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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생활용품의 보고, 온양민속박물관 반짇고리부터 쟁기까지 박물관이 살아 있다!
보암직하고 값나가는 달항아리, 반가사유상 대신 맷돌, 반짇고리 같은 민속품의 가치를 일찌감치 깨달은 고 김원대 계몽사 대표. 그가 전국을 돌며 모은 수집품은 후세로 하여금 옛것의 빛을 발견하게 한다. 삶과 밀착된 민속품의 가치를 자녀에게 일러주고 싶다면 온양민속박물관으로 향하라.

온양민속박물관 야외 전시실에 그대로 옮겨 온 강원도 너와집.

“안방 아랫목에는 부엌 위쪽으로 다락을 내어 살림에 귀중한 물건을 두고 아무나 손대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안방에서 주부가 아랫목을 차지한다는 것은 모든 살림을 통괄할 수 있는 능력의 주부권을 상징한다.” “부엌은 아낙네들의 공간이다. 이곳에 조왕님을 모셔놓고 몸가짐을 조심했다. 아침마다 가정의 안녕을 비는 신성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짧은 글 속에서도 옛 어른들의 철학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 소소한 ‘일상의 철학’은 고분군에서 발굴한 금관이나 반가사유상이 이야기해줄 수 없는 것들이다. 돌절구나 맷돌처럼 일상의 물건만이 말할 수 있는 생활상, 문화, 의식 구조인 것이다.

삽시간에 오래된 집이, 오래된 마을 하나가 통째로 허물어지던 1970년대. 옛것에서 빛을 보고 이 빛을 살리려고 조용히 앞장선 이가 있다. 아동 서적 전문 출판사 계몽사 대표 고 故 김원대 선생이다. “조상의 손때 묻은 민속품에는 그들의 지혜와 얼이 담겨 있다. 그것은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다”라며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던 민속품을 모으고 또 모았다. 박물관에 전시해 후세가 옛것의 빛을 보고, 그 빛을 아래로 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렇게 해서 1978년 온양민속박물관이 설립되었다.
서민들의 의식주, 문화・예술사 전반을 아우르는 2만여 점의 소장 유물이야말로 온양민속박물관의 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피어난 꽃은 아니다. 김원대 선생이 5년간 민속품을 모으며 고심한 끝에 박물관 설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또 추진위원회가 3년여간 전국을 돌며 방방곡곡의 유물을 수집해 이뤄진 결실이다. 지금은 그의 딸 김은경 관장이 아버지의 귀한 뜻을 이어가고 있다. 1975년 추진위원회 결성 당시 유물 수집 전문가로 참여했던 신탁근 고문이 지금까지 온양민속박물관을 한결같이 지키고 있는 또 한 축이다.
온양민속박물관에 모인 민속품은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상감무늬 호리병, 금으로 세공한 잔처럼 번쩍이지 않는다. 그 시절에도 귀하게 숭상하던 물건이 아닌, 일상에서 닳도록 쓰던, 삶과 밀착된 생활품이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면면이 흥미롭다. 만들고 사용한 이의 생활상을 반추해볼 수 있어 즐겁고, 무엇보다 일상을 살아내는 해학과 위트가 묻어나 즐겁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궁금할 정도로 일상의 갖가지 생필품이 모여 있어 재미있다.
전시장이 잠시 조용한 틈. 어머니의 젖내, 아버지의 투박한 손길, 오라버니의 잰 발걸음, 언니의 까다로운 입맛…. 이들을 추억한다. 국보급 유물을 볼 땐 몰랐던 ‘우리의 삶’이 보인다. ‘아, 그 삶의 흔적이 여기 남아 있었군요!’ 손쉽게 뭔가를 처리하는 기계도 없고, 인터넷 같은 가상 현실도 존재하지 않던 그 삶. 손으로 일구고, 땀 흘려 거두고, 그 정직한 결실에 자족하던 그 시절의 삶. 안심이다, 그 흔적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 안심이다.

1 30년 넘게 유물을 모으고 돌봐온 온양민속박물관 신탁근 고문(왼쪽)과 아버지 김원대 선생의 뒤를 이은 김은경 관장. 


2 색색의 이불과 베개를 곱게 접어 넣어둔 자개장.

달항아리 마다하고 서민의 일상품을
“아이들에게 책 팔아서 돈 벌었으니, 그 돈을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다.” 김원대 선생이 박물관을 세우게 된 계기다. 생전에 수집을 즐겨하지 않았지만, 어린이 교육에 책만큼 중요한 것이 살아 숨 쉬는 유물이라는 판단에서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당시 세력가들 사이에서는 도자기나 서화 수집이 유행이었지만 그는 민속품 수집을 고집했다. 누가 돌보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며 말이다. 그 당시 액수로 10억 원을 들여 짓기로 했다가 계획이 커져 20억 원을 투자하게 되었다. 사립 박물관이지만 설립자의 호 號나 기업명을 따서 박물관 이름을 짓지 않은 점,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에 지은 점도 특기할 일이다. “살다가 죽으면 그뿐인 것을, 무슨 자취를 남긴단 말인가”라며 이름을 남기거나 흉상을 제작하는 것을 못하게 했던 설립자의 뜻에 따른 것이다. 온양을 택한 것은 당시 단골 소풍 지역이 현충사였기 때문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자주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온양민속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귀한 컬렉션
1
아녀자들의 몸단장을 위한 ‘경대’(19세기).
2 진채로 화려하게 만든 ‘사자 받침 와룡 촛대’(18세기).
3 군복 입을 때 쓰던 붉은색의 ‘빛갓’(18세기).
4 밤길 갈 때 발밑을 비추는 휴대용 등인 ‘조족등’(20세기). 가늘게 쪼갠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바른 뒤 옻칠을 했다.
5 대나무 붓집 30개를 이어 만든 ‘장생 그림 필통’(19세기).>
6 좌우 대칭의 무늬가 아름다운 ‘먹감나무 장’(19세기). 음양의 조화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겼다.


계몽사 대표가 민속품을 대대적으로 수집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의 골동품상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각종 세간, 규방 유물 사이에는 보얀 달항아리도 끼어 있었다. 민속품이 제대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던 당시에도 달항아리는 귀했다. 김원대 선생은 골동품상이 내보인 달항아리를 두고는 고심했다. 며칠 곁에 놓고 보다가 이렇게 결론지었다. “볼수록 참 아름다운 물건이지만, 달항아리를 모으지는 않겠다. 값나가는 것에 욕심이 생기고 자꾸 모으기 시작하면 우리 민속품에 소홀하게 된다.” 그는 화려한 왕가의 가마 대신 서민들의 단출한 가마를 구했다. 요즘에 되팔면 몇십 배 수익을 낼 수 있을 상류층의 유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민중의 생활상과 관련된 유물만 모았다. “상류층의 유물과 달리 개똥이의 담뱃대나 순이의 반짇고리는 길이 되물림되기 어려운 물건이죠. 평범한 서민들의 민속품일수록 금방 사라질 것임을 내다보셨던 모양이에요.” 4년 전부터 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원대 선생의 딸 김은경 관장의 설명이다.

배낭 하나 메고 두 발로 찾아낸 보물들
새마을운동으로 농어촌이 개발되고 수몰 지구가 생기자 추진위원회 입장에서는 오히려 유물을 수집하기에 유리해진 셈이 됐다. 김원대 선생은 유물을 수집하러 떠나는 추진위원회 전문가들에게 딱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아무리 못 쓰는 것도 거저란 없습니다. 반드시 직접 가서, 인사드리고, 약소하나마 사례금 드리고 받아 오십시오.” 

1975년 유물 수집 전문가로 참여해 지금까지 온양민속박물관을 지키고 있는 신탁근 고문은 그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우여곡절이 많았단다. 변변한 자가용도 없던 그 시절, 유물 수집 전문가들이 배낭 하나 메고 두 발로 전국 외딴 마을을 찾아다닐 때의 일이다. 쟁기가 사라지고 트랙터와 경운기가 들어오던 무렵이었으니 사라지는 전통 농기구를 특히 신경 써서 모았다. 봉화 어딘가에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특별한 쟁기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곧장 달려갔다. 그 쟁기의 주인인 할아버지께 고개 숙이고 부탁드렸다. “대체 이걸 어데다 쓴다꼬?” 한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쟁기를 내주지 않으려 했다. 그는 할아버지와 하룻밤 함께 자며 설득했다. 잘 보관해서 훗날 ‘쟁기’라는 말도 생소해질 때 아이들에게 이걸 보이겠노라고 약조했다. “새 쟁기 살 돈을 드리고 이 특별한 쟁기를 분해해서 둘둘 말아 어깨에 메고 기쁜 마음으로 버스를 탔지요. 그랬는데 간첩으로 오인받아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받았습니다. 하기는 젊은이가 남루한 옷 입고 수염은 덥수룩해서는 뭔가를 지고 가니까 누가 봐도 오해할 만했죠.”


1 붉은 벽돌로 마감한 고풍스러운 온양민속박물관의 내부 전경.


2 유물을 생활 공간에 전시해 조선시대 서민들의 삶을 재현했다.
3, 4, 5 이곳에 전시된 농업・사냥・채집・길쌈 도구는 이제 일상에서 거의 사라져 찾아보기 어려운 유물이다.


부모와 자녀의 대화가 시작되는 공간
온양민속박물관을 꼼꼼히 둘러보면 조선시대 후기 무렵의 생활이 마치 직접 겪어본 듯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3D 영상이나 재현해놓은 유물이 많은 다른 박물관과 달리, 이곳에서는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유물 속에 푹 젖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통과의례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한평생을 재현한 1전시실, 농업・사냥・채집・길쌈 등 조상의 삶의 터전을 옮겨 온 2전시실, 그 밖에 민중의 삶에 꽃핀 문화와 예술을 느껴볼 수 있는 3전시실에는 옛 정취가 가득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돌절구와 맷돌 앞에 서서 울고 있었다. 사연을 물으니 시집살이에 이가 갈릴 때마다 맷돌을 갈고, 울화통이 치밀 때마다 눈 붉히며 절구통에 마늘 빻았던 옛 생각이 나더란다. 오랜만에 그 시절이 떠올라 울음을 터뜨렸으리라. 이처럼 이곳은 부모 세대에게는 삶을 되돌아보는 추억의 공간이며 아이들에게는 조상의 체취를 느끼고 슬기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부모들이 어릴 적 쓰던 물건이니, 자녀의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해줄 수 있는 곳이다. 3대가 함께 오면 관람하는 동안 대화가 끊일 줄을 모른다.
10년 동안 병상에서 지내던 김원대 선생이 임종 직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바로 온양민속박물관이다. “어째서 평생 몸담은 출판사보다 이 박물관에 애착이 그리 크셨을까. 그 당시에는 잘 몰랐어요. 제가 몇 년간 박물관 일을 하다 보니 그 뜻을 좀 알겠어요. 박물관은 철저히 비영리 사업이에요. 후세를 위한 사명감 하나로 돌보는 공간이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영리 사업이었던 출판사보다도 박물관이 더 눈에 밟히셨고, 오래 존속하기를 바라셨던 모양이에요.” 김은경 관장은 요즘 좀 더 젊고 생동감 있는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 바쁘다. 아녀자의 속삭임이 들릴 것 같은 반짇고리, 떠꺼머리 총각의 땀내가 느껴지는 쟁기…. 이 모든 생생한 민속품을, 아버지가 후대를 위해 예비해둔 이 ‘위대한 유산’을 아이들에게 좀 더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문의 온양민속박물관(041-542-6001)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