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산골짜기 촌구석을 떠나려고 애를 쓰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를 잘못해 욕을 얻어먹은 날 저녁이면 마당 귀퉁이 재래식 화장실에 앉아 눈물을 찔끔거리며 낮에 본 어린이 잡지의 만화 내용을 떠올렸다. 내 또래 주인공은 갑자기 부모를 잃고 집을 떠나 낯선 고아원에서 살게 되었지만 가정이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훌륭하게 성장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저려오는 다리를 주무르고 코에 침을 바르며 빌었다. 나도 고아가 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그러나 고아가 되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도시 학교로 전학 가기를 꿈꾸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새까맣고 감자처럼 동글동글한 아이들이 있는 시골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을 운동장에서 놀지도 못하고 아버지의 불호령에 밭으로 끌려가는 망아지 같은 내 처지가 싫었던 것이다. 용기를 내어 전학 가고 싶다는 의사를 부모님께 털어놓았다가 부지깽이와 지겟작대기의 현란한 춤사위에 된통 혼만 났다. 고아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하여 나는 어린 시절 ‘앞산 뒷산에 빨랫줄을 건다’는 평창의 산골짜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저 대관령 정상 옛 영동고속도로 준공 기념비 아래에서 안개에 덮인 강릉과 동해를 바라보며 애늙은이처럼 한숨만 쉬었을 뿐이다.
(왼쪽) 강한 바람 때문에 대관령 꼭대기의 나뭇가지는 한쪽으로 누워 있다. 인생이라는 소용돌이 떠밀려 정처 없이 흘러가는 인간들처럼. 전나무 숲에 앉아 있으면 상념이 많아진다.
지난 7월 6일 밤 11시 반이 넘어서자 나는 결국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2018년 동계올림픽의 개최지 결정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평창 사람인데도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그동안의 복잡한 감정이 개최지 결정을 기다리는 스키점프대까지 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모두들 올림픽을 유치해서 지금보다 잘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했기에 평창 사람을 대상으로 한 올림픽 유치 여론 조사의 지지율 93%가 나는 늘 불편했다. 가히 어마어마한 지지율이었다. 저 지지율 앞에선 나머지 7%의 사람들은 입조차 열 수 없을 것이다. 늘 보던 산이 사라지고 집이 사라지고 밭이 사라지고 물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구불구불하던 길이 넓고 바르게 펴지고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기차와 기찻길, 역이 들어선다 하더라도. 그 불편한 마음을 끌고 고개를 넘어 스키점프대를 찾아갔다. 사람들은 잔디밭에서, 계단에서, 저만큼 뒤편에 서서 초조하게 남아공 더반에서 날아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두 번의 실패를 경험했기에 그것은 10년의 기다림이었다. 나는 7%의 속마음을 숨긴 채 스키점프대의 녹색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우리 코흘리개들이 점프를 하기 위해 나무 스키를 타고 그곳에서 차례로 질주하고 있었다. 부디 국가 대표처럼 무사히 안착하기를. 여러 우려와 불안을 잠재우고.
방아다리약수터의 기억
경운기가 온 식구를 태우고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털털거리며 달려 전나무가 우거진 방아다리약수터에 도착했다. 내 얼굴은 이미 땀과 흙먼지로 땟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엉덩이는 멍든 지 오래였다. 난생처음 먹어본 약수는 설탕만 조금 탔더라면 정말 사이다 같았다. 어머니는 약수를 받아 쌀을 씻었고, 아버지는 전나무 아래에서 솥을 걸 화덕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우리 식구들은 약수터로 피서 겸 소풍을 온 거였다. 땔감도 구하고 처음 와본 약수터 주변을 구경하던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일본식 건물의 기다란 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사람들, 어린 눈으로 봐도 병색이 완연한 듯 누렇게 얼굴이 뜬 사람들. 그들의 공허한 눈빛 그리고 그들에게 뱀을 팔러 온 땅꾼의 흥정. 높은 전나무 꼭대기에선 느닷없이 까마귀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뒷걸음질을 쳤다. 어머니는 그들이 폐병쟁이들이라고 했다. 요양을 와 있는 거라고 했다.
약수로 지은 밥은 푸르스름했다. 그 고소한 밥에다 양념을 한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으면서도 나는 전나무 숲 저편에 있을 그들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번져오는 묘한 기운을. 세월이 흘러 소설가가 된 나는 결국 그 이야기를 한 편의 소설로 완성했다. 한겨울 이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 약수터로 요양 온,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한 남자. 그 남자의 허약하고 진땀 흘리는 꿈이 차례차례로 불러낸 사람들. 그는 그들과 꿈인 듯 생시인 듯 한 바탕 굿을 펼친다. 모든 것은, 모든 병은, 모든 화火는 결국 그의 마음속 각각의 깊은 골방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아팠던 것이다. 그때마다 새들이 전나무 숲의 우듬지에서 슬프게 울었다. 꾸꾸루꾸꾸 꾸꾸루꾸꾸….
오대산 전나무 숲에서 침묵을 배웠다
마음이 끝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한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어두워져가는 저녁 오대산으로 들어간다. 천지 사방이 폭설로 덮인 한겨울도 괜찮다. 매표소 옆 허름한 식당에서 청국장으로 끼니를 때우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아주 오래된 어둑어둑한 전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지금껏 오대산에 들어와 얼마나 많은 한숨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풀리지 않는 인생사를 툭툭 걷어차며 얼마나 지독한 악취를 숲에다 풀어놓았던가. 나무들은 바늘 같은 잎을 떨어뜨리며 어느 날은 폭설에 눌린 가지를 통째 뚝뚝 부러뜨리며, 또 어느날은 6백여 년의 삶을 한꺼번에 마감하며 내 불평불만을 굽어봐주었다.
1 방아다리약수터 물맛은 단맛을 뺀 사이다 같다.
2 전나무는 소나무보다 곧고 단정한 맛이 있다.
3 과거 폐병 환자들이 요양을 다녀간 방아다리약수터 요양소.
4 소설가 김도연 씨는 작업실에서 글을 쓰다 답답해지면 계곡으로 낚시를 나선다.
5 사당 앞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사람들. 그 소원이 문득 궁금해진다.
6 평창 사람들은 월정사 입장이 무료다. 타지 사람은 3천 원을 내야 한다.
나는 오대산 전나무 숲을 오고 가며 침묵을 배웠다. 쓰러진 나무 위에서 다시 싹을 틔우는 나무들을 보았다. 바람과 폭설이 내리던 날, 한 나무가 다른 나무와 등을 기대는 것을 보았다. 어른 배꼽까지 차오르던 눈이 마침내 그친 날, 꼬박 일주일 동안 굶주린 새들을 산 밖으로 내보내는 나무들을 보았다. 그러나 나무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평생을 살아도 늘 한자리’였다.
숲에서 나오면 월정사로 갔다. 초등학생 시절, 월정사 경내에는 아주 깊은 우물 같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그 속에는 큰 열목어 몇 마리가 살고 있었다. 나는 돌담에 기대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열목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무기처럼 느껴졌다. 지금 그 자리엔 가지가 무성하고 가시가 많은 꽃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무기일 것같은 열목어는 어디로 갔을까. 범종각의 목어로 변했을까, 아니면 적광전寂光殿의 처마 밑으로 숨었을까. 그도 아니면 8각 9층 석탑의 층마다 풍경으로 매달려 있을까.
월정사를 나오면 다시 오대산 깊은 계곡으로 들어간다. 봄날 자목련이 예쁜 지장암 입구를 지나간다. 손님이 오면 까마귀가 먼저 알려준다는 동대 관음암 입구도 지나친다. 어느 겨울날, 술 취해 찾아간 내게 호된 일갈을 하신 스님이 머무는 영감사 입구도 휙 뒤편으로 달아난다. 눈 내린 겨울밤 귤 빛깔의 등을 창문에 내걸어 시린 내 마음을 위로하던 오대산장의 찻집도 그저 한 번 바라만 보고 지나간다. 길은 비포장이고 마음도 덩달아 요동친다. 편협하고 모난 내 마음이 튕겨낸 돌멩이들이 숲의 나무들을 아프게 한다. 길은 곳곳에 빗물이 고인 웅덩이가 되었다가 얼어붙은 빙판길이었다가 눈길로 모습을 바꾼다. 길 옆 나무들은 연둣빛이었다가 초록이었다가 단풍으로 변하더니 이내 눈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기름처럼 들끓는, 미동도 없이 저 아래로 추락하는 내 마음을 달래주려고 오대산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북대 미륵암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산길 옆에 피어 있는 구절초 한 송이를 보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가다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영영 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가다 보면 아픈 마음에 더러 꽃잎 한 장 내려앉을 때도 있으니까. <북대>는 그렇게 쓴 소설이고, 앞으로도 계속 쓰게 될 소설이다.
대관령의 세 번째 주민 ‘안개’
평창에는 바다가 없다. 그래서 매일 보는 앞산과 뒷산이 지겨우면 나는 대관령으로 간다. 대관령 정상에 올라가 해발 영의 동해로 다이빙하는 상상을 한다. 서쪽에서 맹렬하게 불어온 바람과 눈보라가 대관령의 나무들을 쾅쾅 두드리는 광경을 바라본다. 대관령의 나무들은 강하다. 그 바람과 눈보라에도 끄떡 않고 잘도 버틴다. 오히려 더 세차게 불고 퍼부으라고 주문한다. 그러하기에 대관령의 나무들은 모두 조금씩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가지들은 일제히 동해를 가리키고 있다. 대관령의 세 번째 주민은 안개다. 한번 마음먹으면 큰 산 하나를 간단하게 삼켜버릴 정도로 거대하다. 큰 산 하나를 단숨에 토해낼때도 있다.
대관령을 넘나드는 사람들은 자연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을 넘던 버스가 바람에 뒤 집혔다는 소문이 자자한 적도 있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동차가 없던 시절 대관령을 넘으려면 그야말로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당시 대관령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 늑대, 구미호, 도깨비 들이었다. 옛사람들의 그림지도를 보면 대관령 곳곳에서 활약을 떨치고 있는 그네들의 주소지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강릉 시내까지 내달린 호랑이가 처녀 하나 물고 대관령으로 돌아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강릉 단오제가 시작되기 한달 전 강릉 사람들이 대관령 국사성황당에 와서 제사를 드리는 것만 봐도 잘 알 수가 있다. 그렇다, 대관령 깊은 곳에 국사성황당이 숨어 있다. 대관령 정상에서 선자령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칼바람과 눈보라에 지친 나를 품어주는 곳이 바로 국사성황당이다. 안개 자욱한 날 그곳으로 가는 길은 신비롭다. 안개 속에서 가느다란징 소리를 잡고 걸어가다 보면 불쑥 나타난다.
(왼쪽) 안개가 얼마나 자주 끼면 평창의 ‘세 번째 주민’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어찌 됐든 안개 낀 대관령의 풍광은 모든 상념을 잊게 할 정도로 장엄하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손을 비비고 절을 하고 징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어딘가가 아픈 사람들이다. 그들이 기도를 드리는 뒷모습을 보노라면 숙연해진다. 마치 내 아픈 마음을 대신해서 빌고 있는 것만 같다. 안개 속을 날아다니는 까마귀와 산비둘기들은 마치 저쪽 세계의 사자들인 양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곳이야말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만나는 곳이 아닌가. 겁먹지 마시길. 성황당과 산신각 앞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서늘함이 사라지고 따스한 온기가 몸과 마음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낄 테니까.
평창의 여름은 짧지만 뜨겁다. 그렇지만 뜨거운 한낮이 지나가기 전에 준비해야할 것이 있다. 바로 두엄 더미를 뒤져 지렁이를 찾는 일이다. 거기에다 낚싯대를 준비하고 김밥을 사면 준비 끝이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이 정선으로 들어가는, 진부에서 정선까지의 길은 강원도 길의 백미다. 산은 장쾌하게 솟았고 물은 유연하게 계곡을 빠져나간다. 물과 산의 그 경계 지점을 돌아가는 백 리 길은 아슬아슬하도록 아름답다. 그 길의 어디쯤에 차를 세우고 물 옆 바위에 올라가 낚싯대를 펼친다. 밤낚시가 시작되는 것이다. 낮과 밤이 자리를 바꾸면 들리는 소리라곤 온통 물소리뿐이다. 바위 위에 앉은 내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달이 떠오르기 전까지의 캄캄한 시간을 온 마음으로 견디다 보면 주변에서 하나둘 꿈처럼 피어나는 게 있다. 반딧불이의 반딧불이다. 마음이 온통 환해진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른쪽)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
소설가 김도연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강원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1991년 강원일보, 199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0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십오야월>,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이별 전후사의 재인식>, 산문집 <눈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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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먹고 잘 곳 이효석문학관, 방아다리약수터, 양떼목장, 무이예술관….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평창은 둘러볼 곳이 많은 천혜의 관광지다. 평창에 가서 꼭 맛봐야할 음식은 산채정식. 방아다리약수터 입구에 있는 보배식당(033-332-6656)은 산채정식은 물론 황태구이, 감자전 그리고 동동주가 맛난 집이다. 중견 화가 부부가 운영하는 금당아트펜션(033-332-7048)은 금당계곡과 금당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야생화를 볼 수 있는 곳, 월암계곡의 산세와 맑은 물을 곁에 두고 싶다면 개울건너(033-333-4865)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좋다. 해발 700m 고지에 자리한 700빌리지(033-334-5600)은 산나물 채취, 나무 심기, 주말농장 체험이 가능한 펜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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