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누를 타고 오세아니아의 섬으로 향하는 듯한 여정을 선사하는 시노그래피.
전시 문화에도 호시절이 있다면 지금이 아닐까. 최근 미술관과 클래식 공연장을 찾는 Z 세대가 부쩍 늘고 있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의 2024년 관람객 수는 약 3백 80만 명이며,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2030의 비율은 66%가 넘는다. 전시 관람이나 클래식 음악 감상처럼 예술적 소양을 쌓는 행위는 이제 힙하고 낭만적인 취미로 주목받는다. 전시장을 찾는 일 자체가 ‘일상적 행위’가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클래식 힙’이라는 트렌드가 이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지만, ‘처음 보는 맥락’ 에서 색다른 감상을 선사하는 낯선 전시에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다.
오세아니아의 장신구는 단순한 장식을 넘어 섬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과 전통을 담고 있다.
우리를 미지의 예술로 이끄는 시도는 기획자ㆍ큐레이터 그리고 보존 전문가가 함께 직조하는 서사이며, ‘어떤 작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경로로’라는 질문을 거듭하며 전시의 서사를 결정짓는다. 그 흐름은 최근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두 전시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마나 모아나: 신성한 바다의 예술, 오세아니아>, 다른 하나는 세종문화회관의 <모네에서 워홀까지: 요하네스버그 갤러리 소장품 특별전>이다. 한쪽은 비서구 문명의 예술이 중심에서 벗어나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길을 설명하고, 다른 한쪽은 서구 예술의 권위를 낯선 대륙에서 되짚는 여정을 보여준다. 익숙한 듯 낯선 것들이 어떠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가? 그것을 드러내는 힘은 전시를 기획하고 설계하는 사람들의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들을 만나 우리가 마주한 전시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 속 초자연적 존재에 영감을 받은 오세아니아 지역의 조각 방식.
<마나 모아나 : 신성한 바다의 예술, 오세아니아>
‘신성한 힘’을 뜻하는 마나mana와 ‘거대한 바다’를 의미하는 모아나moana를 합쳐서 이름 지은 이번 특별전은 한국에서 접하기 쉽지 않던 태평양 문화권을 새로운 시각으로 소개한다. 프랑스 케브랑리-자크시라크 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전시로,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눠 구성했다.
1부 ‘물의 영토’는 카누를 타고 바다로 향하던 오세아니아인의 항해와 세계관을, 2부 ‘삶이 깃든 터전’은 멜라네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와 영적 질서의 상징으로 발전시켜온 예술을, 3부 ‘세대를 잇는 시간’은 서구와 다른 시간 개념을 바탕으로 한 폴리네시아의 철학적 인식을, 마지막 4부 ‘섬 … 그리고 사람들’에서는 장신구와 공예를 중심으로 오세아니아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조상과 현재의 우리를 연결하고,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관람객이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구성했다. 9월 14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 포인트 이번 전시는 고전과 현대, 서구와 비서구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예술이 어떻게 현대 예술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오세아니아 컬렉션 수집에 집착하던 고갱과 피카소를 떠올려보면, 그들의 눈에도 이들의 예술은 신성한 권위를 지닌 문화적 상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뱃머리 장식, 지붕을 꾸민 용마루 조각, 곤봉에 들어 있는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디테일, 입체적으로 구현한 초상화를 보는 듯한 오세아니아의 예술 작품은 반드시 천천히 그리고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시길!
Interview
백승미 학예연구사
누군가의 삶에 ‘의미’를 새기다
이번 전시는 어떻게 출발하게 되었는가?
오세아니아는 단순히 섬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바다를 중심으로 한 문화권이다. 바다는 섬과 섬을 이어주는 길이고, 인간과 자연이 연결되는 곳이자 과거와 현재ㆍ미래가 공존하는 세계다. 바다를 건너며 관계를 맺고, 삶의 방식과 믿음을 공예품에 담았다. 아득한 미지의 영역이지만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와 예술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프랑스 케브랑리-자크시라크 박물관과 협업도 이런 시선을 공유한 결과다.
큐레이터로서 ‘좋은 전시’란 무엇인가?
좋은 전시는 결국 사람의 인생에 하나의 의미를 남길 수 있어야 한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획자도 행복하고, 또 그것이 타인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전시는 충분히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령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가 루벤스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는 장면처럼 전시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품 하나가 누군가에겐 평생의 작품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고를 열어주거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 모든 변화의 가능성 자체가 전시의 힘이자 공감의 영역에 닿아 있어야 한다.
전시 연출에서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시노그래피도 눈길을 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홍예나 디자인 전문경력관, 케브랑리-자크시라크 박물관과 긴밀하게 협업하며 시노그래피를 완성했다.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감상하며 관람객 스스로 해석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장치가 되어주길 바랐다. 이런 구성은 전시의 전체적 맥락과 이해도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입구에서는 관람객이 마치 카누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시각적 장치를 구현하고, 전시 공간 속 작품들은 오세아니아 식물을 프린트한 유리장 안에 배치해 마치 대양에 흩어진 섬들을 보는 듯한 연출을 시도했다. 특히 2부는 조상의 혼과 현재의 삶이 연결된다는 멜라네시아 사람들의 신념을 시각화했다. 마을 중심에 공동체의 상징인 ‘의식의 집’이 자리 잡듯, 전시장 한가운데 나무살 구조물을 설치해 이를 구현했다.
오세아니아 예술이 지닌 감상의 가능성은 무엇이라 보는가?
단순히 이국적인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예쁘다, 오래됐다, 신기하다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감상이 필요하다. “나무 하나의 허락을 구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이것은 이야기인가, 조각인가?” 같은 큐레이터의 질문을 배치해서 오세아니아 사람들이 남긴 행위와 영감의 에너지를 새롭게 감상하고, 지금 우리의 삶과도 연결되기를 바랐다.
비서구 문화를 보는 관점에서 이번 전시가 지닌 의미는?
문화를 이해하는건 세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시선이자 힘이다. 오세아니아의 섬들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제주나 남해의 섬이 떠오르기도 한다. 서구 중심이 아닌 흩어져 있는 섬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온 이들의 문화에는 그런 여운과 감동이 담겨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백승미 학예연구사는 전시 초기 기획부터 프랑스 케브랑리-자크시크라 박물관과 협업, 전시 연출까지 전 과정을 함께하며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인물이다. 그는 “누군가의 문화
를 이해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이자 힘”이라고 말한다.
공간 한가운데 아치형 구조물을 두어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책을 펼쳐보는 듯한 시선을 의도했다.
<모네에서 워홀까지 : 요하네스버그 갤러리 소장품 특별전>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을 꿈꾼 여성 컬렉터 플로렌스 필립스Florence Phillips의 열정에서 시작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립미술관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의 대표 소장품 1백43점을 소개하는 특별전. 이번 전시는 단순한 명화 나열을 넘어 미술사의 시간 위에 겹쳐진 문화적 경로와 수집의 역사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부터 20세기 현대미술까지, 아홉 가지 섹션으로 구성한 서양미술과 4백 년의 흐름을 관객이 직접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 렘브란트와 터너, 밀레와 마네, 모네와 마티스, 피카소와 워홀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의 거장들을 비서구 컬렉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해 감상의 깊이를 더한다. 8월 31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람 포인트 이번 전시는 서구 미술사의 중심에 있던 거장들이 비서구 대륙인 남아프리카의 수장고를 거쳐 지금 서울로 도착한 드문 여정이다. 이전에는 소유의 미술사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이동의 미술사’를 목격하는 감각이 요구된다. 비서구 컬렉션을 새로운 맥락으로 마주하는 경험은 언제나 새로운데, 큐레이터와 보존 전문가가 대륙 위를 유영하듯 작품을 느끼게 만드는 동선이 재미있다. 창문을 내어 작품과 작품이 겹쳐 보이게 만들고, 작품에 대한 두 사람의 애정 어린 시선이 우리 모두에게 와닿는 배려도 인상적이다. 인기가 많은 전시다 보니, 평일 낮에 일찍 가서 차분하게 관람하길 권한다.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길에 로댕의 작품을 두어 쉬어가며 전시의 여운을 느끼도록 구성했다.
Interview
총괄 큐레이터 시모나 바르톨레나Simona Bartolena, 보존 전문가 아르만도 페톨리니Armando Fettolini
눈으로 호흡하고 입으로 바라보다
이번 전시가 서울에서 열리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의 역사적 배경도 흥미롭다.
시모나 플로렌스 필립스 여사는 자신의 고향인 남아프리카를 위해 문화적 기반을 만들자고 했고, 유럽에서 수집한 작품을 기증하며 미술관 설립을 이끌었다. 그의 남편과 지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세계적 공공 미술관으로 성장했다. 이곳의 작품들이 처음 한국을 찾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전시장 선정부터 작품 선별, 보존 상태 평가, 전체 동선까지 오랜 기간 협업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를 위해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김대성 대표가 많은 애를 썼다. 서울은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이 높고, 클래식과 현대가 공존하는 역동적 도시다. 단순한 작품 소개가 아니라 4백 년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한 권의 책처럼 펼쳐보는 전시를 의도했다.
한 권의 책이라⋯ 그래서인가? 전시장을 걷다 보면 작품의 유기적 연결이 느껴진다.
시모나 하나의 전시가 하나의 유기적 그림처럼 보이길 원했다. 각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어떤 흐름으로 감상자가 이동할지를 서로 끊임없이 검토했다. 아르만도 집 안이 정돈되어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듯, 전시도 각 작품이 제자리에 있어야 관람객의 감각이 집중될 수 있다. 관람객은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며 시간의 흐름을 한 호흡으로 느껴야 한다.
비서구 컬렉션에서 유럽 고전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모나 고전은 끊임없이 새롭게 소환되고 재해석된다. 고전은 여전히 살아 있고 계속 진화하고 있다.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식민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은 그 자체가 서구 미술사와 비서구 문화 간의 긴장과 협업을 상징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지역에 유럽 미술이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통해 미술이 권력, 수집, 이동을 통해 어떻게 축적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보존 전문가를 만나는 일은 여전히 생경하다.
아르만도 보존은 작품의 숨결을 유지하는 일이다. 화가로 출발했고,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 복원 공방에서 직접 일을 배웠다. 이번 전시를 위해 80여 점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보수 과정을 거쳤다. 단순히 청소하는 일이 아니다. 캔버스의 안정성을 검토하고, 색채 보정과 장기적 보존 상태까지 면밀히 점검한다. 그 이후 공간에 안전하게, 제대로 설치하는 작업까지 모두 나의 일이다.
그 덕분에 이번 전시에 더욱더 매료되는 듯하다. 삶에서 예술이 주는 영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시모나 예술은 결국 삶을 이해하는 보편적 언어다. 미술사학자로서도, 한 아이의 엄마로서도 예술은 나의 일상과 분리될 수 없다. 예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곧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아르만도 예술은 감성을 지닌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꽃을 피우게 해준다. 어릴 때 프레스코화 공방에서 그림을 배우며 인생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 길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로 인해 나의 삶도 늘 풍요롭다.
새로운 시각으로 예술을 접근하고 싶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
시모나 어제 북촌 거리를 걸었는데, 한국은 참으로 활기가 넘친다. 틀림없이 미래에는 서울이 문화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가 경주와 제주, 부산을 거쳐 마침내 서울에 상륙했는데, 관람객을 살펴보면 호기심이 넘치고 감각이 열려 있다. 이 열린 감각을 기반으로 경계 없이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탐험하는 경로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런 의미에서 이우환의 그림은 꼭 보고 가야겠다.(웃음) 아르만도 예술은 눈으로 호흡하고, 입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 말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 될 것이다. 그 감각으로 이번 전시도 천천히, 느긋하게, 재미있게 즐겨주었으면 좋겠다.
>> 전시를 큐레이팅한 시모나 바르톨레나는 유럽 미술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로 서구 미술의 거장들을 ‘비서구 컬렉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작품의 동선을 설계하고, 누구나 동일한 조건에서 편히 감상할 수 있도록 작품의 퀄리티를 책임지는 보존 전문가 아르만도 페톨리니는 작품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곧 감상으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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