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가면 살기 좋다는 말에 열두 살 때 밀항을 계획했죠. 제주도에 가면 일본으로 가는 배가 있다고 해서 무작정 갔어요. 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아 밀항을 포기하고 1년 넘게 제주도에서 살았어요. 극장 포스터를 그리면서 돈을 벌었죠. 수입이 좋은 날은 10원짜리 돼지고기 국수를 먹고 적게 번 날은 5원짜리 멸치국수를 사 먹으면서 살았어요.” 자연 요리 연구가이자 방랑 식객으로 잘 알려진 임지호 씨는 오래전 제주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40여 년 전, 제주 시내에는 코리아나, 현대, 동양, 제일 극장과 시민회관까지 다섯 개의 극장이 있었다. 여기저기 극장을 옮겨 다니며 포스터를 그리던 열두 살 소년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허기를 달래느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멸치국수의 맛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별다른 재료를 넣은 것도 아닌데 멸치의 깊은 맛이 어찌나 좋던지. 당시 그가 자주 가던 국숫집 할머니는 한평생 해녀로 물질한 분이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의 요리법과 자신의 요리법이 닮아 있음을 느낀다고.
산과 바다를 떠돌며 음식 재료를 구하고 특별한 레시피 없이 기분 따라, 상황 따라 손 가는 대로 굽고 지져내는 그만의 요리법은 오랜 방랑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세계 어딜 가나 식재료의 성질은 비슷비슷하다고 말하는 그는 제주도의 맛이 육지와 다른 이유는 식재료의 차이라기보다는 섬사람의 성품과 오랜 역사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제주 사람의 말을 잘 들어보면 질질 늘어지지 않고 탁탁 끊어지는 분명한 톤이 느껴진다. 모진 바닷바람을 맞고 산 섬사람 특유의 끈기와 강인함도 느낄 수 있다. 음식 맛도 그와 비슷하다. 아기자기하고 잔잔한 맛이라기보다는 투박하지만 깔끔하고, 깊이가 있는 맛이다.
해녀가 직접 잡아 올린 고등어, 자리, 갈치, 성게, 톳, 미역 등의 해산물과 비바람 맞고 자란 풀을 뜯어 먹어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풍부한 돼지고기, 말고기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먹을거리. 그가 즐겨 찾는 음식점은 버스터미널 주변에 간판도 없이 숨어 있는 조그만 식당이다. 재래시장 한 귀퉁이에 달랑 의자 하나 내놓고 직접 잡은 자리나 성게를 파는 할머니의 좌판은 어떤 수산시장 못지않다.
“자리는 싸고 맛도 좋아요. 짚에 불을 지펴서 소금구이를 해먹는 게 제일 맛있는데, 그걸 파는 집이 없어요. 가정집에서나 해먹는 메뉴죠. 조천 지나 올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옛날 식으로 돛단배를 띄워 자리를 잡는 할아버지들이 계세요. 그물을 물속에 담그고 수면에 닿게 수경을 쓰고 있다가 물속에 고기가 몰려 들면 “떠!”라고 큰소리를 지르죠. 아주 옛날 방식이에요. 그 할아버지들을 만나면 짚에 구운 제대로 된 자리를 맛볼 수 있어요.” 그는 자리를 맛있게 먹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줬다. “제주도 사람들이 자리물회를 먹는 방법도 특이해요. 횟집에 가면 테이블마다 빙초산이 놓여 있어요. 빙초산의 강력한 신맛이 자리의 비린 맛을 잡아주고 살을 꼬들꼬들하게 해줘요. 억센 가시도 빙초산을 치면 부드러워지니까 유용하죠. 제주의 참맛을 느끼고 싶다면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_ 사진 한홍일
'임지호식' 제주 맛집 찾기
1 제주공항 뒤편으로 늘어선 횟집에선 해녀들이 해안가에서 갓 잡아 올린 펄떡이는 활어를 취급한다. 회만 파는 것이 아니라 활어를 이용해 즉석에서 각종 반찬을 만들어주는 것이 장점. 2 유명 호텔이 즐비한 올레길 4번 코스 해안가에는 한평생 해녀로 살아온 할머니들이 운영하는 조그만 죽집이 몇 군데 있다. 각종 해산물로 쑨 죽은 바다 내음 가득한 별미다. 3 서귀포와 제주에는 서너 군데의 재래시장이 있다. 제일 유명한 동문 재래시장에 가면 해녀들이 물질로 잡은 각종 해산물부터 할머니들이 소일거리 삼아 산에서 뜯은 각종 산나물을 풍성하게 구입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할머니들이 직접 끓인 톳국이나 고사리탕 같은 별미도 맛볼 수 있다.
임지호 자연 요리 연구가로 경기도 양평에서 ‘산당’(031-772-3959) 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방영된 SBS의 다큐멘터리 <올레길을 가다>를 통해 제주도의 자연과 맛에 대한 그만의 깊이 있는 요리 철학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