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틈날 때마다 아담한 마당의 잔디를 고른다. “잡초란 게 따로 없지만, 번식력이 강해서 쉽게 번지는 토끼풀은 어쩔 수 없이 잘라주어요.”
치유의 숲 시인 도종환 씨가 사는 구구산방龜龜山房을 찾는 길은 전래동화 한 구절 같다. ‘1백 년은 족히 된 커다란 정자나무를 지나,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돌아서 산길을 따라 한참 오르면’ 인적 드문 곳에 반반한 터
가 나온다. 한 걸음 깊숙이 꺾어 들어가니 거북이처럼 납작한 황톳집이 있다.
5년 전, 그가 피폐한 심신을 이끌고 병원 대신 찾아온 곳이다. 자유신경실조증이라는 희귀병이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신경도 균형이 깨지면 신경 실조가 발생해 면역 체계가 약해지는 질병이었다. ‘과부하가 걸린 나를 놓아주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교단을 떠나 이곳에 몸을 맡겼다.
그간 몸과 마음을 충만하게, 그리고 허허공공하게 놓아두었다. 이제 먹을 만큼의 채소를 기르고 겨우내 쓸 장작을 패서 쟁여둘 만큼 건강해졌다. 도종환 씨를 잘 모르는 20~30대 사람들도 ‘접시꽃 당신’ 하면 ‘아!’ 하리라. 아내를 향한 절절한 망부가로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된 동명의 시집 외에 <부드러운 직선>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등을 낸 시인이다. 도종환 씨만은 세상사에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시심이 맑게 찰랑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도 여느 현대인처럼 마음을 앓았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다. “쫓기는 삶이었지요. 산방에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막막했습니다.” 외로움이 고요함으로, 적막이 평화로움으로 변화하게 해준 것은 자연이었다. 숲은 그에게 청안淸安한 삶을 가르쳐주었다. 인사법도 “청안하신지요?”라고 바뀌었다. 이웃들도 두루 청안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올해 초 산문집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좋은생각)를 냈다. “지친 그대가 이곳에 오신다면 숲의 나무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나뭇잎을 흔들어 박수를 치며 그대를 받아줄 것입니다.” (서문 중에서)
1 현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구구산방’이란 문패를 걸었다.
1 거북이처럼 납작한 구구산방을 뒤편 언덕에서 내려다보았다. 멀리 산방을 에두른 구인산이 보인다.
2 청주에 사는 어머님이 주신 장류와 지인이 담가준 약초 효소가 든 장독대.
3 도종환 씨가 둥지를 튼 이후 숲 해설가인 지인, 그림 그리는 후배 등이 근처에 들어와 살고 있다.
나누고 순환하는 삶 “키우던 닭이 제일 먼저 저를 깨웠어요. ‘여태 자냐?’하는 듯 현관을 마구 쪼면서 밥 달라고 아우성이었지요. 시끄러워서 일어나 모이를 주면 희미하게 동이 터와요.” 그 닭들은 살쾡이, 족제비, 솔개가 잡아 먹어서 이제 없다. 이렇듯 산방 주위에는 고라니, 다람쥐 같은 낮 손님과 산토끼, 너구리 같은 밤 손님이 갈마든다. 시인의 호흡은 절로 자연과 일치되었다. “다람쥐는 겨울에 먹을 도토리를 땅에 묻는데, 열 군데 묻으면 두 군데쯤은 잊어버린답니다. 도토리가 남은 곳에서 참나무 싹이 터요. 그래서 소나무와 참나무가 함께 자라면 처음 20~30년간은 소나무가 많이 퍼지지만, 그 이상 지나면 참나무가 숲을 든든하게 지킨답니다.” 이 땅에 태어남 자체가 어미가 몸을 나눈 것이고, 나무가 스러져 또 다른 나무를 피우는 과정은 순환이다.
“나무가 제일 보기 좋을 때는 4월 하순에서 5월 초·중순 정도, 절기로는 곡우 전후의 일주일에서 열흘가량입니다. 연둣빛 반들반들한 어린잎이 막 터져 나오고, 침엽수에 윤기가 돌지요.” 먼 숲에서 감상한 초목의 생태를 집 앞에도 살짝 들여놓았다. 시끄럽지 않고 아담한 정원을 틈틈이 가꾸고 있다. 그는 조만간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에서 이렇게 살다간 주택 전기세와 수도요금 감당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도시에서 거북이처럼 지내다가는 굶어 죽지요. 바쁘게 사세요. 그러다 쉴 시간에 목마르면 24시간 중 단 10분이라도 여유를 만끽하세요. 자신에게 좋은 음악, 좋은 시 한 구절 들려주세요. 이 또한 느리게 사는 방법입니다.”
1 서재이자 집필실. ‘꼭 필요하지 않으면 쌓아두지 말고 차라리 멀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인터넷을 쓰지 않다가 최근 개통했다.
2 그림 그리는 후배가 황토로 벽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3 차를 우리며 그는 말한다. “밤에 숙면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에 몸이 천근만근인 것은 자기 전까지 붙들고 있는 일이 많아서입니다. 컴퓨터 좀 일찍 끄고 만사를 툭 놓아버리고 잠자리에 드세요.”
행복이 가득한 집은 어서 돌아가고 싶은 집 도종환 씨는 며칠 서울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집이 어찌나 좋은지 모른다. “집이란 그런 곳 같아요. 돌아가서 쉴 곳,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곳,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곳. 쇼갈 린포체라는 티베트 선사가 ‘살면서 우리는 자주 돌아가야 하며,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하며,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라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곰곰이 따져보니 집이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어요.”
시내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식사를 같이 하자 해도 오로지 집에 가고 싶어서 ‘볼일이 있다’며 머뭇머뭇 돌아선 경험을 책에 쓰기도 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란 몸과 마음이 편안해서 어서 돌아가고 싶은 집입니다. 그저 공간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자꾸 보고 싶은 이가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물론 그의 산방은 겨울에 무지 춥고, 눈이 쌓이면 동네 어귀부터 걸어야 하고, 교통도 불편하다. 그러나 홀로 있어도 심신이 편안하니 별 불편이 의식되지 않는다.
4 소설가 황석영 씨가 글을 적어서 만든 부채.
5 도종환 씨의 시 ‘홍매화’를 적어서 제작한 엽서.
6 , 7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손님에게 건넨 차와 찐옥수수처럼 심심하고 희미하게 단맛이 난다.
8 현관에 오종종히 놓은 신발이 그의 일과를 짐작케 한다.
자연으로 물든 시심 “외롭지 않아요?” “고요해요.” “평온하겠네요?” “조금은 쓸쓸해요.”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25쪽 중에서)
누가 그에게 안부를 물으면 “여여합니다”라고 답한다. 여여함은 이런 모순 화법을 가능케 한다. ‘같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된 ‘여여하다’는 ‘똑같은 현상’을 이르지 않는다. 현상을 훌쩍 뛰어넘은 ‘있는(존재하는) 그대로’를 뜻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선사의 말씀과도 통한다. 도종환 씨는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려 한다. 산이 있으면 산을 보고 물이 있으면 물을 본다. 산벚나무가 제 향기를 떨치며 만개한 날에는 “산벚나무꽃을 가슴에 안아본다”라고 책에 쓴다.
그리고 이렇게 잇는다. “그러나 팔 안에 담기는 향기의 적막한 공간.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의 가운데는 비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꽃과의 거리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중략) 나비처럼 사랑하고 싶습니다. 꽃은 꽃대로 향기롭고 나비는 나비대로 아름다운 사랑. 혼자 있어도 아름답고 함께 있어도 아름다운 사랑, 그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