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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 위한 고속도로를 닦기 시작했다 북한 다녀온 소설가 조정래 선생
평생 한 편 쓰기도 어려운 대하소설을 한 갑자를 사는 동안 내리 세 편을 쓴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남북정상회담의 특별수행원 49명 중 한 명으로 북한에 다녀왔다. 1994년 첫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검찰에 고발된 뒤 무혐의 판결을 받을 때까지 11년 동안 마음고생을 했던 선생의 처지를 생각하면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뒤 언론 매체의 원고 기고와 인터뷰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던 선생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때 평화가 온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과 시인 김초혜 선생은 소문난 잉꼬부부다. 1967년 혼사를 맺었으니 올해로 결혼한 지 40주년이 되는데 지금도 하루하루를 청혼하던 그때 마음으로 살아간다. “내 아내는 나에게 매일 새로 피어나는 꽃입니다.” 40년간 한결같은 부부애로 살아올 수 있었던 삶의 비결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한다.

선생이 북한에서 돌아온 뒤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먼저 전화를 받은 김초혜 선생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선생에게 전화기를 바꿔주었다. 선생은 인터뷰와 집필할 원고가 많아 인터뷰를 하기 어렵다며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때 전화기 저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복이 가득한 집>은 좋은 잡지니까 인터뷰를 해야 돼요.” 김초혜 선생의 목소리였다. 선생의 대답이 곧바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이 인터뷰는 김초혜 선생의 말씀 한마디에 성사된 셈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은 당시 하루에 두세 시간씩밖에 자지 못하는 고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나는 하기 싫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좋은 잡지니까 해야 된다고 말해서 한 거죠. 아내는 나와 우리한테 해로운 판단은 안 하는 사람이니까 그 판단을 내가 믿고 절대 신뢰하지. 그러니까 내가 당시에 바로 바뀌었잖아요?(웃음)” 부인을 사랑하는 선생의 마음은 ‘김초혜’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표정이 활짝 핀 꽃처럼 해사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은 3년 전 사단법인 남북어린이어깨동무에서 평양에 지은 어린이병원 개원식 참석 차 평양에 다녀온 적이 있어 이번이 두 번째 방북이다. 3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 사이 북한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남북 정상이 만나는 장면을 보니 마음이 참 편하고 좋았습니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요.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북쪽으로 가시던 당시의 감회가 궁금합니다.”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것은 우리가 갈구해온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첫 번째 단계이고 첫걸음이에요. 그러니까 분단의 장벽이 무너진 건데, 우리가 일방적으로 무너뜨린 게 아니라 북한에서 넘게 해줬어요. 이것은 그쪽도 군사분계선을 원하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표시잖아요. 서로 의견을 합해서 평화통일로 가자는 엄청난 행사예요.”
“2박3일의 일정 동안 관심을 둔 것은 무엇인가요?”
“모든 수행원이 제일 걱정하고 두려워한 것은 별다른 성과 없이 남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얼마나 체면이 없고, 면목이 없고, 얼마나 안타까울까 걱정했는데 참 다행히도 큰 성과가 있었어요. ‘이 땅에서 어떤 전쟁도 반대한다’는 공동선언은 곧 평화 선언이에요. 그리고 상호 불가침의 원칙에 입거한 체제 인정이에요. (평화통일을 하려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야 되거든. 그래야 평화가 오니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밖에 더 있어요? 이번 선언은 CNN이 방송했듯이 전 세계를 향한 약속이에요. 이 얼마나 큰 역사의 진전입니까.”

북한 여인의 머리에 꽂혀 있던 색색의 머리핀 선생의 이야기를 듣자니 남과 북의 관계가 결혼을 전제로 맞선을 보는 남자와 여자와 비슷한 게 아닌가 싶어진다. 서로 살아온 성장 환경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전공도 다른 남녀 사이의 만남 또는 헤어져 살던 부부가 다시 살림을 합치기 위해 해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평양의 분위기가 3년 전 방문했을 때와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받는 자의 굴욕스러움과 자존심 상하는 게 있어요. 그걸 다 감추고 ‘그래 도와달라, 받겠다’ 하는 게 통일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데서는 (지원) 비용이 10조, 30조 원일 거라 그러는데 다 근거 없는 얘기예요. 왜 정부에서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과 함께 갔겠어요? 그 사람들이 투자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주고 그들이 투자하게 되면 국가 예산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왼쪽)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방문한 남한 인사들을 환대하려고 북한 인민들은 평양 시내에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장식을 해놓았다. 조정래 선생은 이를 ‘10월의 크리스마스트리’라고 명명하고 취재 수첩에 그림을 그렸다.
(오른쪽)자기에 대한 엄격함 없이 어떻게 남을 감동시키는 글을 쓸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 조정래 선생. 그가 대학생 때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고 소망했던 이는 사회성을 문학성으로 잘 조화시킨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였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어요.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 이후 그간의 경협 과정을 통해 불신이 허물어지고 신뢰가 쌓였어요. 이것이 그들을 변화시킨 거죠. 3년 전 갔을 때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주체사상 이야기를 하고 웃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이야기할 때 자기들의 체제를 전혀 강조하지 않고 사적인 이야기도 하면서 항상 부드럽게 웃어요. 마음으로 친절하고 정성껏 대하려고 노력해요. 위에서 지시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걸 수용한 것이죠.”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평화통일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판단하기에 통일은 마음이 합해지는 것인데 그 마음의 일치가 절반은 이뤄졌으니 평화통일의 절반은 이뤄졌어요. 구체적인 합의문이 그 근거죠. 보통 합의문을 그렇게 길게 쓰는 일이 별로 없잖아요. 이뤄지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구체적으로 쓴 거예요.”
“일반 시민들은 어떻게 통일 준비를 하면 좋을까요?”
“간단해요. 통일을 바라는 민족적인 과제에 항상 마음을 한 가닥 걸쳐놓고 있으면서 생업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죠. 자기 맡은 바 생업에 충실하면서 마음 저 밑바닥에는 항상 ‘우리가 빨리 평화통일을 해야지’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으면 돼요. 생업을 잘해야 세금을 잘 내고 세금을 잘 내야 이런 거대한 국가 사업을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백두산 길이 열리게 되면 관광도 열심히 해야죠. 관광비 속에 저쪽을 돕는 돈이 들어 있으니까 그쪽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잖아요? 그게 그쪽 인민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것 아니에요? 또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백두산을 못 보면 한국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 땅에서 만주벌판을 바라보면서 심호흡도 한번 해보고. 그것이 다 북한 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일이고 평화통일의 디딤돌을 하나씩 놓는 거예요.”
“휴가나 연휴 때 해외로 갈 것이 아니라 북한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은데, 조 선생님께서는 백두산에 언제 가실 계획인가요?” “뚫리면 바로 가야죠. 우리 손자한테 보여줘야지.”

“북한에서 보신 것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공식 행사 끝나고 차들이 시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사람들은 거리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직장에 나가던 때였어요. 길을 지나던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면 그렇게 환호를 해요. 공식 행사가 끝났는데도요. 그 모습에서 북한 주민들도 뭔가 편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걸 봤어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북한에서의 공식 방문 일정 중 선생은 인민대학습당과 평양음악대학이라는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인민대학습당은 우리 식으로 하면 국립도서관쯤 되는 곳인데, 이곳에서는 영어 회화를 공부하는 남녀노소를 볼 수 있었다. 선생 일행은 평양음악대학에 방문해 바이올린, 하프, 피아노 등 서양 악기를 배우는 수업과 성악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는 수업을을 참관했다. 영어를 비롯한 서양 문화와 담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는 걸 보았다. 서양 예술을 익히고 있는 면면을 자신 있게 공개할 수 있을 정도로 북한 사회가 열린 것이다.

“핸드백을 손에 들지 않고 어깨에 메고, 굽 높은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도 무척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께 인상적이었던 북한 여성들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평양음악대학에서 노래하는 합창단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하얀 치마와 ‘깜장’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땋은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어요. 정갈하고 청초하고 아름답더라고. 그리고 여성들이기 때문에 땋은 머리 위에 예쁜 머리핀 여러 개를 꽂았는데 그 모양이 다 달라요(웃음). 그 머리핀들을 보면서 ‘아, 이런 정서적 자유를 누리고 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작가는 그런 걸 봐요.”
이미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필력을 날렸던 선생의 관찰력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집에서 암탉이 달걀 낳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껍질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는 물컹하다가 공기와 접하면서 딱딱해지는 것을 보고 글을 썼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 오히려 글을 읽은 은사가 감탄할 정도였다. 이번에 북한에 가면서 선생은 취재 수첩 두 개를 챙겼고 메모와 그림으로 그 순간을 기록했다.

20세기 한국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태백산맥>을 본 외국인들은 “이것은 단순히 한국전쟁만의 문제가 아니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인류사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2백자 원고지 1만 2천5백 장에 한 자 한 자 씌어진 <태백산맥>이 그저 한 편의 짧은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 소설에 얽힌 많은 곡절과 많은 사연 자체가 20세기 우리의 비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97년 1백 쇄 인쇄를 돌파했던 <태백산맥>은 내년 3~4월경 2백 쇄 인쇄를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그즈음, 지금 전라남도 벌교에서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태백산맥 문학관’이 개관한다. 이곳에는 <태백산맥>에 관한 모든 자료가 전시될 예정인데, 아무래도 압권은 선생이 쓴 원고 전문, 아들과 며느리가 각각 베껴 쓴 원고 전문, 그리고 ‘조사모(조정래를 사랑하는 모임)’ 의 회원 독자 1백여 명이 베껴 쓴 원고 전문이 될 듯하다.

가정은 화분에 담아놓은 화초
선생이 작가가 되기로 본격적으로 결심한 것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였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갈등했던 선생은 선택 기준을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로 삼았고 고민 끝에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20대 때 평생을 작가로 살겠다고 결심하면서 ‘작가의 삶은 형식보다 내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때 결심한 것을 지금까지 실천해오고 있다. 매일 매일의 하루 일과를 샐러리맨보다 더 정교하게 보내고,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떨거나 술 마시는 일을 멀리한다.

‘문자로 하는 쇼’인 문학을 하려면, 그것도 민족과 역사의 수난 같은 심각한 주제의 이야기를 노동에 지친 독자들이 읽게 하려면 세 배, 네 배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먹이를 구하기 위해 여덟 8시간 노동한다면 먹이와 감동을 함께 구하는 작가는 열두 시간이건 열다섯 시간이건 더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동하지만 선생에게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없고, 자연히 월요병이 있을 리 없다. 선생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냉정함, 평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글을 지으며 보낸 시간이 없었다면 우리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기까지 분단의 역사를 다룬 <태백산맥>, 을사조약 체결부터 해방기까지 수난사를 다룬 <아리랑>,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기까지 분단사를 다룬 <한강>이라는 한국 근대사에 관한 역작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작품을 쓰시는 동안 김초혜 선생님께서는 내조를 어떻게 하셨는지요?”
“집사람은 내가 글 쓸 수 있는 모든 조건에 최선을 다하죠. 내가 글을 쓸 때 매일 시장에 가요. 영양 있는 반찬을 준비해 뜨거운 점심을 만들어줍니다. 내가 20년 동안 대하소설 세 편을 쓰면서도 건강을 유지했던 건 집사람이 하나하나 챙겼기 때문입니다.”
“정성이 대단합니다.”
“그게 사랑이죠. 말로만 ‘사랑한다’ 하면 됩니까? 그렇게 해줄 때 내가 고마움을 느끼니까 “여보, 사랑해”라는 말이 나가고, 생일을 챙기게 되고, 선물도 정성껏 사게 되는 것이지요. 수천 년 응축된 지혜이면서 철학인 우리 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어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가는 사랑이 있어야 오는 사랑이 있다’(웃음)”
“사랑을 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사랑해야 되는군요?”
“모든 건 상대적이에요. 인간은 서로 기대고 있어요. 한쪽만 기대려 하면 됩니까? 서로 기대야 힘이 생기고, 아름다움이 피어나고, 삶의 활력이 생기고, 삶을 사랑하게 되지요.”
지난해 결혼 39주년을 맞아 커플링을 만들어 꼈던 조 선생은 올해 부인에게 시계를 선물했다. 그리고 부인 김초혜 선생은 남편에게 만년필을 선물했다.
“선생님 가족이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집 같습니다. 비결은 무엇일까요?”
“집사람도 나도 매일 책을 읽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서로의 문학을 존중해요. 그런 분위기가 자식들한테도 그대로 연결되잖아요? 우리가 더러운 공기를 마시고 숨 쉬면 목 아프고 병 걸리듯이, 가정도 부모들이 깨끗하게 잘 살고 분위기가 좋으면 그게 그대로 자식한테로 가요. 함께 호흡하는 것이니까.”
“행복이 가득한 집은 어떤 집일까요?”
“서로에게 서로가 만든 근심이 없어야지요.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아끼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항상 있어야 돼요. 가정은요, 화분에 담아놓은 화초예요. 땅에 있는 화초는 내버려둬도 자연이 주는 비를 맞고 바람과 햇빛을 맞으면서 저대로 잘 커요. 그런데 화분에 있는 화초는 물을 주지 않으면 죽어버려요. 가정의 행복은 그 화분에 담긴 화초를 키우듯이 계속 애정을 가지고 길러가는 거예요. 누가 주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는 것도 아니에요.”
“행복에 대해서는 어떻게 정의하세요?”
“근심과 걱정이 없는 모든 것이 행복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행복이 항상 멀리 있고, 어떤 큰 사과 열매처럼 어딘가에 열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착각이고 불행이에요. 불행은 딴 게 아니에요.”

집사람은 내가 문학을 해나가는 데에서 최초의 독자이고 가장 열심히 읽는 독자예요. 그리고 내 문학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서 철저한 교정을 보는 자이고, 수고자이고, 그 역할이 계속되니까 항상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죠. 나 또한 김초혜 문학의 최초의 독자이고, 열독자입니다.

“김초혜 시인의 시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시는 무엇인가요?(웃음)”
“어머니’.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렸는데 어머니를 쓴 시로는 절창인 것 같아요. 참 좋은 시고 잘 썼어요. 쉬운 말로 쓰인 의미가 깊은 시죠. 김초혜의 대표작이에요.”
“한번 낭송해주실 수 있으세요?”
“한 몸이었다 / 서로 갈려 / 다른 몸 되었는데 // 주고 아프게 / 받고 모자라게 / 나뉘일 줄 / 어이 알았으리 // 쓴 것만 알아 / 쓴 줄 모르는 어머니 / 단 것만 익혀 / 단 줄 모르는 자식 // 처음대로 / 한 몸으로 돌아가 / 서로 바꾸어 / 태어나면 어떠하리.”
커피 전문점의 음악을 배경으로 선생은 시를 읊어주었다. 세상에 이런 남편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런 남편이 내 남편이라면….
그러나 혼자서 그리 될 리 만무할 것이다. 남편이 이렇게 멋있는 사람으로 되게 하려면, 나는 김초혜 선생이 기울인 노력과 정성의 몇 배를 쏟아야 하지 않을까? 조정래 선생과 김초혜 선생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행복이 가득한 집에 있는 남편을 볼 게 아니라 그 남편을 있게 한 멋진 부인을 보고 배워야 할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