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제주 올레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페인트로 그린 화살표와 리본이 유일한 이정표이던 올레길 곳곳에 ‘간세’라는 작은 조랑말 모양의 이정표가 생긴 것이다. 사회 환원의 일환으로 디자인 재능 기부를 펼치고 있는 현대카드와 협업해 마련한 간세 이정표는 올레길 20개 코스에 1km마다 하나씩 설치된다.
지금이야 제주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올레길이지만,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본격적으로 올레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2007년만 해도 올레길을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로부터 겨우 만 3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 제주 올레는 제주도를 넘어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누군가는 유사 이래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벤처기업으로 제주올레를 꼽기도 한다. 해안선을 따라 현재 20개 코스가 개발된 올레길은 산, 바다, 들판, 오름, 농장, 마을 등 제주에 살아 숨 쉬는 모든 풍광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때로는 농장을 가로지르고 아기자기한 시골 마을의 골목길도 지난다. 낭만적인 해변을 걷기도 하지만 위험천만해 보이는 아슬아슬한 해안가 절벽을 지나기도 한다. 제주도 하면 중문단지를 비롯한 몇몇 관광 코스가 전부인 양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관광버스와 렌터카가 아닌 두 발로 올레길을 걸으며 그저 눈으로 즐기는 관광이 아닌 오감으로 체험하는 도보 여행을 통해 제주의 진면목을 만나고 있다. 이 감동의 경험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늘도 묵묵히 올레길을 걷는 여행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 제주올레의 마스코트가 된 간세 로고. 2 제주올레 사무국으로 쓰이는 소라의 성. 김중업 씨가 설계한 건물이다. 3 각 코스 시작점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안내판이 지도와 코스 특징을 소개힌다. 4 특별한 스토리를 지닌 장소의 간세에는 안장 모양의 안내판이 설치된다. 5 곳곳에서 길을 안내하는 간세. 6 기존의 화살표도 길 안내에 함께 활용하고 있다. 7 코스 번호와 함께 고유 번호, 코스 완주까지 남은 거리 등이 표기되어 있다. 8 간세를 세우기 힘든 장소에는 리본을 달아 길을 안내한다.
제주올레, 디자인을 만나다 2007년 2천 명에 불과하던 제주 올레 방문객 수는 2009년 25만 명으로 급증했다. 여행자가 많아지는 만큼 길을 잃거나 부상 당하는 등 안전사고의 빈도수도 잦아지게 마련. 올레길에 좀 더 체계적인 여행 길잡이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이에 올봄, 제주 올레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화살표와 리본이 유일한 이정표이던 올레길 곳곳에 ‘간세’라는 작은 조랑말 모양의 이정표와 각 코스 시작점의 안내판 등을 설치한 것이다. 제주올레와 현대카드가 함께한 디자인 프로젝트의 실무를 담당한 현대카드 디자인실 오준식 실장은 서명숙 이사장과 첫 만남이 있던 날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올레길을 혼자 걷던 여성이 사무국에 전화를 걸어왔어요. 길을 잃었다는 거예요. 지나온 길, 주변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멀리 바다가 보이고, 돌담이 있고, 귤 농장도 보이고…’ 하며 설명하는데, 제주도는 어디나 바다가 보이고 귤밭이 보이거든요. 자원봉사자가 그 여행자를 찾는 데 네 시간이나 걸렸다고 하더군요. 고작 한 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말이죠.” 이 사건은 그에게 ‘여행자 편의와 안전성 확보’라는 이번 디자인 프로젝트의 제1 목표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올레의 마스코트가 된 조랑말 ‘간세’ 올레길 여행자의 길잡이 이정표 ‘간세’에는 현재 걷고 있는 코스, 위치 번호와 종착점까지 남은 거리 등이 표시되어 있다. 따라서 만약 길을 잃더라도 마지막으로 본 간세의 번호를 기억하고 있으면 택시를 부르거나 구조 요청 시 본인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다. 올레길은 자연이다. 사람들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 올레길을 걷는다. 따라서 이정표 하나를 세우더라도 친환경적인 고려가 중요했다. 이는 친환경 소재라는 물리적 개념을 넘어 문화적 친환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정표 ‘간세’는 제주의 정체성을 담기 위해 조랑말을 모티프로 삼았다. 제주의 푸른 초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랑말에 느릿느릿한 게으름뱅이라는 뜻의 제주 말 ‘간세다리’에서 따온 이름을 붙였다. 제주도를 제대로 즐기려면 제주 초원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조랑말처럼, 놀다가 쉬다가 간세다리로 천천히 가는 것이 좋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파란색은 곧 제주도의 색이다. 지중해보다 아름다운 빛깔이라며 제주 바다를 자랑스러워하는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색이다.
친환경 디자인이란 이런 것 간세는 간단한 구조의 외곽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내판이 조금이라도 자연 풍광을 가리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같은 맥락에서 꼭 필요한 자리에만 이정표를 세운다는 원칙 아래 1km 간격으로 간세를 설치하고, 간세를 세우기 어려운 장소에 리본을 달고 기존의 화살표를 함께 활용했다. 물론 간세 또한 친환경 소재로 만들었다. 옥수수에서 추출한 당분을 발효시켜 만든 천연 생분해성 플라스틱으로 한국 식약청을 비롯해 해외 유수 기관으로부터 환경에 무해한 원료로 승인받은 천연 식물 합성수지다. 폐기 시 땅속에 묻으면 일정 시간이 지나고 자연 분해된다. 간세는 설치와 고정을 위해 매립 구조물을 땅속에 심는데, 이 또한 제주 지역의 자연 폐기물을 활용했다. 큰 태풍이 한번 지나가면 제주 해안에는 비바람에 부러진 나무들이 떠다니는데, 이런 목재와 폐석재를 지지대로 활용한 것이다.
1 간세 인형은 디자인과 제작 방법을 현대카드에서 제공하고, 기증받은 헌 옷과 자투리 천 등을 재활용해 제주 지역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제작된다. 간세 인형을 비롯한 기념품 판매로 발생하는 수익금은 올레길을 관리하고 새로운 올레길을 개척하는 등의 사업비로 활용된다. 제주올레는 다양한 수익 사업을 통해 제주올레의 자생력을 강화하고 지역민 소득 증대 등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친환경 기념품, 간세 인형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세계 어느 곳을 여행하더라도 열에 아홉은 중국산 기념품을 구입하게 된다. 지역 토산품이라고 굳게 믿고 지갑을 열게 한 물건이 집에 돌아와 살펴보면 ‘메이드 인 차이나’ 스티커를 붙이고 있어 속았다는 기분이 든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잘 만든 물건일지라도 지역의 정서와 문화적 특성을 무시하고 공장에서 판박이로 만들어낸 것이라면 여행의 감동과 추억을 간직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올레와 현대카드의 디자인 협업으로 선보인 조랑말 모양의 간세 인형은 ‘의미 있는’ 기념품이다. 간세 인형은 친환경 핸드메이드 인형이다. 기증받은 헌 옷, 의류 회사에서 쓰다 버린 자투리 천, 제주도 호텔에서 수거한 헌 수건 등을 활용해 제주의 자원봉사자들이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만든 것이다. 현대카드 디자인실에서 개발한 디자인을 기본으로, 사용하는 천의 무늬나 질감, 만드는 이의 응용력에 따라 새로운 디자인이 가능하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넥타이로 만든 실크 소재 간세 인형, 낡은 청바지 천을 패치워크한 펑키 스타일 간세 인형 등 그 모양과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간세 인형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인형 하나가 참으로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처음에는 한 업체에서 중국산 인형을 기증하겠다는 제안도 있었다. 단순히 기증받은 인형을 판매한다면야 여러모로 편리하겠지만, 제주올레와 현대카드는 이를 고사했다. 자연환경과 지역 사회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제주올레의 기본 철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대량 생산한 간세 인형을 판매할 경우, 인형 생산 과정과 제주까지 운반해 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량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간세 인형 판매가 제주 지역이 아닌 중국 제조업체에만 수익을 안겨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인형 생산 방식은 재활용을 통해 생활 폐기물을 줄일뿐더러 생산 과정에서 탄소도 배출하지 않는다. 인형을 구입하는 여행객은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재활용 디자인을 구입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여행의 감동을 추억하기에 충분한 진짜배기 ‘메이드 인 제주’ 기념품을 갖는 것이다.
2 포스터를 장식한 서체는 올해 87세인 제주 최고령 해녀 고인호 할머니의 손글씨를 조합해 개발했다. 3 제주올레 패스포트는 각 코스를 지날 때마다 그 지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스탬프를 찍는 일종의 여행 증명서. 4 송이 슈퍼처럼 올레길에서 만나는 동네 가게와 식당 등에 패스포트 스탬프를 비치하고 간세 인형과 우비 등을 판매한다.
제주 사람에 의한, 제주 사람을 위한 이전에는 제주도 관광 산업의 혜택을 보는 곳은 중문단지 내 숙박업소와 관광지 음식점, 렌터카 회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올레길로 인해 제주도 구석구석의 작은 구멍가게 매출이 늘고 시내버스와 택시 승객이 늘고 있다. 비로소 제주 관광 산업이 지역 경제 활성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게 된 것이다. 이번 디자인 프로젝트 또한 같은 맥락 아래, 지역민이 함께 참여하는 디자인,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디자인을 모색했다. 자원봉사자가 만드는 간세 인형뿐 아니라, 올레길에서 만나는 작은 가게나 식당 등에서 볼 수 있는 제주 올레 포스터에 쓴 독특한 서체는 제주 최고령 해녀인 고인호 할머니의 서체를 바탕으로 개발한 것. 올레 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소한 재미는 제주 올레 패스포트에 있다. 각 코스를 지날 때마다 그 지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스탬프를 찍는 일종의 여행 증명서. 올레길을 걷다 만나는 가게와 안내소 등에서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데, 이는 코스 완주를 기록하는 재미를 줄 뿐 아니라 여행객이 지역 상권과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 “자연보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없다”
현대카드 정태영 대표가 디자인 기부로 처음 제주올레 후원을 제안해온 것은 2년 전이다. 먼저 후원을 제안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이를 고사했다. 세상에 자연을 능가하는 디자인은 없다.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에 인위적으로 만든 디자인을 더한다는 것이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제주 올레길 방문객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좀 더 체계적인 안내 시스템이 필요했다. 우리가 개척한 올레길은 폭이 70cm에서 1m 미만으로 좁은 길이다. 이런 곳은 기존의 리본이나 화살표만으로도 길 안내가 충분하다. 그러나 마을 주변의 넓은 길이나 갈림길 등에서는 좀 더 눈에 잘 띄는 이정표로 보완할 필요를 느꼈다. 현대카드 디자인실 실무진과 작업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로서의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서도 환경을 거스르지 않는, 최소한의 디자인만 더하는 것이었다. 제주올레가 지역민 개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기획하고 진행할 뿐 나머지는 주민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해왔듯, 현대카드도 지역민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전문 지식이 필요한 일들을 맡아주었다.
현대카드 디자인실 오준식 실장 “우리의 남다른 재능, 디자인을 선물하다”제주올레와 현대카드가 함께한 이번 디자인 프로젝트는 2년 전 현대카드 정태영 대표가 우연한 기회에 올레길을 여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올레길을 걸으며 지금껏 몰랐던 제주의 참모습을 발견한 정 대표는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올레길 여행을 계기로 사단법인 제주올레 측에 먼저 후원을 제안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현대카드가 실천하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인 ‘디자인 재능 기부’의 일환이다. 뉴욕 현대 미술관과 함께한 데스티네이션 : 서울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 신진 디자이너를 해외에 알리고, 서울역 버스환승센터를 직접 디자인하고 시설물을 제작・기부해온 활동과 같은 맥락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간세 디자인과 기념품 개발뿐 아니라 제주올레 홈페이지(www.jejuolle.org) 리뉴얼 작업도 마쳤다. 새로운 홈페이지는 보행자 입장에서 구성한 코스 안내 지도를 선보여 지리적 이해를 높이고 코스별 특성을 명쾌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제주올레와 현대카드는 앞으로 상품 개발뿐 아니라 올레 여행객을 위한 숙박비 1만 원의 숙박 시설 ‘올레 알베르게’를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