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농부라기보다는 도인처럼 보이는 강대인씨. 천기를 보며 농사를 지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닐 터.
(오른쪽) 벼농사 망쳐먹어가며 재현한 토종 쌀이 그의 재산이다.
남도는 유장하다. 굽이져 흐르는 강이 있고, 완만하나 흐르는 선이 아름다운 산이 있다. 남도에는 이야기가 있다. 매화꽃 흐드러진 경남 하동 최 참판댁에는 매화처럼 꼿꼿했던 여인 최서희의 깊은 한숨이 서려 있고, 차진 뻘, 전남 벌교 포구의 중도 방죽에는 하판석 영감이 등이 휘도록 돌덩이를 져 날라 쌓으며 쏟았을 진한 땀 냄새가 배어 있다.
소설 <토지>의 꽃잎 흐드러진 하동길은 봄에 찾아야 제 맛일 터. 같은 이유로 1948년 늦가을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는 가을이 깊은, 지금 찾음이 마땅하다.
벌교가 속한 보성은 기름지고 차지며 향기로운 땅이다. 곡창 지대인데다 득량만과 여자만 뻘밭, 드넓은 차밭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산이 풍요로우면 살림은 넉넉할지 몰라도 그 도가 지나치면 탈이 나게 마련. ‘여수 가서 돈 자랑 말며, 순천 가서 얼굴 자랑 말고, 벌교 가서 주먹 자랑 하지 말라’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스갯 소리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싶다.
곡창. 헐벗던 시절에는 그보다 더 기꺼운 말이 없었을 테지만, 시절이 바뀌었으니 그 빛이 바랠 법도 하다. 하지만 벌교는 지금도 여전한 곡창이다. 풍요 위의 풍요. 쌀농사 짓는 농부 강대인이 있는 까닭이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려 짓는 쌀 농부 황금 들녘도 유장하다. 이야깃거리가 제법 많은 들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녹녹지 않아 보이는 눈빛, 희게 바랜 수염을 드리운 강대인 씨는 국내 최초로 미곡 부문 유기농 품질 인증을 받은 농부이다. 스물다섯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으며 가업인 농사를 물려받았다.
“하루는 주머니에 제초제를 넣은 채로 자전거를 타고 오신 아버지가 논에 도착하시자마자 피를 토하고 쓰러지셨어요. 주머니 사이로 제초제가 흘렀던 일밖엔 없는데 이유도 모르는 채로 3년을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어요.30년이 넘은 얘기죠.”
제초제가 무서워진 그는 무턱대고 농약 없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일이 손으로 풀을 뽑아가며 농사를 짓다 보니 풀도 풀이려니와 병충해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벼농사 망쳐가며 얻은 경험에 옛 농서를 공부해가며 하나하나 터득한 내용을 접목시키다 보니 땅심을 키우고 벼를 튼튼하게 할 방법이 차근차근 찾아졌다. 천연 녹즙과 숯을 구울 때 나오는 목초액, 흑설탕 등을 섞어 발효시킨 효소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유기농법에 관한 것이라면 전국은 물론 세계를 돌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오리농법을 국내에처음으로 도입했다. 모내기를 한 다음 오리를 풀어 넣으면 오리가 왔다 갔다 하며 논을 뒤집는데, 풀이 자랄 틈을 주지 않는 데다 모의 자생력을 키워주는 효과가 있었다. 우렁이를 풀어 넣는 농법을 쓰기도 했던 강대인 씨는 몇 년 전부터는 쌀겨를 논에 뿌리는 쌀겨농법을 쓰고 있다.벼를 벤 즉시 논을 갈아엎어 볏대의 영양분이 땅속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물을 대고 쌀겨를 뿌리면 겨우내 발효되면서 미생물이 풍부해지고 땅이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살아난다.
한동안 그는 논에 대나무를 꽂아두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모내기가 끝난 논에 30~50m마다 삼각 대형으로 대나무 통을 꽂아두었던 것. 목성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대나무를 꽂아둠으로써 음지의 기운과 양지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호랑이를 그린 고전 민화를 보면 대부분 대나무밭이 배경이라는 것과 옛 서낭당이나 무당집에 대나무가 많다는 것에서 착안했다는데, 미신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정성과 노력이 대단할밖에. 근래에는 대나무 대신 음이온을 내뿜는다는 숯을 모내기한 논의 사방에 묻어두는 방법을 씀으로써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그는 날을 받아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모내기며 김매기, 벼 베기 등을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날을 골라 하는 것. 우리의 옛 농사력도 60갑자에 따랐다고 한다. 사람에게 사주가 있듯이 작물에게도 사주가 있을진대 함부로 날을 잡을 수는 없는 것. 강대인 씨는 자신의 농사법에 ‘생명역동농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구를 둘러싼 달을 비롯해서 내혹성, 외혹성 들의 공전과 자전 등 천체의 흐름에 따라 역동하는 우주의 기가 대지에 흡수되어 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도록 하는 농법이다.
“파종은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 땅의 기운이 승하는 시기에 합니다. 수확은 보름 넘어 그믐이 가까워지는 시기에 하고요. 양파와 마늘도 초순경에 캐낸 것은 저장을 해도 싹이 나고 썩어요. 그믐에 수확한 것은 단단하고 맛있고. 우리 조상들은 손 없는 날을 택해 농사를 지었지요. 고초일枯焦日이라는 게 있어요. ‘그을릴 초焦’자를 쓰는데 이런 날에 씨를 땅에 넣으면 그을려서 죽어버리는 날이라고 해서 피했거든요. 언젠가 스위스에 갔는데 그곳 농장에서는 휴경일을 따로 정해놓고 농사일을 쉬더군요. 지구와 달, 별이 삼각 축에 놓이는 날이라는데 가만히 짚어보니 음력으로 고초일에 해당하는 겁니다. 아하. 더 배울 게 뭐 있나 싶어서 전통 농법서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조선시대 홍반선의 농법서인 <산림경제>에 다 나와 있는 내용입디다.”
(왼쪽) 겉은 까맣고 속은 푸른 쌀인 녹미. <동의보감>에 소갈증을 다스리는 데 효과가 있다고 했는지라 지금도 당뇨 환자들이 많이 찾는다.
(오른쪽) 발로 구르는 탈곡기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보기 좋을 뿐더러 기계로 한번에 훑어내는 것과 달리 쌀이 다치지 않아 좋다.
오방색이 들어맞는 다섯 가지 건강 쌀 황금 들녘은 아름답다. 사방이 누른 가운데 푸른빛이 도는 강대인씨의 들녘은 더 아름답다. 푸른빛은 그가 찾아내고 재현해낸 재래종 쌀인 ‘녹미’에서 나온다.
<동의보감>에 “겉은 까맣고 속은 푸른 쌀이 있으니 수확은 상강 후에 하는 것으로 다른 음식에 비해 위장을 보호하는 데 좋으며 특히 소갈증에 좋다”고 했던 바로 그 쌀이다.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절기인 상강. 벼란 벼는 모두 베어내고 난 다음에야 느지막이 거둬들이는 쌀이다. 녹미는 우리 고유의 토종 찹쌀인 청량미로 순우리말로는 ‘생동찰’이라고 부른다.설마 푸른 쌀만 있겠나. 붉은 쌀은 없을라고. 농담 삼아 혼잣소리를 하며 논길을 걸으니 웬걸, 논마다 색이 다르다. 붉은 쌀도 있고 검은 쌀도 있다. 흑미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으니 그러려니 하련만 붉은 쌀은 처음이다. 적미 역시 자생하는 쌀을 한 톨 한 톨 어렵게 채집해 여러 번에 걸쳐 증식시키면서 개량해 얻은 귀한 쌀이다. 흑향미라고도 하는 흑미도 국내에서는 강대인 씨가 새롭게 재현해 가장 먼저 재배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사라져버린 토종 종자를 찾기 위해 외딴 섬을 뒤지고 일본과 중국까지의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유는 유기농법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다. 처음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을 때는 밥맛까지 살필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남들과 같은 종자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약은 물론 화학비료도 주지 않으니 벼가 제대로 여물지 않아 밥맛이 형편없었던 것이다. 유기농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 힘들게 농사를 짓고도 일반 쌀과 똑같은 가격에 내다 팔 수밖에 없었지만 그마저도 밥맛이 좋지 않아 외면당하니 종자 개량과 농법 연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만 평 규모의 논농사를 짓는 지금도 한구석에는 갖가지 종자를 줄마다 바꿔가며 심어놓고 비교하며 관찰한다.
강대인 씨는 쌀과 찹쌀, 녹미, 적미, 흑미 등 다섯 가지 쌀농사를 짓는다. 벼마다 껍질이 다른 까닭에 논 빛깔 역시 누른빛, 푸른빛, 검은빛 등 눈으로 봐도 확연히 다르다. 오색의 벼를 하나씩 까서 입에 넣으면 벼마다 맛과 향도 다르다. 생긴 것이 다르니 성정도 다를 터. 그 비위를 다 맞춘다기보다는 하나하나 교감을 나누는 마음으로 아침마다 논에 나가 벼에게 이야기도 건네고 손뼉도 쳐준다고. 그의 논에서 자라는 벼는 대부분 만생종이라 조생종을 심은 다른 곳보다 수확은 늦지만 고소하고 차진 맛은 그만이다.
1 만생종을 심는 탓에 수확은 언제나 남보다 늦지만 차진 맛은 따라올 쌀이 없다.
2 동에 해당하는 녹미, 서에 해당하는 백미, 남에 해당하는 적미, 북에 해당하는 흑미, 중앙에 해당하는 현미. 오방색에 딱 들어맞는 오색 쌀이다.
3 산과 밭에서 거두어 온 푸새에 세월의 맛을 입혀 차린 장아찌와 김치, 구수한 장에 살 오른 참꼬막이 곁들여진 초호화판 들밥이다
투박하나 걸진 맛이 있는 농부의 밥상 흥이 섞인 어깻짓과 함께 탈곡기를 돌리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자니 사방에서 날아드는 낱알에 얼굴은 따갑지만 똘똘하게 잘 여문 게 한 톨 한 톨 대견하다. 예전에는 볏짚도 겨울 한 철, 큰 재산이 되었다. 소여물로 썼기 때문이다. 여물 대신 사료가 흔해진 요즘은 가져가는 사람이 드물다. 지금은 벼를 다 수확한 후에 논바닥에 깔아서 쌀겨농법에 이용한다. 구경도 시들해진다 싶을 무렵, 때 맞춰 풍성한 들밥이 논 복판에 차려졌다. 밥상 한번 걸지다. 벌교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벌교 참꼬막 유명한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 터. 찬 바람 불기 시작하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는 그 벌교 참꼬막을 삶아 바구니째 내왔다. 양념장을 칠 것도 없이 짭짜름 하고 쫄깃한 맛 그대로 까먹는 맛이 그만이다. 제철 만나 물오른 병어조림 맛도 달디달다. 깨가 서 말 들었다는 전어를 길게 채 썰고 직접 담근 매실식초 넣어 무친 전어무침까지…. 아무래도 외지 손님 대접한다고 안주인이 새벽부터 벌교 포구를 다녀온 모양이다. 고구마순 볶음은 들깨를 갈아 넣어 구수한 맛이 그만이고, 콩나물 무침에도 들기름을 듬뿍 쳐 감칠맛이 절로 난다. 곰취장아찌와 깻잎장아찌에는 직접 담근 간장을 썼을 테고, 3년을 숙성시켰다는 매실절임 역시 세월의 곰삭은 맛이 배어 아삭아삭 씹힌다. 잘 삭은 멸치젓에 매콤한 고추를 듬뿍 썰어 넣고 무친 것을 고소한 배추속대에 얹어 밥을 싸 먹는 맛도 각별하다. 시골 김치는 쌉싸래해야 제 맛. 들에서 캤다는 고들빼기로 담근 김치는 쓴물을 제법 우렸을 텐데도 아직도 시퍼렇게 떫고 쓴 맛이 살아 있어 알싸하게 입맛을 돋운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 오랜만에 시골길을 걷다 보니 이게 웬걸, 오디가 한창이더란다. 반가운 마음에 연신 따서 입에 넣고 있는데 저쪽 어디에선가 할머니가 달려오며 뭐라고 외치시더란다. 길은 멀고 소리는 안 들려 답답해하면서도 연신 오디를 따서 입으로 넣고 있었는데 한참 만에야 할머니의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더란다. “먹지 마~ 어제 약 쳤어~” 입맛 떨어지는 얘기. 하지만 강대인 농부가 건사하는 논이며 밭 주위라면 그럴 염려는 없을 것이다.
벌교 농부 강대인도 유명하지만 그의 아내 전양순 씨의 음식 솜씨도 소문난 벌교 명물로 통한다. 남편에게 농사일을 배우러 전국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차려낸 밥상의 야무진 손맛이 입소문을 탄 까닭이다. 직접 기른 콩으로 쑨 메주로 담가 간장을 가르고 얻은 된장을 3년이나 묵혔다는 얘기며, 밀과 찹쌀을 섞어 담근다는 고추장 맛까지 보고 나니 장독대 구경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된장과 간장, 고추장 등이 익어가는 장독대 .
2 3년 이상 숙성시킨 된장과 매실절임. 이곳에서 만드는 장과 효소, 밑반찬은 기본 3년은 숙성되어야 상에 오를 자격이 주어진다.
3 ‘버릴 것 없는 살림’에 도가 튼 아내 전양순씨. 손끝이 야물고 알뜰하지만 손님을 대하는 마음은 푸근하고 넓다.
몸과 마음을 씻어주는 천연 효소 음료 어른 허리만큼 오는 대독이 즐비한 장독대는 먼지 한 점 없이 윤이 반짝반짝 나는 게 안주인의 행주질깨나 받은 모양. 간장과 된장, 고추장이 독마다 그득하다. 그것도 모자라 서늘하게 지어 마련한 숙성실에도 1백 개가 넘는 대독이 들어차 있다. 매실에 황설탕과 올리고당을 넣어 발효시킨 다음 그 즙만 받아내어 6년 이상 장기 숙성시켜 만든다는 매실액이 먼저 눈에 띈다. 케일에 당근, 꽃사과, 무화과, 민들레, 냉이, 미나리, 쑥 등 철따라 달라지는 산야초와 과일을 넣고 같은 방법으로 숙성시켜 만든다는 백초액의 향기도 어지간하다. 5월에 일일이 손으로 따낸 적송순을 숙성시킨 솔액과 논 옆 갯가에 자생하는 함초를 숙성시킨 함초액, 비릿한 맛이 난다는 어성초로 만든 어성초액 등 없는 게 없다.
처녀 시절 자연요법을 공부하며 일본에서 유행하던 효소 만들기 방법을 배웠던 전양순 씨는 우연히 발견한 시아버지의 일기장에서 같은 내용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시아버지는 1백 가지가 넘는 재료를 달여서 즙을 내고 숙성시킨 효소를 만들어 농사에 사용했던 것이다. 팔고 남은 재료, 먹고 남은 재료로 무조건 효소를 만들기 시작한 지가 올해로 23년째. 이렇게 만든 효소는 사람도 먹고 벼도 먹는다. 원액을 희석해서 농약 대신 논과 밭에 뿌리고, 효소를 만들고 난 찌꺼기는 천연 퇴비로 만들어 쓴다. 잘 숙성된 효소는 물과 4:1로 희석해 음료수로도 마시고 조미료나 설탕 대신 음식에 넣어 맛을 낸다.
‘버릴 게 하나도 없는’살림을 하는 재미에 부지런히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한 병 두 병 선물하다 보니 그 맛과 효능을 못 잊어 차츰 주문을 해오는 사람이 늘었다. 입소문이 얼마나 무서운지 유기농 매장들이 너나없이 주문하는 통에 별 수 없이 1996년 식품 판매 허가를 내어 만든 것이 ‘우리원 식품’이다. 지금은 남편이 생산한 쌀과 자신이 만든 각종 효소 등을 판매한다. 전양순 씨 혼자 그 살림을 떠맡았다. 대신 남편은 농사짓고 유기농법 교육하는 데 온 시간을 할애한다. 최근에는 제법 큰 규모의 교육장도 완공했다. 강대인 씨가 욕심을 내어 장만한 살림살이가 또 하나 있다. 어렵고 힘들게 재배한 쌀맛을 더욱 좋게 하기 위해 마련한 도정 시설이 바로 그것. 일반 쌀과 같은 도정기를 쓸 수는 없다는 완벽주의에 가까운 고집이 만들어낸 결과다. ‘방아를 잘 찧어야 맛있는’ 쌀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우주의 기운은 물론 사람의 기운까지 받고 자란다고 믿으며 벼를 대하는 남편의 마음이나, 그 소출의 한 토막도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갈무리해 수많은 사람의 밥상을 건강하게 가꾸는 아내의 마음이나 지극하기는 매한가지. 그래서 남편은 ‘생명의 쌀’이라는 이름을 구태여 지었고 또한 아내는‘우리원’이라는 이름을 애써 생각해냈을 것이다. 아름다운 부창부수夫唱婦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