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혈관 시리즈’(2000)
한라산 원시림에 간 이유
사진가 배병우 씨가 겨울 나무를 찍으러 가는 곳은 제주도 한라산이다. “나무를 보러 카메라 메고 전국 각지의 산을 돌아다녔습니다. 우리나라 명산에는 죄 군부 독재 시절 조성된 인공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군요. 그러니까 나무의 나이가 많아봤자 저와 비슷한 정도인 거죠.” 그런데 한라산은 달랐다. 태고의 생태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원시림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유일한 산이지요.” 그 원시림은 배병우 씨를 30년 동안 제주도로 불렀다. 한라산 나무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겨울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무는 벌거벗으면 살아온 모습이 속속들이 드러나요. 잎을 벗으니 앙상한 줄기만 남는데, 그러면 살아온 자취를 조금 더 선연하게 볼 수 있지요.” 흔히 겨울 숲을 두고 황량하다거나 쓸쓸하다는 표현을 하는데 배병우 씨는 오히려 “드라마틱하게 뻗은 나뭇가지의 선이 황홀하다”고 말한다. 제 몸을 덮은 잎을 떨어뜨리고 더욱 뜨겁게 자기를 열어 보이는 것 같다.
‘모세혈관 시리즈’(2000)
겨울 나무는 나이 들수록 아름답다
겨울 숲 중에서도 배병우 씨가 렌즈를 고정하는 나무는 주로 나이가 많은 나무다. “자연스러움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새삼 실감해요.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살아온 나무는 가지가 뻗은 모양이라든가 서 있는 위치가 ‘참 그럴 법하다’ 싶거든요.” 사람이 필요에 따라 수종을 택해서 이룬 숲은 자생적으로 자라난 나무로 이루어진 숲에 비해 그 ‘자연스러움’을 획득하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오래된 나무는 모양이 어떻든 호소력이 있다. 괴이하게 몸을 비틀고 있든, 두툼한 밑동에서부터 위로 곧게 뻗었든 무언가 할 말이 가득하다. “격식 격格자의 부수가 나무 목木자입니다. 옛사람들은 나무가 나이 들수록 격조를 띤다는 것을 간파했던 거죠.” 늙은 나무는 변화무쌍한 사계절을 수십 혹은 수백 차례 보내고 살아남는 동안 제 나름의 격을 획득했을 것이다. 평생 나무를 찾아다닌 배병우 씨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아름다움이다. “자꾸 숲을 찾아다닐수록 이 감흥이 무뎌지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지금 마주한 이 나무를 그대로 볼 줄 모르고 인식이 어제 혹은 예전에 본 나무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사실 이 나무는 어제와 오늘이 다른데 말이지요.”
‘모세혈관 시리즈’(2000)
여린 빛으로 포착한 모세혈관
나무뿌리가 굵어질수록 잔뿌리가 무성해진다. 지상으로 솟은 부위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해가 거듭되며 나무줄기가 굵어질수록 잔가지도 무성해진다. 그런데 잔가지는 눈으로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 렌즈가 더 명민하고 민감하게 잔가지의 기운을 포착한다. 어쩌면 실제로 겨울 나무를 보는 것보다 배병우 씨가 촬영한 사진을 보았을 때 겨울 나무의 생김새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녀린 선까지 포착하기 위해서 배병우 씨는 새벽에 움직인다. 한낮에 내리꽂는 햇살은 그 강렬한 빛으로 잔가지를 날려버린다. 그러나 동트기 직전부터 동틀 무렵에 빛은 숲 사이로 살금살금 스며들어 오기 때문에, 카메라는 이 섬세한 빛으로 잔가지까지 잡아낼 수 있다. “새벽 혹은 해가 지기 전에 촬영하기를 좋아해요. 밀레의 ‘만종’을 떠올리면 그 빛을 연상하기 쉬울 겁니다. 빛의 컬러가 풍부하고 동시에 신비롭지요.” 그는 독일 사진가 모홀리 나기가 말한 대로 ‘사진photograph’이란 곧 빛 그림’임을 알면 이해가 쉽다고 설명한다.
라틴어로 ‘포토photo’란 빛을 뜻하고, ‘그라프graph’는 그림을 뜻한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빛을 어떻게 포착할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배병우 씨가 빛을 까다롭게 고를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촬영된 겨울 나무 시리즈를 들여다보니 나뭇가지가 마치 모세혈관이 분포한 것처럼 뻗어나갔다. 그래서 제목도 ‘모세혈관 시리즈’다. 번개 섬광이 ‘번쩍’ 하고 지나간 밤하늘 같기도 하다. 혹은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해석을 내놓는다. 흑백 필름으로 색을 없애고 나니 명암과 실루엣만 남고, 비로소 ‘나무’라는 상像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보는 이의 상상의 여지가 넓어졌다. 요즘에는 눈 쌓인 땅 위에 붙어서 자라나는 넝쿨을 촬영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언뜻 흰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동양화 같아서 좋다고 한다. 배병우 씨는 촬영 전날 제주도에 도착해 새벽이 오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기다려서 만족스러운 빛을 만날 수 있는 한두 시간 동안 셔터를 누른다. 시쳇말로 ‘필’이 꽂히면 삼각대를 고정하고 선 자리에서 필름을 열 통 이상 쓴다. 꼼짝 않고 대여섯 시간 동안 촬영할 때도 많다. 그중에 한두 컷 건지면 잘한 셈이다. 그렇게 매해 겨울 반복한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 붙박여 생명을 틔워온 나무더러 단숨에 이야기를 해보라면, 가능하겠습니까. 기다려야지요.”
'모세혈관 시리즈’(2000)
배병우 씨가 안내하는 제주도 겨울 숲 여행
배병우 씨가 촬영한 겨울 나무는 한라산 어디쯤에 숨어 있을까? 뜻밖에도 배병우 씨는 한라산의 숨겨진 비경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등산객들처럼 성판악에서 출발해서 올라간다. 비결은 대로나 등산로에서 좀 벗어난 숲을 찾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20~30분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원시림을 만날 수 있다. 한라산은 완만한 화산 지형이라 숲 속으로 들어가도 안전하단다. 그가 다녀본 결과 특히 한라산의 동쪽 숲이 더 무성하니, 울창한 숲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동쪽으로 난 길을 택해보자. 배병우 씨는 전국의 솜씨 좋은 음식점을 수첩에 빼곡히 적어서 다닐 정도로 미식가다. 제주도 맛집은 여러 곳 있는데 마치 X파일처럼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다. 겨우 얻어낸 한 곳이 있으니 제주시 구 소방서 자리에 있는 ‘돌하루방’(064-752-7580). 이곳에서 제주도식 찌개를 꼭 먹어보라 권한다. 주인장과 마음이 맞으면 싱싱한 생선구이도 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