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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선이 전문기자와 주완중 사진기자의 슬로 시티 리포트 천천히 살기 위해 더 부지런하다
일명 슬로 시티, ‘느리게 사는 도시’로 불리는 ‘치타슬로’ 운동은 1999년 이탈리아에서 출범, 현재 11개 국가의 1백여 도시가 가입되어 있다. 과연 그곳 사람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조선일보 박선이 전문기자와 주완중 사진가의 마음과 눈에 담긴 슬로시티 풍경, 그들 삶의 속도를 <행복>에 전해왔다. 지금부터 ‘부지런한’ 슬로 시티 라이프가 시작된다.


오르비에토의 옛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 라바디아. 무너져내린 천장과 벽을 그대로 둔 건물은 그 자체로 뛰어난 역사 유물이자 생활의 현장이다. 산 꼭대기 스카이 라인이 펼쳐진 곳에서 결혼식 피로연이 열렸다.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가 바로 이런 곳에서 태어났을까. 독일의 ‘느린 도시(Cittaslow)’ 헤르스브루크에서 만난 숲 속 물방앗간 호텔 카인스바허 뮐레는 시간을 잊은 곳처럼 보인다. 버스 한 대가 겨우 들어가는 좁은 찻길 안쪽으로 나무 지붕을 얹은 옛 농가가 수줍은 듯 찾아오는 이를 반긴다. 1312년 지어진 농가를 부분적으로 개축해서 사용하고 있는 이 호텔은 느린 마을, 느린 삶의 실체를 보여준다. 정원 옆 자그마한 개울에는 1백 년도 더 되었다는 물방아가 힘차게 돌아가고, 옛 가객이 노래 했던 시냇가 작은 꽃들이 찬연하게 피어 있다.
빛의 속도로 정보를 나누는 세상에서 느린 것은 어떤 미덕을 갖는가. 밤낮 없이 전깃불을 비춰 속성으로 키워내는 닭고기와 달걀, 제트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온 쇠고기로 밥상을 채우는 시대에, 수년을 묵히고 익혀서 빚어내는 포도주 한 방울, 햄 한 덩이에 농축된 시간은 어떤 무게를 지니는가. 스스로 느리게 살기를 선택한
이들을 만나러, 그들이 사는 도시를 찾아가며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물음표들이었다. 혹시나 그것은 늙고 가난해진 유럽이, 허둥대며 급성장해온 새로운 아시아에 맞서 내놓은 심술궂은 카드 아닐까, 의심도 한 자락 깔려 있었다.


(왼쪽) 독일 헤르스브루크 농가 호텔의 주인 로즈마리 헤어초크 씨가 퇴비로 키운 장미는 유난히 탐스럽고 향이 짙다. 
(오른쪽) 영국의 아일샴은 ‘느린 음식’을 첫째 자산으로 꼽는다. 이곳 고등학교 급식 주방은 아침마다 머핀을 직접 굽는다.

유럽의 느린 도시들이 선택한 느리게 살기는 옛날로 돌아가자는 복고 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급진이었다. 느리게 살기가 주목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의 문제였고 정치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대형 할인 마트와 세계적 패스트푸드 브랜드를 거부한 느린 도시 사람들은 출처도 알 수 없는 ‘공산품’ 고기 대신, 인근 50km 이내에서 키운 건강한 소와 돼지, 닭 등을 식탁에 올린다. 쇼핑 카트에 냉동식품을 가득 쟁여 담아 냉장고가 터져나가게 하는 대신, 동네 푸줏간과 야채가게에서 주인 아저씨와 눈 마주치며 그날그날 필요한 야채와 고기 등을 시장 보며 산다. 자동차 트렁크를 가득 채울 필요가 없으니 바구니 달린 자전거만으로도 충분하다. 주먹만한 돌을 깐 좁은 골목과 광장에는 자동차가 들어가지 않는다. 차가 안다니니 어린아이들은 걱정 없이 뛰놀고 노인들의 발걸음도 편안하다. 느린 도시의 원칙을 실천하는 데 적극 앞장선 것은 다름아닌 여자들이었다. 아이를 낳아 키우고 살림을 하면서 ‘빠르고 큰’ 삶의 위험을 가장 먼저 깨달아서다. 느림은 어느 면에서는 불편하지만 풍성함으로 노력에 보답한다. 느리게 살자면 사실 더 바쁘다. 안그래도 많은, 여자들의 일이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영국의 슬로 시티 아일샴이 ‘느리게, 빨리!(Slowly, but quickly!)’를 모토로 삼은 것처럼.


북해에 면한 독일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의 갯벌 국립공원에서 양 떼 사이에서 자전거 여행객들을 만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갯벌 국립공원인 이곳은 유네스코 자연유산 지정을 기다리고 있다.

느리게 살기는 바쁘게 살기다 독일 헤르스브루크의 카인스바허 뮐레 호텔은 모녀의 땀방울로 가꾼 낙원이다. 여주인 로즈마리 헤어초크 씨는 35년 전 요양을 위해 이 마을로 왔다. 폐가 나빠 숲 속으로 가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진단을 받고 남편, 두 살배기 딸과 동행했다. 대도시에서 살아왔던 이 젊은 주부는 잡목 숲 울창한 시골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건강만 되찾으면 바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제 생각이 틀렸다는 건 금방 알게 되었어요. 손 가는 대로 집과 밭이 변하는 것이 기적 같았어요.” 햇빛을 듬뿍 받고 자란 싱싱한 오이와 가지는 슈퍼마켓 선반에서 일 년 사철 ‘아무 때나’ ‘빨리’ 얻을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느린 것은 느린 것이 아니라, 제대로 시간을 들이는 것이었다. “새벽 3시에 일을 시작하면 밤 11시 넘어서야 침대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요. 도시에서 사 먹던 채소를 제가 직접 키워 먹는다는 건 기적이었죠. 이 정원은 바로 제 인생이에요.”

지금도 그는 호텔 앞에 텃밭과 허브 가든을 비롯해 안 뜰의 장미 정원까지 모두 자기 손으로 가꾼다. 호텔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두엄을 만들어 두고 밭과 정원에 쓴다. 딸의 일상도 엄마와 진배없다. 호텔의 빵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반죽부터 굽기까지 매 단계에서 ‘느림’의 원칙을 지킨다. 하루에 필요한 빵 22덩이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 10kg을 반죽하는 데 25분이 걸린다. 이것을 90분간 숙성시킨 후 30분 동안 구워낸다. 아침 시간에 맞추려면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렇듯 ‘바쁘게 살아온 느린 삶’은 독일에서 적잖은 주목을 받고 있다. 바이에른주가 주최하는 바이에른 퀴진 상을 받은 데 이어 지난해에는 가스트로노미프라이스 프랑켄(프랑켄 미식상)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왼쪽) 산꼭대기 성벽 도시 오르비에토에 가기 위해 산 중턱 주차장에 내린 사람들. 
(오른쪽) 헤르스브루크의 구두 장인은 18살 때부터 작업해온 내공으로 유럽 전역에 단골손님을 확보하고 있다.


느리게 살기는 번거롭다 편하기로 치면 대형 슈퍼마켓에서 일주일치 장을 한꺼번에 봐오는 게 정답이다. 1백 년, 2백 년 된 옛 집을 지키기보다 현대적인 아파트가 훨씬 더 효율적이다. 그러나 느린 도시의 여자들은 그런 삶이 “재미없다”고 말한다. 치타슬로 네트워크 본부가 있는 오르비에토가 대표적이다. 로마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인 이곳은 해발 195m의 바위 산 꼭대기에 세워진 인구 2만 명의 성벽 도시다. 느린 도시를 표방하면서 이들은 도시 한가운데 큰 주차장을 만들 것인가, 마을 장터를 유지할 것인가 결정해야 했다. 결론은 명쾌했다. “우리 살던 대로 살자!” 주차장은 성벽 아래 설치하고 산꼭대기 마을까지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로마와 피렌체를 연결하는 산 아래 기차 역 앞에서 마을까지는 직통 케이블카를 놓았다. 시내 광장 바로 뒤편까지 오가는 공영 버스도 운행 중이다. 매일 오전 오르비에토
대성당 앞 광장에는 장이 선다. 마치 한국 지방 소도시의 5일장처럼, 옷도 팔고 슬리퍼도 팔고 꽃도 팔고 가지와 달걀, 아이스크림도 판다. 유모차를 밀고 와 아기 신발을 사던 젊은 주부 파올라는 “아침에 산책 겸해 한 바퀴 둘러보며 꼭 필요한 것만 산다”고 했다.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는 그는 지금 출산휴가 중으로, 아이가 자랄 때까지는 재택근무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북부의 국제도시 밀라노에서 불과 20km 떨어진 아비아떼 그라소. 밀라노로 통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근교 도시지만, 밀라노와는 전혀 다른 소박하고 느긋한 공기가 가득하다. 시청을 중심으로 한 마을 광장과 주변은 자동차 진입 금지 지역. 시장님도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출근한다. 걷기도 힘들어 보이는 노인들도 보란 듯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광장을 벗어나 주택가로 접어드니 큰길가에 빵집과 채소 가게, 푸줏간이 액세서리 가게, 옷 가게, 그릇 가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빵집은 아침 7시면 문을 열고 빵 사러 나온 주민들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자동차는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기차 역 앞 공용 주차장에 세워두어야 한다. 7백 년 된 옛 공작의 성을 시립 도서관으로 이용하고 중세 성당은 마을 회관 겸 컨벤션 홀로 개수 중이다. 이곳 역시 자전거 보관 시설만 두었을 뿐 자동차를 위한 주차장 시설은 없다. 도서관은 개수 공사 중 3~4백 년 전 벽화가 겹겹으로 발견되는 바람에 아직도 한쪽은 복원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전기 시설도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느라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이용객들은 오히려 자부심을 드러낸다. 열람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여대생 마리아와 안나는 “초현대식 도서관은 어디에나 있지만, 옛 궁전을 이용한 도서관은 이곳밖에 없다”며 “자리가 좁고 공사 기간이 긴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이곳에 온다”고 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포도밭. 마을 뒤쪽으로는 올리브 나무들이 보인다. 이 지역에서 만들어내는 그윽한 포도주와 맑은 올리브유는 자랑이 아깝지 않은 대표적인 느린 음식들이다.

치타슬로 네트워크Cittaslow International 1999년 이탈리아의 브라, 그레베 인 키안티, 오르비에토, 포시타노, 슬로푸드 협회가 참여, 설립했다. 그 뒤 독일, 영국, 노르웨이 등이 참여, 11개 나라 1백여 개 치타슬로, 즉 슬로 시티 네트워크 도시를 두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의 전남 담양, 장흥, 신안, 진도의 4개 지역이 처음으로 치타슬로 네트워크에 가입했다. 인구 5만 이하 자치 도시를 대상으로, 에너지 생산, 건축, 상하수도 등에 엄격한 생태 기준을 적용하고 있고 세계적 규모의 대형 음식점, 쇼핑몰 등을 두지 않도록 하고 있으며 전통 건축.식품.예술.공예품의 생산과 확산을 장려하고 있다. 지난 6월 치타슬로 네트워크 총회에서‘느린 음식 지원 7대 강령’을 채택했다.
1 지역마다 슬로푸드 잔치를 설립한다.
2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맛과 영양에 관해 교육을 한다.
3 학교에 텃밭을 가꾸게 한다.
4 멸종 위기에 있는 식물과 식품 등을 되살릴 프로젝트를 운영한다.
5 슬로푸드 기준에 따른 지역 식품을 사용하여 학교의 집단 급식에도 지역 음식 전통을 유지한다.
6 전형적인 지역 음식을 지원한다. 7 음식 공동체를 통해 ‘어머니 대지’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왼쪽) 3백 년 된 푸줏간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의 팔로니 정육점. 소금과 바람이 만든 느린 음식을 판다. 
(오른쪽) 그레베 인 키안티의 전통 수예점 그라치아 지아키. 그라치아 할머니의 딸 안젤라 씨가 손으로 수놓은 생활용품을 자랑하고 있다.


느리게 살기는 잔치다 아일샴은 영국에서 가장 큰 아침 식탁을 차리는 곳이다. 2005년 봄 아일샴 고등학교와 시가 함께 연 ‘빅 슬로 브렉퍼스트’ 잔치는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 마을 광장에 1천 명이 함께할 수 있는 아침 식탁을 차려 시끌벅적한 잔치를 벌인 것이다. 메뉴는 영국식 브렉퍼스트 그대로. 학생들이 직접 구운 빵과 토마토 그리고 지역에서 생산한 소시지, 달걀로 차렸다. 아이디어는 10학년(한국의 고 1에 해당)학생들과 식품 기술 주임교사 질 윌리스 씨로부터 나왔다. 보잘것없는 것으로 악명 높은 영국 음식을 비꼬아 “영국에서 가장 잘 먹는 방법은 아침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점심도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저녁 역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라고 놀리는 데 착안, 거꾸로 이를 비튼 것이다. “학생들이 직접 요리를 하고 서비스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몰라요. 일 년에 한 번은 너무 아쉽다고 했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빅 슬로 브렉퍼스트는 지난해부터 음식 축제로 발전했다. 열다섯, 열여섯 살 고등학생들이 지역 특산 육류와 채소로 다섯 개 코스 정찬을 차린다. 상상만해도 즐거운, 실제로도 정겨운 풍경이다.

윌리스 교사는 이런 ‘느린 음식’과 잔치가 학생과 주민 모두에게 큰 교육이 된다고 자랑했다. “우리 아이들도 광우병 쇠고기를 정말 두려워했어요. 그러나 두려움에서 그쳐서는 안 되지요. 빅 슬로 브렉퍼스트 잔치를 준비하면서 광우병은 쇠고기를 이윤 추구 상품으로만 여긴 데서 일어난 재앙이라는 것과 안전한 식품, 공정 무역, 건강 요리의 중요성 등 다양한 교육 효과를 얻고 있어요.” 아일샴의 느린 음식 잔치는 학교에서 매일 매일 거듭된다.
학교 급식 빵과 음식은 모두 학교 주방에서 직접 조리할 뿐 아니라, 지역 푸줏간과 농장들과 연계하여 공생의 길을 찾고 있다. 학교, 주민, 학생들이 함께 결정한 것이다. 냉동 피시앤 칩스 따위나 튀겨주는 급식이 아니다. 신선한 야채와 고기로 매일 아침 새로 만드는 점심을 아이들은 이제 ‘빅 슬로 런치’라고 부른다. 잔치는 계속된다. 아일샴은 올해 5월부터 ‘비닐 봉지 없는 도시’를 선언했다. 아일샴 어린이가 그린 그림을 인쇄한 헝겊 가방을 집집마다 나눠주고 이를 모두 사용하도록 했다. “1천1백 명 중에 단 1명만 불평했어요. 다들 가방이 예쁘다고 즐거워해서 우린 또 한 번 잔치 기분을 느꼈죠!” 아일샴 고등학교 7학년(한국의 중 1에 해당) 루시 버클랜드 는 “식품이 어떻게 생산되고 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배우는 식생활 수업이 재미있다”고 했다.

느리게 살기는 옛 솜씨를 살린다 태양도 남다르게 빛난다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봄부터 여름까지의 뜨거운 햇볕은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과 올리브유를 만들어내고, 기름진 땅과 넉넉한 숲은 버섯과 햄, 치즈의 바탕이 된다. 토스카나의 심장부 키안티는 와인으로 이름난 곳. 키안티의 중심은 그레베 인 키안티. 소박하고 활기찬 이 마을은 옛 솜씨를 그대로 살린 푸줏간과 수예점, 칼과 도자기 등으로 더욱 빛이 난다.

시청 광장의 작은 수예점 ‘그라치아 지아키’를 지키는 사람은 올해 일흔 살이 된 그라치아 지아키 할머니와 딸 안젤라다. 옛날, 이곳 여자아이들은 여덟 살만 되면 바늘을 잡았고 스무 살이면 수놓고 옷 짓는 솜씨가 프로급이 되었다. 집 안 살림은 모두 뜨개질, 자수, 바느질로 직접 만들었다. 솜씨 좋게 만든 레이스와 수예품은 르네상스 도시 피렌체의 귀족 집안에서 소화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사라진 소박하고 간결한 손바느질 솜씨가 그라치아 수예점에 그대로 남아 있다. 1890년부터 수예품 만들기를 가업으로 삼은 그라치아 할머니네는 3대째 여자들의 솜씨로 이어지고 있다. 촌스럽지만 다정한 은방울꽃, 기운찬 해바라기와 싱싱한 올리브를 수놓은 커튼과 테이블보 그리고 손으로 짠 레이스는 소박하고 투박하지만, 그래서 아름답다. “레이스 식탁보 하나 짜는 데 열흘쯤 걸립니다. 자수도 재본보다 손이 훨씬 느리죠.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아름답고 힘이 있습니다. 바느질한 사람의 손길과 느낌,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요.” 이곳의 강점은 미학적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안젤라는 그레베 인 키안티가 ‘느린 마을’로 새 출발한 지난 10년 동안 가게 매출은 훨씬 늘었다고 기뻐했다. 수예점 3대 여자들이 고스란히 지켜온 옛 솜씨가 문화 자산으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느린 도시의 수확, 느리게 살기의 보답으로.

(왼쪽) 이탈리아의 느린 도시 아비아테 그라소는 슬로 푸드, 슬로 건축으로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아비아테 그라소의 고르곤졸라 치즈공장에서 2년 동안 저온 창고에서 발효시킨 커다란 치즈 덩어리를 자르고 있다.

느린 도시의 쇼핑 명소, 그곳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곳들
팔로니 정육점 Antica Macellieria Falorni
이탈리아 토스카나, 키안티의 중심인 그레베 인 키안티의 명물. 3백 년이 넘은 팔로니 가족의 푸줏간으로 키안티 지방에서는 농한기인 겨울철에 돼지를 잡아 햄을 만들고 겨우살이 준비를 했는데, 지난 60여 년 동안 거의 사라진 이 전통을 되살린 것이 지금의 주인인 스테파니 팔로니 씨다. 이 집의 간판 상품은 두툼한 돼지 뒷다리 햄(프로슈토)인데, 큰 것은 1개 20kg에 이른다. 소금으로만 간해서 그늘에서 바람에 말린 햄은 겉은 건조해도 속살은 말랑하고 촉촉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맛있다. 문의 +39 055 853029, www.falorni.it
체키니 정육점 Antica Macellieria Cecchini 이탈리아 키안티의 산골 마을 판차노Panzano의 명물인 이곳은 푸주한 다리오 체키니Dario Cecchini 덕분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단테의 <신곡>을 목청 높여 낭송하는 이 타고난 푸주한은 불 같은 성격의 괴짜로, 손님이 고기에 대해 의견을 표하면 바로 쫓아내버린다. 가수 엘튼 존이 이 집 단골로, 간판 상품은 두툼한 피렌체식 T본 스테이크 비스테카 피오렌티나. 아침 9시면 문을 열지만 주인장을 보려면 11시 정도에 가는 게 좋다. 문의 +39 055 852020, www.dariocecchini.blogspot.com
지아키 그라치아 Giachi Grazia 토스카나 시골 할머니들이 손으로 짠 레이스 식탁보와 수놓은 수건, 목욕 가운 등을 파는 곳이다. 손으로 주름을 잡고 바느질한 여자아이용 스목 드레스가 정말 깜찍하다. 주인 할머니의 고향인 그레베 인 키안티에 자그만 가게가 있고 피렌체에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문의 +39 055 8544671(그레베 인 키안티), +39 055 8218073(피렌체)
다닐로 부자의 치즈 농장 Azienda Agricola Basili Danilo 오르비에토 인근 산속에 농장을 경영, 아침에 짠 양젖으로 그날그날 리코타 치즈, 저온 숙성 페코리노 치즈를 만든다. 1천 년 된 농가에서 양 30여 마리를 키우고 치즈를 생산하는 이들 부자의 꿈은 자신들의 이름을 붙인 치즈를 본격 생산하는 것. 지금은 인근 상점과 방문객들에게만 한정 판매한다. 요청이 있을 경우 치즈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갓 만든 리코타 치즈는 정말 신선하고 향긋하다. 문의 +39 329 6977824

박선이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