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서울예술대학 마스터 과정으로 ‘박기태의 디자인 세계’ 강의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회화가 김태중 씨와
KDA 박현주 씨, 강원도 나들이를 따라온 제자들.
2 스무 평 집 옆 창고는 사진가 강운구 선생이 구상한 것.
강원도 평창, 제법 길이 잘 닦인 도로를 등지고 언덕길로 살짝 올라가니 택시가 그려진 표지판이 들어온다. ‘고석 동산’.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동산’이라는 표현도, 위트 있는 그래픽과 함께 어우러진 시골 밭두렁 풍경에 피식 웃음이 난다. 보라색 스트링 팬츠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손님을 맞는 박기태 대표(KDA, Ki Design Association). ‘어서 오라’는 인사말보다 “별장이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면 안 됩니다”라는 우렁찬 음성이 앞선다. 이 영락없이 맘 좋게 생긴 시골 아저씨는 지금껏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은 시골집을 <행복>에 소개하는 이유를 미처 숨 고를 틈도 없이 설명한다. “고석 동산인 이유는 고故 박고석 화백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생전에 유언으로 세 가지 말씀을 하셨어요. 비석 세우지 말 것, 기념관 짓지 말 것, 자서전 쓰지 말 것. 그 세 가지 중에 딱 하나 안 지킨 게 바로 동산 위 비석입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지인들이 아버지도 뵐겸 쉬었다 갈 수 있고, 가족들도 아주 ‘프리’하게 와서지내다 가는 곳이지요. 이 집은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그저 ‘집’일 뿐입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생전에 즐겨가시던 백록담에서 정말 잘생긴 바위 하나를 발견했다는 이야기, 2년 전 강원도에 큰 물난리가 났을 때도 비석만은 반듯하게 자리를 지켰다는 이야기, 나무 심기의 노고…. 시선이 머무는 곳 모두를 소재 삼아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는다. 박기태 씨가 이 집을 지은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앞서 말했듯 첫째로는 아버지 박고석 화백을 기리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로는 그가 몇 해 전 신문에 기고한 글 가운데 “아주 적은 돈으로도 집을 지을 수 있다”라고 뱉은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스무 평 집도 이만큼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단다.

아버지처럼, 아직도 정릉 골이 그립다 말하는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집 안 곳곳에 힌트처럼 숨겨두었다. 폭이 50cm밖에 안 되는 얄궂은 대청마루, 돌멩이를 살짝 얹어둔 장독대, 초등학교 시절 작은 수돗가가 그것이다. 그뿐이랴, 집 안에는 옛날 구들방을 지켜주던 호랑이 담요까지 켜켜이 쌓여 있다. 고 박고석 선생의 장남 격인 강운구 선생이 스무 평 집 옆 간이 창고를 구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까치글방 박종만 대표는 마당 가꾸는 일을 도왔다. 작은 마당에 쇄석을 깔아 2년 동안 다진 후 작은 자갈 까는 작업을 했고, 뒤편에는 채마밭을 앞뜰에는 수돗가를 마련했다. 관리하는 데 물과 농약 등 수많은 기회비용이 발생하는 잔디 대신 자갈을 깔았더니 발마사지 삼아 맨발로 걸어다니기에도 좋고, 수돗가에서 물장난도 칠 수 있다. 어머니 김순자 선생(고전 의상 연구가)은 이 집에 와서 참선을 하신다. 또한이 집은 올해 스무 살이 된 딸아이 ‘아희’를 위해 지은 집이기도 하다. 스무 살 아희가 머무는 스무 평 집이라! “한창 바빠 집을 돌볼 겨를이 없는 20대에는 20평대에, 30대에는 30평대, 40대는 40평대에, 50대는 50평대, 60대는 다시 40평대 집에 살아야 합니다. 지금도 제주도에 1백 평짜리 세컨드 하우스를 짓겠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요. 그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 년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소모되겠어요. 차라리 최고급 펜트하우스를 빌려 오롯이 쉬고 오라고 이야기해줘요.” 집 주변에 녹지가 자연이 충분하다면 제아무리 집이 작아도 전혀 답답하지 않다. 아니, 작을수록 아늑하고 편안하다. 그래야만 집을 향해 열려 있는 자연의 소중함을 지고지 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1 고석 동산 속 산 오번지 집의 총면적은 23.5평, 인테리어를 포함해 평당 3백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2 거실 반대편에는 작은 다락방이 요새처럼 숨어있다.
3 뚝딱 차려내는 부추 꽃게 수프.

4 ‘산 오번지’는 세계 도처에서 박기태 씨를 찾아오는 친구들이 머무는 공간이기도 하다. 손님을 초대할 때면 간단하게나마 테이블 세팅을 준비한다.
농사, 삶의 고단함 그리고 즐거움 삼각 지붕 작은 집에 들어가니 식탁 위에 식재료가 한가득이다. 스틸 냄비에서는 꽃게가 맛있게 보글보글 끓고 있고 한 손으로는 냄비를 휘휘 젓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돼지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중국 팬에 우르르 넣고 볶는 모습이 영락없는 주방장이다. 아일랜드 식탁에 어정쩡하게 마주 앉아 준비한 질문들을 물리고, 이제 막 머릿속에 몽글몽글 피어오른 질문부터 던졌다. “요리는 다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1970년대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던 유학 시절,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학생이라니까 ‘조’라는 주방장이 몇 가지 메뉴를 가르쳐줬어요. 이것만 알면 굶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만드는 것보다 먹는 것이 더 많아 금세 쫓겨났어요(웃음).” 식당 보조를 하며 익힌 음식 솜씨는, 지금 그가 가진 가장 값진 재산이다. 고기는 식당에 납품하는 고기 도매상을 알아내 대먹는 것이고, 해산물은 평창을 지나 속초 새벽 항구에 가서 공수해온 것이다. 채소는 모두 밭에서 직접 기른것. “유기농이라서 그런지, 정말 가지가 거짓말 안 보태고 팔뚝만 해요. 겨울에 뽑아먹는 파, 흰 눈 속에 파묻힌 그것의 그 순수한 맛은 이루 말할 수 없죠.” 레스토랑 ‘에오’의 어윤권 사장이 종종 산 오번지 집에 놀러오는데, 그가 이 눈 속의 파를 송송 썰어 만들어주는 달걀 크레페가 정말 예술이란다(둘이 모이면 요리 배틀을 할 정도!). 최근 5년 동안 나무 심기와 채소 가꾸기를 하면서 살았더니, 아줌마들이 왜 그렇게 아파트 베란다에 고추나 토마토를 기르며 사는지 알겠더라는 박기태 씨. 아침이면 고것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마당에는 자작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이는 현재 시행착오를 겪는 중. 이미 다 큰 나무를 뽑아다 심었더니 햇볕을 보는 방향이 바뀌어서인지 오래 못 살고 죽더란다. 그래서 다시 어린 묘목부터 애면글면 키우는 중이다.

1 집 옆에는 혼자서는 감당하기 벅찬 깻잎밭과 딸기밭이 있다. 손님이 올 때마다 함께 수확하고 나누는 기쁨이 크다.

2 산악자전거는 그의 오랜 취미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