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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리포트 프랑스 노르망디를 느리게 여행하는 법
유난히 빛을 잘 다뤘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사랑했고, 파리지앵들이 애지중지하는 휴양지 노르망디Normandie는 느린 호흡과 더딘 걸음으로 돌아보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오래된 마을에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미만하고, 항구 도시와 해변이 그려내는 풍경은 인상파 화가들을 자극할 만큼 아름답다. 그리고 노르망디의 전형적인 농가는 자연과 더불어 느리게 사는 기쁨을 일깨워준다.


도빌의 이웃 도시 트루빌의 해변. 사람들이 노천카페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해변에는 또 넓고 긴 백사장을 따라 나무로 만든 산책로가 곧게 뻗어 있으며, 가로등에는 포스터 작가 레이몽드 사비낙의 익살맞은 작품들이 많이 걸려 있다.

파리 북서쪽에 있는 노르망디. 많은 사람들에게 노르망디와 관련해 가장 익숙한 역사적 사건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고, 건축물로는 웅장한 중세의 성처럼 보이는 수도원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일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관광객의 이곳을 향한 발걸음은 드문 편인데, 그나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노르망디를 ‘접수’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다. 파리에 머물며 당일치기로 몽생미셸만 스치듯 보고 돌아오기 일쑤다. 파리에서 몽생미셸까지는 차로 세 시간 정도 걸린다. 프랑스 사람들이 노르망디를 여행하는 방법은 완연히 다르다. 그들에게 노르망디는 길을 죄어 진동한동 돌아보는 곳이 아니라 넉넉한 휴양의 땅이기 때문이다.

물과 뭍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노르망디 곳곳에는 시간의 결을 어루만지기에 적합한 작은 도시와 마을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데, 인지도 면에서는 도빌Deauville이 가장 우뚝한 지점에 있다. 섬세한 심리 묘사와 더불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교차 편집을 선보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1969년 영화 <남과 여>의 배경이 되었으며, 매년 3월이면 도빌아시아영화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제일 양명한 도시라고는 하나, 도빌에 항시 거주하는 사람은 6천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캉스 시즌이 되면 그 열 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앞 다퉈 몰려든다. 그중 90%는 파리 사람일 정도로 도빌은 파리지앵의 고급스러운 로컬 휴양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도빌은 물론이고 인접한 도시 트루빌Trouville의 항구에는 순백의 요트들이 빗살처럼 줄지어 빽빽하게 늘어서 있으며, 해안가에는 수많은 별장이 제가끔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도빌과 트루빌을 찾은 파리지앵들은 보드라운 모래사장에서 무위의 일락을, 해변에 들어선 카페에서 담론과 사교를, 창망한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 위에서 권태의 쾌감을, 승마장에서 인마일체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린다. 그들은 노르망디를 느리게 소비한다.


1 도빌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오 폼미에르 드 리바예. 농가 체험과 더불어 프랑스 가정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도로변에 세워진 오 폼미에르 드 리바예의 소박한 간판.
3 농가에는 30헥타르에 이르는 농장이 딸려 있다. 아담한 울타리에 의해 주거 공간과 느슨하게 구분된다.


부지런한 슬로 트래블러 물론 ‘느리게 여행하기’가 단지 해변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거나 단순히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느리게 여행한다는 것은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말안장 위에서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시야를 넓히는 일이고, 거죽만 일별하는 천편일률적인 코스에서 벗어나 풍경의 안쪽을 만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한 ‘슬로 트래블러’가 되어야 한다. 어슷비슷한 사전 정보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고정된 대로에서 방향을 틀어 끊임없이 다른 길을 탐험할 필요도 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한 가지 이미지에 속박되지 않으며 조금만 속살을 파고들면 새로운 그림과 뜻밖의 이야기가 마중 나오기 때문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들 수도 있는 법이다.
노르망디 여행의 메인 테마로 대접받는 화가 클로드 모네와 온전한 휴식에서 시선을 돌려 지역의 살가운 모습을 근접 조우하고 현지인들의 일상을 엿보고 싶다면 농가 체험을 권할 만하다. 특히 도빌 시내에서 차로 40분가량 떨어져 있는 농가, 오 폼미에르 드 리바예Aux Pommiers de Livaye는 오가닉 라이프와 슬로 트래블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리바예(지명)의 사과나무에’라는 뜻을 지닌 문패부터가 제법 탐탐하다.

현재 농가의 안주인은 지긋한 인상의 랑베르 뒤트레Lambert-Dutrait 씨. 그의 부모 때부터 지역 토박이였고, 그들이 나고 자란 곳에서 인생의 전 질량을 바쳐 밭을 일구고 농장을 가꾸며 살아왔다. 50여 마리의 노르망디 소를 키워 고기와 우유를 얻었다. 우유의 일부는 치즈를 만드는 곳에 우선적으로 내다 팔았으며, 나머지는 집에서 버터와 크림, 액체 치즈인 프로마주 블랑, 요구르트 등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가내수공업으로 탄생한 수제 유제품은 인근 마을 시장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1979년 살림살이와 농장 일을 도맡아오던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남편과 함께 가업을 이어나갔다. 그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도 농장에서 생산한 것을 지역 소비자들에게 공급했다. 농산물과 유제품을 농장에서 직접 판매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단골이 꾸준히 증가했고, 주인장의 음식 솜씨를 간파한 손님들로부터 식당을 열어보라는 권유가 잇따랐다. 그 덕분에 머지않아 사람들은 이 호젓한 농장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게 됐다.

프랑스 가정식을 맛보다, 농가 체험 1985년에 이르러 사람들이 묵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사용하지 않던 농가의 일부, 그리고 브랜디 증류소와 우유 보관소 등을 객실로 개조한 것이다. 17세기에 지은 건물은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흙벽으로 외관을 완성한 형태다. 부부는 서두르지 않았다. 방 하나를 만드는 데 꼬박 일 년씩 투자했다. 인테리어는 거창하지 않았다. 나이를 곱게 먹은 가구들과 옛 그림들이 자리를 잡았고, 손때 묻은 생활 용품들이 근사한 오브제로 변신했다. 입구와 계단 처처에는 가족들이 함께 찍거나 따로 찍은 사진들이 걸렸다. 덕분에 모든 방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갖추게 됐으며, 일반 가정집의 푸근함이 감돌았다.

4 농가의 주인장 랑베르 뒤트레 씨. 부모의 뒤를 이어 밭을 일구고 가축을 키우며 살아간다.


5 풀밭에서 유유자적하는 한 무리의 소들. 기특하게도 이곳 농가의 주요 수입원이다.

오 폼미에르 드 리바예에서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즐거움 중 하나는 진짜배기 프랑스 가정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식재료는 이곳 농장에서 바로 가져오며, 부족한 것도 이 지역에서 생산하는 양질의 것만을 고집한다. 여기에 가족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레시피와 타고난 손맛이 보태져 최상의 요리가 탄생한다. 알맞게 구운 빵, 베이컨을 곁들인 송아지 안심 구이, 치즈 모둠, 크렘블레, 딸기 디저트 등을 맛보았는데 재료의 신신함이 살아 있는 담박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중국 명나라 때 홍자성이 지은 <채근담>의 “진하고 기름지고 시고 단 맛은 진정한 참맛이 아니요, 참맛은 오직 담담할 뿐이다”라는 구절이 절로 생각나게 한다. 네 종류의 빵과 케이크, 역시 직접 만든 잼과 주스 등이 어우러진 아침 식단도 사랑스럽기는 매한가지다.


1 가지런히 널린 하얀 빨래. 여느 여염집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2 현관 부근에 놓인 앙증맞은 찻잔 세트. 집 안 곳곳에 이런 오브제가 수도 없이 많다.
3 디저트를 준비 중인 뒤트레 씨 부부.
4 새콤달콤한 딸기 디저트. 입 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별맛은 시드르Cidre다. 노르망디는 토양이 포도 재배에 적합하지 않아 와인 대신 사과를 이용한 술을 많이 생산한다. 사과를 포도처럼 대량 수확한 다음 즙을 내어 사과주로 만든 것이 바로 시드르다. 노르망디 사람들은 물 대신 시드르를 애용할 정도로 이미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오 폼미에르 드 리바예에서는 이 시드르도 직접 제조한다. 소와 경기용 말 등을 기르는 광활한 농장(30헥타르에 달한다) 중 1헥타르의 면적에 사과나무를 재배하는데, 시드르와 요리에 사용하는 사과를 여기서 얻어내는 것이다. 루앙Rouen, 에트르타Etretat, 도빌, 트루빌, 옹플뢰르Honfleur로 이어지는 여정 내내 거의 매일 시드르를 마셨는데, 이곳 농장에서 맛본 시드르가 단연 최고였다. 새금한 맛과 탐스러운 사과 향이 지금도 혀뿌리와 코끝에 걸려 있다.


5 주요리인 베이컨을 곁들인 송아지 안심 구이. 육질은 부드럽고 맛은 담백하다.
6 노르망디의 특산물인 사과주 시드르. 포도 재배가 어려운 지역 환경에 적응한 결과물이다. 노르망디 사람들은 거의 음료수처럼 마신다.


노르망디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지역 관광청의 브리기테 밀러Brigitte Miller 씨가 내내 옆자리를 지켰다. 독일 뮌헨 태생인 그는 젊은 시절 사랑을 좇아 노르망디로 넘어온 이후 아예 이곳에 눌러앉았다. 거주 기간만 36년에 이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노르망디를 제2의 고향으로 삼게 만든 걸까? 그는 노르망디를 두고 ‘역사와 문화, 예술의 땅’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말수는 적지만 진실한 마음을 가진 노르망디 사람들이 무엇보다 좋다”고 덧붙였다. 짧은 시간이라도 농가에 머물다 보면 그의 소회가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다. 3대가 함께 모여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모습, 그리고 먼 길 찾아온 손과 스스럼없이 도타운 정을 나누는 모습에 마음이 더워진다.

싱싱한 식재료의 천국, 재래시장 노르망디에서 농가와 더불어 느린 호흡의 여행을 완성해주는 것은 재래시장이다. 요리 대국 프랑스의 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재래시장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대형 할인점의 위세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는 한국의 재래시장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활발한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산지에서 그날그날 올라온 먹을거리를 상인들의 구수한 입담과 함께 봉투나 바구니에 담아 간다. 각 재래시장도 시설 개선과 차별화된 전략 등으로 소비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지금도 프랑스 전역에서 7천 개 이상의 재래시장이 피고 진다.
노르망디의 가없이 펼쳐진 초원은 특유의 목가적인 풍경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간단하게 훔쳐간다. 도버 해협과 맞닿아 있는 해안 지대에는 작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들이 살포시 자리하고 있다. 재래시장도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듯이 선조 만점의 낙농품과 수산물로 넘쳐난다. 도빌 중심가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물건은 노르망디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치즈나 버터 등의 유제품이다. 특히 카망베르 치즈가 유명하다. 카망베르는 가공하지 않은 연성 치즈로 맛이 강하지 않아 누구나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다. 얇게 썬 사과를 곁들이면 부드럽고 고소한 치즈에 사과의 새콤함이 더해져 더욱 풍미가 살아난다. 짙은 주황색이 감도는 리바로 치즈도 현지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도빌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는 투르빌은 전통적인 어촌으로 지금도 고기잡이가 주요 산업이다. 항구에는 그날 건져 올린 어패류를 판매하는 수산시장이 매일같이 열려 식도락가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옛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였던 루앙에는 모네가 매료됐던 대성당이 있는데,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오면 대성당 앞 광장에 크리스마스 시장이 선다.


7, 8 오 폼미에르 드 리바예의 식당과 거실. 아기자기한 소품과 오래된 가구가 정겹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항구 도시 트루빌의 수산시장. 갓 잡아 올린 해산물과 와인을 함께 판매한다.


2, 3 낙농업이 발달한 노르망디의 시장에서 제일 인기가 높은 품목은 치즈다. 레스토랑에서는 메인 식사 이후 디저트를 먹기 전 치즈 모둠 코스가 따로 있을 정도로 치즈 사랑이 대단하다. 카망베르와 리바로 치즈가 대표적이다.
4 프랑스 재래시장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역시 먹을거리의 신선함과 다양성에 있다. 유럽 최대의 농업 국가답게 제철 야채, 곡물류, 훈제품이 풍성하게 올라온다.


오 폼미에르 드 리바예(33-(0)2-3163-0128, bandb.normandy.free.fr)에는 총 다섯 개의 객실이 있다. 조식이 포함된 2인용 객실 가격은 76~89유로, 3인용은 1백10~1백35유로, 4인용 스위트룸은 1백55유로다. 저녁 식사는 24유로부터. 음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신용카드는 사용할 수 없다. 그 외 노르망디 지역을 포함해 프랑스에서 이용할 수 있는 민박집 및 B&B와 관련한 정보는 전문 사이트(www.gites-de-france.fr)를 참고하면 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