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 디자이너 오경아 씨.
16년간 방송작가로 활동했던 오경아 씨는 우연찮게 작은 마당이 딸린 집으로 이사를 갔고, 조그만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는 정원에서 ‘지극한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 감동은 생각보다 매우 강력했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영국 유학 길에 올랐으니 말이다. 그는 현재 리틀 칼리지 Writtle College 대학원에서 ‘랜드스케이프 앤드 가든 디자인 Landscape & Garden Design’을 공부하면서 도시 도처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만날 수 있는 영국 생활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영국 사람들에게 정원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삶의 일부죠. BBC에서는
‘첼시 플라워 쇼 Chelsea Flower Show’(5월), ‘햄프턴 코트 플라워 쇼 Hampton Court Flower Show’(7월) 등 세계적인 플라워 쇼가 열리는 봄과 여름, 영국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방문객으로 북적거린다. 최신 정원 디자인 트렌드는 물론 새로운 방법으로 재배한 각양각색의 꽃과 식물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경아 씨는 정원 트렌드의 중심에 있는 영국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세계에서 국민 일인당 가장 넓은 정원을 소유하고 있다는 영국 역시 도시화로 인해 정원 면적이 점차 축소되고 있고,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정원의 개념도 점차 달라지고 있다는 것. 그렇게 등장한 새로운 유행이 바로 ‘키친 가든’이다.
(왼쪽) 오경아 씨의 키친&자갈 가든 도면.
키친 가든은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광범위한 범위에 심어 대지를 장식하기도 한다. 채소와 허브는 키친 가든에 특히 많이 사용되는 식물.
버려진 욕조에 꾸민 키친 가든.
“지금 영국에서는 키친 가든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각 여성 월간지에서 앞다투어 키친 가든에 대한 기사를 다루며 이러한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죠. 키친 가든은 먹을거리로 활용할 수 있는 채소, 허브, 과일나무 등으로 꾸민 정원을 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먹을거리만을 위한 텃밭은 아닙니다. 채소의 색채와 질감을 이용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원이죠.”
키친 가든의 역사는 중세 수도사들을 위한 정원에서 출발한다. 자급자족 생활을 강조했던 베네딕트 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사들은 자신의 주거지에 작은 정원을 일구기 시작했고, 이것을 키친 가든의 시작으로 본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빅토리아 키친 가든’이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성행했고, 정원의 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제1,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정원사들이 목숨을 잃게 되면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키친 가든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산업 발달로 인한 농산물의 대량 공급 역시 키친 가든의 필요성을 줄어들게 만들었다. 영국 사람들의 향수 속에 자리 잡고 있던 키친 가든이 다시 등장한 것은 21세기에 접어 들어 웰빙 문화가 확산되면서부터다.
1 키친 가든은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아이들과 함께 꾸민 키친 가든.
2 슈퍼마켓만큼 쉽게 만날 수 있는 가든 센터. 식물과 가드닝에 필요한 각종 연장을 구비하고 있다.
3 영국의 가든 센터에서 판매하는 식물에는 일반적인 이름과 라틴어 학명이 함께 적혀 있다. 일반인들도 식물학 지식이 대단하다.
4 주말에 키친 가든을 찾아 채소를 구매하는 사람들.
5 한겨울에 즐기는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자작나무 정원.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입니다. 잘 익은 열매나 요리에 쓸 초록 잎을 수확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하지만 식용 식물을 재배하는 것은 그다지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진 못합니다. 집에서 기른 건강한 유기농 채소를 얻을 순 있지만 정원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기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키친 가든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키친 가든 중 하나인 프랑스의 빌랑드리 Villandry 정원은 기하학적인 틀 속에 채소를 심어 그 잎과 열매가 만들어내는 조형성과 고유의 색감으로 지극히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해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풍성한 먹을거리로 가득한 정원, 바로 키친 가든의 매력이지요.”
“사람들이 정원을 만들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정원을 만들 땅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땅이 있어도 엄두가 나지 않아서입니다. 정원을 가꾸고 즐기는 것이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키친 가든에서 그 해답을 얻어보시길 바랍니다.”
오경아 씨는 서울리빙디자인페어의 디자이너스 초이스 전시를 통해 영국 전역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키친 가든의 모습을 재현한다.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키친 가든을 통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생활 속 정원을 제안하기 위해서다. 이와 함께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알파인 식물로 연출한 자갈 가든도 만날 수 있다. 영국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알려진 에식스 주에 사는 정원사 베스 샤토 씨가 처음 소개한 자갈 가든은 전 세계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물 부족 현상을 이겨내는 좋은 대안이 되고 있다.
6 첼시 플라워 쇼에 출품한 어린이를 위한 가든. 영국의 플라워 쇼는 가든 디자인의 트렌드와 새롭게 재배한 꽃과 식물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자리다.
7 ‘로스트 오브 헬리건 Lost of Heligan’ 정원의 키친 가든에서 딸기를 따고 있는 정원사.
8 18세기 영국식 풍경 정원인 ‘스투어헤드 Stourh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