이 이국적인 아열대풍 식물은 그 희소가치와 제주도라는 머나먼 고도孤島의 지리적 한계를 포함해 범접 못할 오라를 창조해냈습니다. 이 귤에는 본토 사람들의 욕망이 들어 있었는데, 그 욕망은 곧바로 착취로 연결되었지요. 삼국시대부터 제주도 백성은 해마다 나라에 귤을 바쳐야 했고, 생산ㆍ운송ㆍ분배의 과정은 중앙에서 철저하게 통제했습니다. 이런 먹이사슬의 하층부에 제주도 백성이 깔려 있었습니다. 민가에서 재배하는 감귤나무의 숫자 하나하나까지 세어 감독했고, 열매가 맺히면 관리들이 찾아가 열매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달았습니다. 하나라도 없어지면 엄하게 처벌했지요. 매년 7~8월에 군관들이 촌가를 순시하면서 귤에 붓으로 하나하나 점을 찍어 장부에 기록하고 귤이 익는 날 장부와 대조해 수납했습니다. 바람과 비에 손상되거나 까마귀나 참새가 쪼아 먹어도, 해충의 피해를 입어도 집주인이 그 개수를 책임지고 대납해야 했지요. 그야말로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기에 백성들은 귤나무를 더 이상 심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귤나무가 ‘통痛’을 주는 나무라 해 더운물을 끼얹어 고사시키거나 나무그루에 상어 뼈를 박아놓기도,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후춧가루를 넣어 나무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서야 감귤 진상이 해제됐습니다.1965년부터 감귤나무 심기 붐이 일었고, 1960~70년대 제주 출신 재일 동포들이 ‘고향에 감귤나무 보내기 운동’을 펼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됐습니다. 그때부터 감귤을 ‘대학나무’라 불렀는데, 육지에서 소 팔아 대학 보내는 우골탑이 늘어나는 동안 제주도에서는 대학나무가 유학 생활을 책임졌지요.


잠녀의 섬,
‘해녀 한 명이 사라지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

잠녀(해녀)들은 늘 혼백상자를 등에다 지고 바다에 들어갑니다. 글자 그대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모시는 혼백상자를 지고서 물에 뛰어드는 건 죽음을 안고서 뛰어든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예전에는 그 추운 바다에 소중기(해녀들 특유의 팬티)만 걸친 반나체로 뛰어들었습니다.
옷감이 귀해 평상복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으니 바닷물에 빨리 손상되는 물옷을 마련할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엄마들은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면서 물질을 다녔습니다. 배에서 낳은 배선이, 항에서 낳은 축항동이 같은 이름이 있는 걸 보면 만삭의 해녀들도 출산 직전까지 물질을 했는가 봅니다. 그 애환을 어찌 다 알까요. 해녀들이 숨죽이고 잠수하는 시간을 물숨이라 부르는데요. 물속에서의 숨이란 얼마나 숨 막히는 것인지…. 호흡을 참다 잠깐 해면으로 올라왔을 때 참았던 숨이 터지면서 ‘호잇-ʼ 소리가 나오니, 이를 숨비기 소리(숨비 소리)라 부릅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지요. 검푸른 바다에서 울려 퍼지는 숨비기 소리는 생명의 합창 그 자체인 셈입니다. 화산섬이란 특수 조건, 즉 테우 따위의 배를 제외하고는 배를 대기 어려운 조건에서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대단히 높은 ‘물질’을 주업으로 삼은 제주 해녀들.
그야말로 세계 해양사에서 독보적 존재입니다. 그 해녀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해녀학교까지 문을 열어 남자에 외국인까지 해녀 일을 배우겠다며 찾아오지만, 실제 해녀로 활동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지요. 해녀 하나가 사라지면 제주도의 박물관이 하나 사라지는 결과를 빚을 것입니다. 그만큼 해녀는 인류 문화사에 남을 ‘바다의 장인’ ‘자연의 장인’ ‘생태의 장인’이기 때문입니다.


삼촌의 섬,
‘이 당 저 당 당이 최고?’

육지의 삼촌과 제주도의 삼촌은 의미가 딴판입니다. 제주도에서 삼촌은 특수 명칭이 아니라 일반 명칭이지요. 모르는 이를 만나도 선뜻 ‘삼촌’, 과일 가게나 버스에서도 ‘삼촌’을 부를 뿐입니다. 또 남녀 가릴 것 없는 통칭이지요. 그 삼촌 호칭은 모두가 ‘ 당(한문으로는 권당眷堂.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공동체 의식에서 나왔습니다. 제주도 당은 육지의 친족과도 다릅니다.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 쪽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지요. 아버지 쪽 성펜 당(父系親)은 기본이고 어머니 쪽 웨펜 당(母系親), 남자가 결혼해서 생긴 처가 쪽 처 당(妻族), 여자가 시집가서 맺어진 시 당(媤家)까지 있습니다. 웨펜 당, 처 당, 시 당은 여성의 권한과 가족 내 권력이 아주 강고함을 뜻합니다. 가부장적 틀에 얽매여 오로지 부계친, 그것도 장자 중심의 서열만을 외치는 육지의 친인척 관계보다 훨씬 진보적이지 않은가요? 제주도에 살다 보면 당의 가공할 영향력을 피부로 감지하게 됩니다. 둘 사이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십중팔구 당이지요. 당을 모르고서는 제주 사회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주도에는 촌락내혼村落內婚이 40%나 되고, 2~3대 이상 촌락내혼 사례가 많습니다. 게다가 겹사돈 혼인도 드물지 않지요. 이런 조건은 부계 친족만이 아니라 처족을 포함한 폭넓은 당 관계를 만듭니다. 동네 사람을 모두 당으로 여기고 삼촌과 조카로 호칭하는 것은 겹사돈도 마다하지 않는 제주인의 생존 전략일 것입니다.

*이 기사는 주강현 교수의 <제주 기행>을 발췌, 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1년에 절반은 노트북과 카메라를 멘 채 바다를 떠돌며 해양 문명의 원형질을 탐구하는 주강현 교수. 그가 쓴 <제주 기행>은 ‘제주 문화의 표피가 아니라 원형질에 근접하길 희망하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접근을 도와주는 길라잡이 또는 마중물 같은 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책이다. 제주도의 자연과 제주민의 생활에 숨어 있는 역사, 문화에 주목하면서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문화유산임을 역설하고 있다.

10대 후반부터 산에 미쳐 살다 사진에 눈떴고, 신문사 사진기자를 직업으로 얻었고, 자연스럽게 제주도의 자연을 기록하기 시작한 사진작가 서재철 씨. 한라산, 오름, 야생화, 새와 곤충, 해녀와 포구 등 제주도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그에게 제주는 사진의 소재가 아니라 신앙과도 같다. 제주도의 기록자이자 지킴이 서재철 씨는 현재 ‘자연사랑 갤러리’ 관장으로 있다. 이번 칼럼을 위해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이 특별히 추천한 작가이기도 하다.
구성 최혜경 기자 | 글 주강현(제주대 석좌교수, 해양문화연구원장) | 사진 서재철(자연사랑 갤러리 대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