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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고향을 찾아서_구례] 지리산 뜰지기 고영문 대표가 내놓는 심산유곡 산채 쌉쌀하나 달보드레한 연둣빛 고운 맛
오뉴월 지리산 골짜기는 풍요롭고 향기롭다. 눈길 닿는 곳마다 어린 새순, 발길 닿는 곳마다 여린 나물이다. 날된장 얹은 쌈 맛도 각별하지만 파릇하게 데쳐 조물조물 무쳐 먹는 그 맛은 1년 기다림이 아깝지 않은 늦봄의 별미다.글

(왼쪽) 국내 최고의 청정 지역인 지리산 해발 800m 고지에서 산채와 약초 농사를 짓는 지리산 노섬뜰 고영문 대표.
(오른쪽) 참나무와 편백나무 숲 사이로 띄엄띄엄 심어두고 가꾸는 곤달비밭. 청정한 공기, 적당한 햇볕이 필수 조건이다.


산나물은 축복이다. 이른 봄 밭둑에 돋는 나물은 반갑긴 할망정 귀하진 않을 터. 가쁜 숨 몰아쉬고 뻐근한 종아리 주물러가며 기어오르듯 찾아 들어간 골짜기에서 만나는 산나물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 연한 새순 하나 뜯어 입에 넣으면 알싸한 향, 맑은 단맛이 하루 종일 입안을 맴돈다. 귀하기로는 옻순이요, 달기로는 가죽나무순이라! 두릅은 축에도 못 낀다지만 서울내기 혀끝엔 산중 흔하디흔한 곰취도 과분한 호사다. ‘지리산 뜰지기’를 자처하는 고영문 씨는 그 산채 향기에 빠져 서울 생활을 접고 지리산 자락으로 깃들인 귀농인이다. 피아골 깊은 산자락에 곤달비와 산마늘 등을 심어 거두는 농사꾼이기도 하다. 오미자나무와 오갈피나무, 헛개나무, 엄나무 등을 심어두고 청정한 약초를 거둬 ‘지리산 노섬뜰’이라는 브랜드로 판매도 한다.
지리산 새벽 기운을 제대로 쐬기 위해 전날 밤에 도착해 뜨끈한 아랫목이 있는 한옥에 묵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통나무 장작 타는 냄새에 이끌려 마당으로 내려서고 보니 기대하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남도에 흔한 대나무를 잘라 만든 평상에 동네 할머니들이 두런두런 모여 앉아 가죽나물 부각을 만들고 계신 것. 질척하게 쑨 찹쌀죽에 참기름을 아낌없이 부어 저은 다음 새들새들 말린 가죽나물의 앞뒤에 넉넉하게 발라 볕 아래 너는 정겹지만 낯선 모습.

“다른 데선 찹쌀풀을 쓴다지만 쌀알이 살아 있게 죽을 쒀서 발라야 기름에 튀겼을 때 더 많이 부풍께 파삭하니 맛있지. 간은 젓국으로 맞추고. 남들은 1년만 삭히면 먹는다지만 우리는 젓국도 한 3년 돼야 먹어. 안 그러면 비려서 먹을 수나 있나?”
산골 할머니 몇 마디 말씀에 가죽나물 부각 비법이 모두 나온다. 산에서 꺾은 가죽나물을 살짝 데쳐서 말린 다음 찹쌀죽을 바른 후 그 상태에서 살짝 쪄 갖은 양념을 넣고 무쳐 먹으면 그 또한 별미란다. 이런저런 나물 얘기를 귀동냥하는 동안 고영문 대표가 마중을 왔다. 할머니들과 나누는 대화에 슬쩍 끼어들며 보이는 표정이 재미있다. 서울 손님손님에게 큰 자랑거리 보여준 것 같아 뿌듯하지만 그 역시 가죽나물 부각 만드는 법까지는 터득하지 못해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다.

1 지리산 자락은 그 자체로 나물밭이다. 미생물이 풍부해 비료를 뿌릴 필요가 없는 부식토로 나무는 물론 산채도 잘 자란다.

기름기는 없을망정 거름기는 넉넉한 산골짜기의 산채 농사
산밭을 보러 왔으니 응당 산을 타야겠지만 몇 걸음 못 걷고 벌써 숨이 가쁘다. 해발 800m 고지에 꾸린 밭을 밭이라 해야 하나…. 참나무, 편백나무가 빼곡한 숲 사이로 곤달비를 띄엄띄엄 몇 포기씩 심은 것이 밭이란다. 골짜기 하나가 통째로 밭이니 땅 아까운 줄 모르고 넉넉하게 자리 잡아가며 가꾸는 농사인 것이다. 걷는 내내 몇 년, 아니 몇 십 년을 내리 쌓였을지 모를 낙엽 사이로 발이 푹푹 빠진다. 발끝으로 헤집거나 호미로 파보면 푸실푸실 기름기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산밭. 기름기는 없을망정 거름기는 넉넉한 땅이다. 미생물이 풍부해 비료 뿌릴 필요가 없는 부식토인 까닭이다.
“곤달비는 조밀하게 심으면 저희끼리 부딪혀 썩어버려요.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심어야지. 아기 손바닥만 한 잎에 구운 삼겹살을 싸 먹으면 꿀맛이지요. 간장에 절인 곤달비 장아찌는 찬물에 밥만 말아 얹어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고요. 이런저런 반찬 없이 밥 한술 뜨고 된장 얹어 싸 먹는 맛이 그중 제일이긴 하지만….”
말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한 잎 뜯어 입안에 넣지 않을 재간이 없다. 딱 이맘때, 나무엔 한창 물이 오르고 산중의 피톤치드량은 최고조에 이른다. 산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말갛다. 산을 타는 중간 중간 엄나무순이나 두릅순을 똑똑 따는 재미도 각별하고.
“밭농사야 모르지만 산중에서 두릅 키우면서 약 치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을걸요? 농사에 관한 한 어머니도 못 믿는 게 현실이죠.”
고영문 대표가 산꼭대기 농사만 고집하는 이유다. 몇 년에 걸쳐 발품 팔아가며 밭을 사들일 때도 남보다 높은 곳, 누구의 발길도 거치지 않은 땅만 보러 다녔단다. 나고 자란 고향은 전라북도 고창이지만 언젠가는 시골살이 하겠다는 맘 하나 품고 숨가쁘게 바쁜 광고업계에서 일하며 서울살이를 한 그다. ‘원시적인 피’가 흐르는 통에 부지런히 산을 타고 야생화 공부를 하며 보낸 세월이 20년.

2 지리산의 기운을 받고 자란 여린 두릅은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3 얼결에 남편을 따라 내려온 최문희 씨도 1년 만에 시골 아낙이 다 되었다.
4 산농사에서 트랙터나 경운기는 무용지물. 이럴 땐 지게가 요긴하다.


“30대 초반부터 집에서 난을 키웠는데 많을 때는 화분이 2백 개 정도 되었던 것 같아요. 산을 타도 그냥은 오지 않고 꼭 무언가를 꺾어 오곤 해서 아내가 신기해했지요. 주말농장에서 상추며 쑥갓 키워 먹을 때까지만 해도 아내는 제가 귀농을 꿈꾼다는 걸 몰랐어요. 시간 날 때마다 방방곡곡의 땅을 보며 깃들일 곳을 찾아다닌다는 것도.”
10년 전부터 귀농 교육을 받아가며 귀농 준비를 한 끝에 2008년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혼자 구례로 내려와 농사를 시작했다고. 1년 후에는 가족 모두 구례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 사업을 그대로 둔 채 농사를 시작한 까닭에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과 구례를 오갔다는데 급한 미팅이 잡히면 농사짓다 산길을 내려와 그 길로 차를 달려 서울 왕복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덕분에 1년간 사용한 기름 값이 웬만한 중형차 한 대 값은 넘는다는 전설을 가진 그다. 농사일을 염두에 둘 때부터 산채와 약초를 생각했다는 고영문 대표는 강원도와 지리산 근처를 맴돌다 결국 지리산을 택했다. 하동도 좋고 남원도 좋지만 결국은 피아골이 있는 구례가 눈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고. 남편의 심중을 까맣게 모른 아내 최문희 씨가 얼결에 귀농하게 된 사연도 재미있다.
“신혼 초부터 경기도 과천에서 살았는데 남편은 길을 다녀도 멀쩡한 길을 놔두고 과천에서 안양까지 이어진 굽이 길로만 차를 몰았어요. 2008년인가? 남편과 여행 삼아 구례에 와봤는데 몇 달 후 중요한 경매가 있다는 거예요. 남편은 일이 바빠 못 가니 저더러 대신 가라고 하더군요. 얼결에 새벽 기차를 타고 전라남도 순천에 내려와 경매장에 들어갔지요. 그 와중에도 남편이 일러준 금액보다 50만 원은 더 써야 되겠구나 싶어 그렇게 했더니 낙찰이 되더라고요. 부동산 투자하는 줄 알았지 무슨 용도인지도 모르고 착실하게 심부름을 해준 거죠.”
식구 모두 정착한 지는 불과 1년. 이젠 시골 생활이 완전히 몸에 뱄다. “시골 아이들은 수학여행을 가도 저희들끼리 밥을 해 먹는대요. 밥통에 쌀이며 김치며 이고 지고 가서 다섯 끼나 밥을 해 먹는다는데, 작년엔 중학교 1학년이던 딸과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이 수학여행 가서 거뜬하게 밥 잘해먹고 돌아왔더라고요.”


1 보드레한 곤달비잎에 밥과 쌈장을 얹어 그 자리에서 싸 먹는 맛은 각별하다
2 소금 간한 엄나무순 나물과 쌉쌀한 민들레김치. 
3 오갈피순 나물은 초고추장을 넣어 무쳐 먹는다.


쓰고 달고 떫고 신 지리산 나물 밥상
산길을 내려오면서 쉬엄쉬엄 꺾은 산나물이 자루 속에 제법 묵직하다. 알싸한 향을 내는 초피는 민물 회를 즐기는 섬진강 사람들이 디스토마 걱정을 잊고 살게 해준다는 약초. 예전에는 횟배 앓을 때나 치통으로 쩔쩔맬 때 초피 잎을 잘근잘근 씹으면 어느새 통증이 사그라지곤 했기에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초피 먹을 줄 알아야 비로소 구례 사람 대접을 받는다지만, 고영문 대표 역시 아직까지도 초피를 넣어 담근 김치는 부담스럽다고. 고들빼기는 이제 겨우 입맛을 들인 정도란다. 이맘때 산에 오르면 우선 눈이 바쁘다. 잡풀 우거진 틈에 고사리가 지천이고 둥굴레, 곰취, 머윗잎도 비죽비죽 솟아 있는 까닭이다. 어렵지 않게 바구니 한가득 채워 내려와서는 흐르는 물에 슬쩍 헹궈 파릇하게 데친다. 엄나무순이나 곰취나물은 국간장이나 소금 살짝 넣어 간 맞추고 갓 짠 참기름에 갖은 양념 넣어 무쳐내면 대번에 밥상이 그득 찬다. 찹쌀고추장에 식초를 보태 무친 오갈피순 나물은 새콤달콤하고, 살짝 볶은 햇고사리 맛은 고소하면서 달큼하다. 간간이 쌉싸래한 민들레김치 한 점씩 얹어 먹다 보면 밥 한 그릇 비우기는 잠깐 사이. 하고많은 농사 중에 굳이 산채와 약초를 고집하기에 가깝게 지내는 농부들 역시 약 칠 줄 모르는 진득한 사람들이다. 서울에서 광고 영업으로만 잔뼈가 굵은 고영문 대표는 그 진득한 농부들이 재배하는 작물을 살뜰하게 챙겨 마케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단다.
“재배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생산하는 방식이 다 달라요. 하지만 농협에서 수매할 때는 일괄적으로 가격을 매겨버리거든요. 골라서 산 후 골라서 파는 마케팅을 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죠. 지리산 골짜기에서 나는 그 좋은 작물을 모두 제가 키울 수는 없으니까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재배한 것을 착실하게 모아서 세련된 패키지에 담아내는 작업, 합당한 가격에 팔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도시물 먹은 귀농인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죠.”


1 왼쪽은 엄나무순, 오른쪽은 두릅이고 아래는 오갈피순이다. 살짝 데쳐 먹는 맛이 향기로운 봄나물.
2 엄나무순과 초피잎. 한움큼만으로도 천지에 향기가 진동한다. 
3 고사리나물, 두릅 초회, 오갈피순 나물.
4 쌈과 간장 장아찌로 먹는 곤달비 잎. 
5 ‘자연 밥상 산춘추’라는 브랜드로 판매하는 말린 나물 세트.


지리산에서 즐기는 문화・봉사 생활
요즈음 고영문 대표가 흠뻑 빠져든 일이 또 한 가지 있다. 최근 한라산 올레길 못지않은 걷기 코스로 각광받기 시작한 지리산 둘레길을 답사하고 좋은 코스를 개발하는 작업이다. 그중에서도 하동-구례 간 코스Style를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구례에 정착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다며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지리와 역사, 문화에 관한 대화를 이어갈수록 구례 사람보다 더 구례 사정에 해박한 지식을 꺼내놓음으로써 사단법인 ‘숲길’의 조사 팀원이 될 수 있었단다.
산 농사에서 트랙터나 경운기는 무용지물이다. 가장 똘똘한 도구는 바로 지게. 허술해 보여도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짐 나르는 데는 지게만 한 게 없다. 문제는 보통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 언뜻 봐도 마른 체구의 그가 뒷목 꼭지까지 등짐을 지고도 너끈하게 산길을 오르내릴 수 있는 건 오랜 기간 해온 마라톤 덕분이다.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10년 전 마라톤을 시작했다는데, 풀코스 완주 횟수가 자그마치 23회. 최고 신기록이 2시간 59초라니 단지 아마추어의 실력은 아닌 듯싶다. 고영문 대표와 아내 최문희 씨는 지리산 생활을 재미있게 보내는 방법을 진즉에 터득했다. 귀농한 예술인들이 모여 만든 ‘지리산 학교’에서 취미 생활을 시작한 것. 아내는 퀼트와 도자기, 사진을 배우고 남편은 목공예와 사진 수업을 착실하게 받는다. 목kr공예는 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최 참판 댁에서 배운다고. 지리산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때로는 학생으로, 학생이 선생님으로 역할을 바꾸는 경우가 허다하다. 각자 잘하는 분야를 남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1년에 한 번, 하동에서 열리는 ‘지리산 야생차 축제’에 작품을 출품해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저희 집에서 뚝 떨어진 산막에 혼자 사는 총각이 있어요. 털보라고 부르는 총각인데, 장구도 배우고 서각도 배워서 보통 솜씨가 아니죠. 차가 없으면 버스 타고, 버스 놓치면 걸어 다니는데, 하고 싶은 취미 생활은 다 하는 걸 보면 용하거든요. 산골 생활 심심하다는 건 모르고 하는 소리죠. 문화 혜택이라는 것도 본인이 찾아 먹기 나름이니까요.” 노후 걱정에 편할 날이 없던 서울 생활을 접고 찾아든 지리산. 그곳에서 고영문 대표는 태산처럼 쌓인 일을 만들어내고 다양한 취미 생활과 보람 있는 봉사 활동까지 찾아냈다. 남보다 조금 먼저 깨닫고, 조금 빨리 발품을 팔아 얻은 소득이다. 귀농, 이만하면 결심 한번 해볼 만한 일이지 싶다.

살짝 데쳐 말린 다음 젓국 섞은 찹쌀죽을 발라 말리는 가죽나물 부각. 살짝 튀겨 먹으면 고소한 맛이 그만이다.

‘건강의 고향을 찾아서’는 한국벤처농업대학 설립자이며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으로 재직 중인 농업경제학자 민승규 박사와 함께 기획・구성한 기사입니다.


이명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