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듯한 전원주택을 상상했다면 실망했을 뻔했다. 하지만 허름한 컨테이너 박스는 의외로 정겹고 따스하다. 삐걱거리는 바닥도, 자칫 구질구질해 보일 수 있는 버려진 가구들도 안재복 씨의 손을 거치니 제법 그럴싸하다. 부러 손때 묻힌 앤티크 가구 같다. 뿐인가. 마당 한구석을 자유로이 활보하는 잘생긴 개가 네 마리, 백조처럼 우아한 거위가 한 마리, 튼실해 보이는 오리가 세 마리, 게다가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암탉과 장닭들…, 작업실이 아니라 유쾌한 동물 농장 같다. 손님맞이 음식도 직접 키운 오리 알 프라이와 삶은 오리 알. 오리 알이 계란보다 더 구수하다며 사양 말고 어서 먹으라는 주인장의 인심 또한 구수하다. “싱크대랑 냉장고 말고는 다 주워 온 거야. 바닥부터 천장까지 매일매일 조금씩 매만졌더니 지금처럼 되더라고. 남들은 구질구질하다 할지 몰라도 난 여기가 참 좋아. 볼수록 맘에 들어. 구석구석 내 손 안 간 데가 없으니까.” 철판 하나로 여덟 명이 행복해지는 법 아내(패션 디자이너 한혜자 씨가 그의 아내다)와 한 건물에 동고동락하던 그가 청담동 작업실을 접고 양평으로 들어온 게 벌써 4년 전. 허허벌판 척박한 땅에 작업실 짓고, 씨 뿌려 텃밭 가꾸고, 땀 흘려 몸으로 일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내가 노력한 거에 비해선 운이 좋은 편이야. 특히 농사가 그래. 배추가 비싼 해는 배추 농사가 잘되고, 고추가 비싼 해는 고추 농사가 잘되거든. 여기 온 뒤론 거의 90% 이상이 자급자족이야. 봄이면 나물이랑 상추, 오이 같은 것들 따 먹고, 가을이면 내가 심은 배추랑 고추 따서 김치도 담궈 먹고…. 그래서 내가 어딜 잘 못 간다니까. 얘들이 목마르다고 자꾸 날 부르는 거 같아서.” 이젠 농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땅 갈고 씨 뿌리는 게 능숙한 그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농사라곤 지어본 적 없는 천상 도시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데다 홍대 미대를 졸업한 뒤론 작품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었으니까. “60이 내 인생의 고비였던 것 같아. 왜 우리나라 사람들, 예전에는 60만 살면 끝인 줄 알았잖아. 더 살면 덤으로 산다 생각하고…. 책에 보면 비워라, 버려라 그러는데, 굳이 비우려 하지 않고 버리려 하지 않아도 그런 때가 오더라고. 한땐 나도 스스로에게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었어. 바보처럼 강한 척했던 거지. 하지만 요즘은 나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해. 내가 즐거우면 내가 하는 일, 내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즐거워지니까.”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자 그는 자유로워졌다. 생활 또한 더 충실하고 온전해졌다.
(왼쪽) 안재복 씨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 평상 위 부드러운 깔개에 몸을 눕히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노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그 옆에 첼로가 놓여 있는데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을 듣고 감동을 받은 후 3년 전부터 레슨을 시작했다.
1 메모와 스케치를 통해 구체화된 아이디어를 실체화한 철제 의자 모형.
2 철판을 잘라 만든 책꽂이는 작업 도구와 모자 등을 수납하는 데도 유용하다.
3 아프리카 여행 중 사 온 조각 작품.
“아침 6시나 7시면 잠이 깨. 눈뜨면 일어나서 닭이랑 거위랑, 오리랑 개 돌보고 9시쯤 작업실로 건너오지. 매일 똑같아. 오전엔 거의 책 보고, 메모하고, 아이디어 구상하고, 오후부터 노가다 하는 거지. 작업을 하든, 밭에 나가 일을 하든, 딱 정해놓고. 사람이 말야, 몸하고 영혼 두 가지가 합쳐진 거라고 하잖아. 몸은 물질이니 힘든 노가다 시키고, 영혼은 형체가 없으니 자유롭게 뛰놀게 하는 거지, 뭐.” 요즘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건 홍천에 마련해놓은 또 다른 작업실(이곳도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공간이다)을 이곳처럼 번듯하게 꾸미는 일, 그리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일이다. “난 군용軍用을 좋아해. 군용은 합리적이거든. 디자인이 굉장히 잘돼 있어. 아주 편리하지. 결국 디자인이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를 의미하잖아. 요즘은 가로 120cm, 세로 240cm짜리 철판 하나로 여덟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시리즈로 만드는 중이야. 보기엔 단순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치밀하게 계산해야 돼. 매번 구부리고 자를 수 없으니 머릿속으로 쉴 새 없이 구상하고 재단하는 거지. 완성된 작품 보면 기분이 경쾌해져. 앉으면 편안하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기쁨을 누린달까.”
지난해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선보여 관람객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철제 의자 작품들에서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보잘것없는 철판을 구부리고 부풀려 편안하지만 위트 넘치는 의자로 부활시킨 데 그치지 않고, 한 사람보다는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이, 너무 단순해 일견 심심해 보이는 작품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작년에 내 작품이 각광받았던 건 작품이 좋아서라기보다 쉴 곳을 줬기 때문이지, 뭐.” 지나친 겸손이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의 작품은 관람객들이 바쁜 마음, 지친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행사 기간 내내 편안하고 여유로운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리빙디자인어워드의 인기상은 그 작은 보답이었던 셈이다.
1, 2 ‘머리에 수만 번, 종이에 수백 번. 그러나 몸으로 하는 시간은 될 수 있는 한 짧게.’ 안재복식 작업 철학이 낳은 스케치와 모형 작업의 흔적들.
3, 6 초기의 진흙 작품과 최근의 철제 작품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작업실. 자투리 철판 하나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재미난 아이디어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하는 작가의 재치가 놀랍다.
4 안재복 씨가 만든 예수는 유독 팔이 길다. 그 긴 팔로 자신의 부족함을 감싸 안아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5 홍천에 마련해놓은 또 다른 작업실. 바닥은 마루와 타일로 깔고 진흙과 한지로 벽을 바르는 등 이것저것 주워다 작업실 꾸미는 재미가 쏠쏠하다.
7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의 취향 덕에 작업실 곳곳엔 화분이 즐비하다.
8, 9, 10 안재복 씨가 만든 철제 의자는 차갑지만 아늑하다. 앉는 이를 배려하는 마음이 스며 있는 까닭이다.
11 오랫동안 머릿속에 그려온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모형 작업은 그를 진지하면서도 즐겁게 만든다.
12 메모와 손 글씨를 좋아하는 그는 매달 초 손수 달력을 만들곤 한다
삶이 곧 예술이길 꿈꾸다 양평에 내려온 이후 그의 삶은 단조롭지만 풍요로워졌다. 작고 사소한 데서 즐거움을 찾은 덕분이다. “시골 생활하면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 줄 알아? 여름이면 아침 일찍 빨아 널어둔 셔츠가 점심 무렵 빳빳하게 마르거든. 그걸 몸에 걸치면 기분이 얼마나 상쾌한지 몰라.” 참으로 소박한 행복이다. 작품이 잘될 때 제일 기분이 좋다, 같은 의례적인 말은 그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직접 꾸미고 설계한 그의 작업실 내부도 소박하긴 마찬가지다. 특히 쉼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오래된 한옥이 헐릴 때 주워 왔다는 기다란 평상 위론 그가 만든 철제 책꽂이가 지그재그로 매달려 있고 한편엔 인체를 형상화한 그의 레진resin 작품이 비스듬히 앉아 있다. 크게 진흙 작업실과 철물 작업실로 나누어진 대형 작업실처럼 그의 작품 이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공간이다. 너른 창문 위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른 오전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평상 위에 깔린 부드러운 털 깔개에 몸을 눕히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고 있노라면 욕심이나 편견 따윈 스밀 곳이 없다. 몸을 일으켜 한 발 내디디면 반들반들한 자갈이 밟히고, 한편엔 멋들어진 음을 금세라도 쏟아낼 법한 첼로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만날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해놓은 게 없어 그렇지, 내가 잘하는 건 없어도 호기심은 많아. 특히 손으로 하는 건 다 좋아해. 요즘 유행하는 캘리그래피에도 관심이 많고, 한땐 이태리 요리도 배웠어. 첼로는 3년 전부터 배우고 있는데, ‘솔’ 소리 하나는 아주 오랫동안, 정확하게 낼 수 있어(웃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게 안재복식 스타일이다. 그렇게 쌓인 경험이 그의 정신을, 그리고 그의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살찌우는 것. 그 맹목과 열정이 그저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다.
1 안재복 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비’. 의젓하고 잘생긴 품이 가수 비 못지않다.
2 병풍 모양으로 캔버스를 이어 만든 접이식 화폭 앞에서 작업 중인 안재복 씨.
3 백조보다 더 우아한 거위. 안재복 씨가 사랑하는 동물 가족 중 하나다.
좋은 걸 보면 혹여 잊을까 작업실 곳곳에 스크랩하고 메모해 두는 것도 그만의 작업 노하우. 신문 스크랩부터 딸이 선물한 약 상자를 재활용해 만든 벽걸이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손수 쓴 펜글씨로 “세희는 세 개의 상자를 주었습니다. 하나는 약, 하나는 케이크, 하나는 초콜릿. 신년, 생일, 그리고 ‘발렌타인’이래요” 라고 덧붙인 메모가 부녀간의 애틋한 정을 짐작케 한다. 아이디어 스케치와 모형 제작을 주로 하는 작업실에도 인상 깊은 메모가 매달렸다. “그저 죽지 않으려고 먹지는 말자.” 함축적인 언어가 마음을 친다. “메모하는 습관이 생긴 건 사실 머리가 나빠서야. 메모를 해 놔야 생각이 구체적이 되거든. 망상과 아이디어의 차이는 별게 아냐. 적어놓고 실천하는가, 아닌가에 달린 거지.” 병풍 모양으로 캔버스를 이어 접이식 화폭을 만들고, 자투리 철판을 이용해 모빌 장식을 만드는 위트 넘치는 상상력도 어쩌면 메모의 힘일지 모르겠다. 잡동사니가 그득해 산만한 듯 보이지만 요모조모 쓸모 있게 구획된 작업실도 메모 덕을 본 것일 테고. “솔직히 여기 와서 작업 속도가 더 빨라진 건 아니야. 하지만 나 자신에겐 보다 충실해졌지. 그걸로 충분해. 젊을 땐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고, 좋은 작품 하려고 욕심도 부렸지만, 이젠 다 털어 버렸어. 스스로에게 충실하면 나머진 저절로 잘되는 것 같아. 남은 건 그냥 지금처럼 건강하고 즐겁게, 행복하게 사는 거지. 이것도 욕심일 테지만, 내 삶이 예술 같다면 더 바랄 게 없고.”
비움과 채움, 차가움과 따뜻함, 단순함과 치밀함. 그 모순의 이중주 속에서 삶은 계속된다. 중요한 건 그 안에 숨겨진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없는가다. 다행스럽게도 안재복 씨는 양평에서 작고 사소해서 더욱 충만한 행복을 발견한 듯했다. 전염성 100%의 유쾌하고 즐거운 에너지도 함께. 재복在福, 이름만큼이나 복도 많은 작가다. 홈페이지 www.ahnjaebok.com에서 그의 세계를 구경할 수 있다.
4 딸이 준 선물 상자를 활용해 만든 벽걸이 작품. ‘세희가 준 약상자 0802’로 시작하는 메모가 정겹다.
5 독특한 형상의 석고 작품. 철제 프레임이 더욱 눈길을 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