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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에게 듣는다 [新가족풍경 1] 가정을 사랑의 드라마가 열리는 무대로 만들어라
인류가 만든 조직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오래된 제도는 가족이다.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달라져도 가족만은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요즘 가족제도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가족이 지닌 본연의 숭고한 의미까지 퇴색되고 있다. 혼란스러울 때 원점으로 돌아가라 했다. 그것이 지금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중앙일보 고문)에게 가족의 의미를 들어보는 이유다.
집家은 돼지豕가 사는 곳? 가족이라는 말은 한자 말이다. 가족의 ‘족族’은 주로 부족tribe이나 종족을 뜻하는 말이다. 족이라는 건 떼를 말한다. 흔히 떼를 생각하면 인간보다는 짐승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단순히 짐승처럼 무리 지어 사는 것을 가족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가치를 나누는 걸 가족이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에서 가족처럼 성공했고 오래가는 것이 없다.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족이다. 동굴 속에서 떼 지어 살던 인간이 가족이 되는 그 순간은 무엇이던가?

가족의 ‘가家’는 지붕 아래 돼지豕가 들어 있는 형상이다. 어째 사람이 안 들어 있고 돼지가 들어 있냐. 그래서 사람들이 엉터리로 뭐라고 생각했냐면 집을 돼지우리에 비교해서, 돼지처럼 새끼들을 낳아 잔뜩 기르는 생식 공간으로 생각해서 家자에 돼지를 넣었다고 한다. 또는 인간은 원래 들판이나 굴속에서 자면서 짐승을 잡아다 도망가지 못하게 우리에 가두었는데, 그렇게 해놓고 보니 우리가 더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아! 여기가 동굴보다 좋구나!’라고 하면서 집 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서 家자에 돼지 시豕자를 집어넣었다고도 하는데, 두 가지 모두 엉터리 해설이다.

가족이 사는 집의 실제 뜻은 제사 공간이다. 생활공간이 아니다. 지금도 어떤 집에는 사당이 있는데, 애초의 집이란 사당이다. 사람들이 돼지머리를 상 위에 올려놓고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 집家이었다. 옛날 한자는 제례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소위 갑골문자도 원시종교의 부적들로 종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이라고 하는 건 적어도 신성 공간, 신주를 모시는 곳, 조상의 영을 모시는 곳이 된다. 공간 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개념이다. 대대로 이어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덧없이 죽지만 가족은 죽지 않는다. 쭉 이어진다. 그것이 씨족사회이고, 부족사회이고, 민족이고, 오늘날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가족은 면면한 핏줄血統을 이어오는 하나의 혈족 공간, 제례 공간, 신성 공간이다.

즐거움과 사랑을 나누는 식사 공동체 순수 우리말로는 가족을 식구라 그런다. 먹는 집단이라는 말이다. 세상에 같이 먹기만 하면 다 식구라는 말인데, 이것은 동서고금이 똑같다. 영어 단어 컴패니company를 보면 ‘컴com’의 뜻은 ‘같이with’이고, ‘팬pan’의 뜻은 ‘빵pan’이다. 빵(식사)을 같이 나눠 먹는 곳이 직장이라는 말이다. 직장의 원형은 뭘까? 우리말 가운데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게 식사 공동체라는 말이다. 가족이라는 조직은 밥을 같이 나눠 먹는 식사 공동체인 것이다.

짐승들은 수렵을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먹는다. 그런데 인간만은 짐승을 잡아서 바로 그 자리에서 바비큐로 만들어 먹지 않았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도 식욕을 억제하며 그 먹이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먹는다. 식욕을 억제하고 고기를 메고 십 리 길을 걷는다는 것은 애정 없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식사 공동체라는 것은 식의 본능을 억제함으로써, 또 혼자 먹는 게 아니라 나눠 먹음으로써 즐거움과 사랑을 나누는 곳이다. 짐승들은 먹이 앞에서 싸우지만 인간은 식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중요한 먹이를 나눠 먹는다. 이렇게 나눠 먹을 수 있는 사회가 최고의 가족이다. “저 사람, 밥맛이야!”라는 말이 있다.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밥 먹기가 싫다.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밥을 같이 먹고 싶다. 우리가 첫사랑의 고백을 대개 ‘사랑합니다’로 시작하지 않고 “차 한잔 하실까요?”나 “담에 식사 한번 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몸이 먼저 좋은 느낌을 안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여자 대학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밤낮 했던 이야기가 있다. “너희들, 남자가 밥 사준다고 아무나 쫓아다니면 안 돼. 정말 사랑하는 사람 아니면 가면 안 돼”라고 농담을 하니까 아이들은 웃었지만,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가족이 식사를 함께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서다.

돌고래는 초음파로 이야기하는데… 공장에서는 물건을 만들지만 가정에서는 생명체를 만든다. 그런데 (가족제도가 해체되고 있는) 지금은 그것이 해체되었다. 생명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참 가슴이 아프다. 오죽하면 내가 <디지로그>를 썼겠는가. 디지털 가지고는 못 산다. 디지털은 못 먹는 거다. 식사 공동체 못하는 거다. 식구라고 하는 것은 어금니로 씹어서 같이 밥을 나눠 먹는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을 씹을 수 있는가? 못 씹으니까 디지로그를 해야 된다. 그래서 내가 <디지로그>를 썼다. 아버지가 구해 온 먹이를 어머니가 요리를 해서 함께 먹었던 옛날 가족처럼 하기는 어렵겠지만 디지로그 가족은 될 수 있다. 같이 영화라도 보고, 문자라도 보내고, 사이월드에 사이버 홈도 만들자.

최근 우리 식구들하고 홈 시어터로 <1리터의 눈물>이라는 일본 TV 드라마를 봤다. 뇌 척추 병을 앓아서 걷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주인공인데, 그 영화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 영화를 보면 가족이 뭔지 안다. 그런 게 가족이다. 20여 년간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는 아이를 온 가족이 보살피고 늘 곁에서 도와준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런 가족에게, 특히 동생한테 미안해한다. “내가 아버지를 독점해서 미안해. 나만 아니었으면 말야… 너, 좋은 가방 들고 다녔을 텐데. 온 집안이 내 병구완하느라고 네 가방이 이렇게 낡은 거구나. 미안해.” 나중에는 얘가 몸이 너무 비틀어져서 마지막 회에는 전화도 걸지 못하게 되는데 그때 가족이 얘 휴대전화에 돌고래 장식을 달아주며 말한다. “말은 못해도 서로 초음파로 얘기하는 돌고래처럼 우리도 너하고 얘기를 하는 거야.”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가족끼리는 초음파로 얘기해야 되는 것 아닌가.

옛날 같으면 국제전화 요금이 비싸서 출장 가서 전화도 걸지 못했다. 전화를 걸면 어머니들이 벌써 “전화 값 많이 나온다. 그만 끓어라” 하셨다. 얼마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하지만 요즘엔 얼마든지 전화 걸어 얘기를 해도 되는 세상이다. 이렇게 좋은 기술로 가족을 회복해야 되는데 거꾸로 가족을 해체시키고 있다. 나는 아이티IT가 성해지고 디지털 세계가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사이버 세계가 되면 인간이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그러나 희망은 있다. 디지털 기술을 잘 사용하면 얼마든지 가족을 회복할 수 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난 뒤, 대놓고 사과하기 어려우면 홈페이지나 문자 메시지로 사과하는 것도 좋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사이버 세계에도 진짜 홈페이지를 만들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문패를 다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아버지 중심의 가부장 제도가 싫으면 서로서로 돌아가면서, 바꿔가면서 가장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집이 재미없으면 사람은 바깥으로 나돌기 마련이다. 그런데 집의 디자인이 잘되어 있고 재밌으면 나갔다가도 빨리 돌아오고 싶어진다. 집을 최대의 이벤트, 최대의 디자인, 사랑의 드라마가 열리는 무대로 만들면 그곳이 바로 행복이 가득한 집이다. 빚을 내서라도 홈 시어터를 갖추고, 실제로 아버지 역할, 어머니 역할을 돌아서 맡으며 연극을 해보고 이벤트를 열어가는 극장 가정을 만들어라.

* 서울 가족 구성의 변화-1인 가구 늘고 핵가족 줄어
저출산·혼인 감소·이혼 증가·고령화 등으로 서울 가족의 구성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서울의 1인 가구 수는 67만 6천 가구로, 전체 가구 중 20.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0년 전에 비해 29만 4천 가구가 늘어난 수치. 1인 가구의 연령별 분포는 20대(28.5%)가 가장 많았으며, 30대(26.2%), 60세 이상(18.9%), 40대(15.2%), 50대(10.0%) 순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기러기 아빠, 홀로 사는 실버 세대, ‘돌싱’(돌아온 싱글)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가족 구성을 가족 유형별로 살펴보면 ‘부모와 자녀 가구’가 43.6%로 가장 많았다. 이어 ‘1인 가구’ 20.4%, ‘부부 가구’ 11.0%, ‘한 부모와 자녀 가구’ 9.6%, ‘3세대 이상 가구’ 6.5%, 조손祖孫 가구 0.2%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1인 가구의 증가와는 달리 부부와 미혼 자녀가 함께 사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핵가족은 43.6%로, 10년 전에 비해 7.7%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