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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 태평염전 소금 장인 장만석 씨의 달디단 소금, 천일염 송홧가루 날리는 오뉴월 미풍이 빚어낸 맛
햇살은 따가워도 바람은 살갑다. 치맛자락을 살랑일 정도라야 제대로 된 소금이 만들어지는 법이라며 소금 장인은 신이 올랐다. 소금 맛이 가장 달다는 오뉴월 염전에 송홧가루가 날아와 앉는다. 지평선까지 맞닿은 넓은 갯벌에 노란 소금꽃이 한창이다.

밀물과 썰물이 들고 나는 이치를 이용해 소금을 만드는 갯벌 염전. 세계 5대 갯벌에 든다는 서해안 염전에서 만들어지는 천일염은 미네랄 함량이 특히 많기로 유명하다.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살라 한다. 아등바등 쫓기며 살지 말고 천천히, 음미하는 삶을 살아보라 한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바삐 돌아가고 몸은 하릴없이 허둥댄다. 짱짱하던 꽃기운을 미처 느껴볼 새도 없이 봄이 벌써 간다며 아쉽다 탄식한다. 도시에서의 삶이란 언제나 그런 법이다. 하지만 다섯 시간 남짓 걸려 닿은 전남 신안군 증도에는 딴 세상이 펼쳐져 있다. 시간이 멈춘 듯, 풍경은 호젓하고 귓전은 평화롭다. 발걸음이 절로 느려지고 깊은 숨이 쉬어진다. 넓은 갯벌 염전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없다. 오전 내내 물 대느라 바빴던 염부들이 점심을 먹고 짧은 낮잠 한숨 붙이는 시간이란다. 주인 없는 소금밭 구석구석을, 모처럼 한가롭게 걸어본다. 두 개의 섬이 맞닿도록 염전을 꾸려 육지처럼 보인다는 태평염전. 보기엔 한눈에 들어와도 걸어보니 만만치 않다. 국내 최대 규모라기에 상상이 쉽지 않더니 걸어보고야 실감이 된다.
해와 싸우고 바람과 손을 잡고 물을 달래가며 지루한 기다림을 견뎌낸다 육지와 50km 이상 떨어진 청정 해역인 데다 섬 전체가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는 증도에 자리한 태평염전은 1953년 염전을 일군 이후 지금까지 질 좋은 서해안 갯벌 천일염을 전통 방식 그대로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커서 바닷물이 많이 들고 난다는 사리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저수지에 저장하는 것으로 소금 농사는 시작된다. 사리 때 물을 채워 밀물의 수위가 가장 낮아지는 조금까지 쓰는 것이다. 음력으로 매달 보름과 그믐을 사리라고 하는데 염분과 미네랄 농도가 양수와 흡사한 물이 들고 난다. 조금은 음력으로 매달 8일과 23일. 그러니 저수지 물은 보름마다 한 번씩 채워지는 셈이다.

1 40년 경력의 관록이 묻어나는 소금 장인 장만석 씨의 얼굴. 모자와 안경으로 가려져 있던 이마와 노상 햇볕에 노출되는 턱의 흑과 백 대비가 생경스럽다.
2 바닷바람과 짠 소금기에 절어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장만석 장인의 소금 창고.


저수지에서 내려보낸 바닷물은 증발지에서 오랜 시간 머문다. 염전 전체 면적의 80%를 차지하는 증발지는 여러 단계로 구획이 나뉜다. 약간의 경사를 두고 물을 ‘꺾어서’ 대기 때문이다. 3~8도로 염분 농도가 가장 낮은 해수부터 시작해 물의 증발량에 따라 차츰 농도가 진해지도록 구획을 정리해서 바닷물을 가둔다. 논두렁처럼 염전에도 길이 있다. 흙이 아닌 물로 채워진 수로인데 가둬놓은 물꼬를 터주면 이 수로를 타고 물이 흘러 내려간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염전의 소금물을 모두 ‘해주’라는 함수 창고에 가뒀다가 날이 좋아지면 다시 수로를 통해 물을 댄다. 해주는 소금물 농도에 따라 여섯 단계로 구분해서 갖춰놓은 것이 특징이다. 농도가 진해진 바닷물은 결정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소금으로 만들어진다. 하루에 한 단계씩 밑으로 내려보내는데 맨 마지막 단계에서 하얗게 영글면 소금을 채취한다. 오전 6시에 마지막 결정지에 내려보낸 소금이 바람을 잘 만나 영글면 오후 4시부터 긁어낸다. 그 아홉 시간 안에 만들어진 당일 소금이야말로 최고의 맛을 내는데 햇볕과 바람이 모두 도와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염전의 하루는 꼭두새벽에 시작된다. 별이 총총한 새벽 3시에 염전에 나가 결정지 바닥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전날 소금을 내고 나면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전날 밤에 미리 맑은 물을 대놓은 염전 바닥을 ‘대파’라는 도구로 닦아내고 새로 바닷물을 채운다. 오전 참을 먹고 다시 두어 시간 증발지의 물꼬를 트고 막는 일을 부지런히 하고 난 후 점심을 먹고 낮잠 한 번 자고 나면 다시 오후 참을 먹고 본격적인 소금 채취에 들어가는 작업을 반복한다.

함초 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반죽한 함초 칼국수. 구수한 녹두 국물에 끓여내는 맛이 별미다. 
4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작업과 휴식이 반복되는 염전 일은 뜻밖에도 작업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하지만 새벽이나 한밤중에도 작업이 이루어지므로 게으름 피워서는 하기 힘든 일이다. 
5 태평염전이 조성될 때 만든 석조 소금 창고. 지금은 개조해서 소금박물관으로 사용한다.


염전 한쪽, 무채색 일색인 풍경 속에 난데없는 핑크 빛 집 한 채가 눈에 띈다. 태평염전에서 알아 주는 소금 장인이라는 장만석 씨가 사는 집이다. 소금쟁이들의 집은 소금밭 바로 옆, 소금 창고와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단다. 비가 오면 곧바로 뛰쳐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뻘에서는 소화가 빨리 되는 법이거든. 옛말에 염전서는 걸어만 다녀도 배고프다고 안합디여?” 잠시 쉬는 틈을 타 장만석 씨의 핑크 하우스로 들어가니 새참 준비를 하던 그의 부인 박영순 씨가 한마디 건넨다. 열다섯 명이 넘는 염부들의 다섯 끼니를 매일 장만해야 하는 통에 살림에는 도가 텄다는 박영순 씨가 썩썩 밀가루 반죽을 밀어 함초 칼국수를 만들어 내왔다. 함초 가루를 넣어 반죽한 국수를 썰어 내는데 녹두를 삶아 앙금을 내린 물에 끓여 구수하면서도 걸쭉하다.
전라도식으로 진하게 담근 김치를 척 얹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염전에 자생하는 함초는 미네랄이 풍부해 건강식품으로 손꼽히는 식물. 가을에 거둬들여 갈무리해두고 일 년 내내 쓴다는데 잘 말려 가루를 내어 섞어 쓰거나 푹 삶아 거른 물을 음식 만들 때마다 넣는다. 직접 담가 몇 년씩 묵혔다가 쓰는 함초 식초로 버무린 오징어회도 입에 착착 감긴다.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한집에 거느리고 사는 복 많은 할머니가 차려낸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깔스럽다.
넓디넓은 염전의 소금 농사는 장만석 씨 같은 소금 장인들이 책임을 진다. 각기 구획을 나눠 임대한 후 염부들을 수십 명씩 거느리고 작업을 하는 것이다. 매끼 식사는 물론 옷과 신발 같은 생필품, 심지어 아플 때 먹는 약까지 소금 장인들이 부담한단다. 대가족을 거느린 가장과 다름이 없다. 생산된 소금은 회사에서 일괄 수매해 포장하고 가공해 유통시킨다. 낮잠 대신 벌거숭이 어린 손자와 깨 맛 나게 놀아주고 나온 장만석 씨가 오후 작업을 시작한다.

6 결정지에 한창 소금꽃이 피는 중. 바짝 마른 것보다는 이렇게 물속에서 채취하는 속소금이 더 맛있다.

미네랄이 풍부하고 맛이 달아 귀하고 선한 소금, 천일염 오후 3시가 지나면 본격적인 낮 작업이다. 결정지에 쌓인 소금을 삽으로 조심스레 퍼 나르는 것. 바짝 말라 물 한 방울 없는 상태에서 소금을 채취하는 줄만 알았더니 그렇게 만든 소금은 짜기만 하고 맛이 없단다. 작업하는 사람들은 ‘판이 탄다’고 표현하는데 그럴 때는 덧물을 줄 정도. 염전에 적당히 물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긁어내는 ‘속소금’이라야 달고 맛있다. 염전 창고에 그득히 소금을 날라 쌓고 나면 또 한 번 참을 먹고 저녁 작업을 시작한다. 다음 날 작업을 준비하는 것이다. 바닷물을 가두고 소금을 채취하기만 하면 되는 게 염전 작업인 줄 알았더니 과정이 꽤나 복잡하다. 결론은 과학적이고도 효율적이라는 것. 먼 옛날 사람들의 지혜로움이 놀랍다.
천일염은 결정지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떤 방법으로 생산하느냐에 따라 장판염과 토판염으로 나뉜다. 장판을 깔아놓은 상태에서 마지막 증발을 시키고 소금을 얻으면 장판염이고 자연 상태의 갯벌을 그대로 다져 만든 토판에서 소금을 얻으면 토판염이다. 전통 방식이야 당연히 토판염이겠지만 땅을 다지고 관리하는 일이 까다롭고 힘들어 많은 양을 생산하지는 못한다. 요즘 유독 토판염의 인기가 높아졌는데 갯벌의 미네랄 성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금인 까닭이다.

1 해송 숲에서 날아온 송홧가루 섞인 소금은 남 주기 아까울 만큼 귀한데 소금 결정에 특별한 색이 돌지는 않는다. 큰 그릇에 담긴 것은 2005년에 만들어 3년간 간수를 뺀 천일염, 작은 그릇은 같은 해에 만들어 간수를 뺀 토판염이다. 천일염에 비해 거무스름한 색을 띠는데 맛은 확실히 더 달다.
2 그 유명한 서해안 낙조 특유의 아련함이 깃든 태평염전의 저녁 풍경.


양이 적고 공정이 까다로우니 가격도 만만치 않아 일반 천일염의 20배에 가깝다. 사람들은 흔히 ‘귀한 것은 선하다’고 믿는다. 토판염은 귀하고 비싸니 좋고, 가격이 싼 장판염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짓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하지만 천일염은 그 자체로 선한, 귀한 소금이다. 미생물이 풍부한 갯벌에서 얻은 까닭에 미네랄이 풍부하기 때문이다.장판염과 토판염의 귀함은 바닷물에서 염화나트륨만을 분리해 만드는 정제염이나 오랜 세월 건조되는 동안 미네랄 성분이 녹아 없어진 암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창고에 쌓아두는 천일염은 1년 이상 간수를 뺀 후에야 판매하는데 그래야 떫은맛이 빠지고 해로운 광물질이 녹아 나온다. 하지만 소금은 살아 있는 생물체와도 같아 습한 곳에 있으면 습기를 머금는 까닭에 3~4년 충분히 간수를 빼야 맛이 달고 해가 없다. ‘소금은 대발이 으뜸’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온 터라 발이 굵은 소금을 찾았더니 햇살이 강한 7~8월 소금은 발이 굵어도 맛은 오뉴월 중발에 못 미친다며 소금 장인이 ‘허허’ 웃는다. 소금은 됫박에 담아 파는데 발이 굵어야 공간이 많이 생기는 법이라 이문을 많이 남기고 싶은 상인들 계산 속에서 나온 말이라는 설명이다.
“자고로 소금은 말이지. 치맛자락이 살랑거릴 정도로 옆으로 부는 오뉴월 바람에 만든 게 최고거든. 그래야 중발에 달고 보드래한 소금이 만들어지는 거니까. 하필 그때가 섬에 그득한 해송에서 꽃가루가 날아오는 철이야. 송홧가루 앉은 소금이 맛있다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지.” 말로만 듣던 송화염의 달디단 맛의 비밀이 시원하게 풀렸다. 그러고 보니 기가 막힌 시기에 염전을 찾은 셈이다. 거뭇거뭇한 토판에서 한창 증발되고 있는 바닷물을 보니 아하, 노란 송홧가루가 앉아 물무늬가 져 있다. 그 소금이 잘 말라 상쾌한 솔향을 머금고 3~4년을 보내면 최고의 천일염이 되는 것이다. 느리게 걷고 싶어도 매연 가득한 도심이라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느리게 생각하고 싶어도 시끄러운 소음 속이라면 그 또한 어려울 것이다. 송홧가루 흩날리는 계절에
는 갯벌 염전이 제격이다. 신안군 증도면은 2007년 슬로시티 국제연맹으로부터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받은 천혜의 땅. 느릿느릿 한가롭게, 가는 봄의 여운과 오는 여름의 싱그러움을 맛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송홧가루 앉은 소금 한 포대 가져다가 천천히 간수를 빼가며 몇 년 뒤를 기약해보는 것 역시 한 번쯤 누려볼 만한 사치요, 풍류일 테다.문의 061-275-0370

‘건강의 고향을 찾아서’는 한국벤처농업대학 설립자이며 현재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으로 재직 중인 농업경제학자 민승규 박사와 함께 기획·구성한 마음의 고향, 건강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이명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