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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꽃피운 치유의 조각 애니 모리스Annie Morris
영국 출신 아티스트 애니 모리스는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조각을 창조하며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그가 개인전 <애니 모리스>를 통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더페이지갤러리 개인전을 위해 내한한 작가. 전시장에는 그의 대표작 ‘스택’ 시리즈와 신작 ‘꽃 여인’ 조각이 놓여 있다.
다채로운 색상과 불규칙한 크기의 동그란 구체들을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수직으로 쌓아 올린 애니 모리스의 ‘스택Stack’ 시리즈는 사산의 아픔을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임신부의 배를 상징하는 동그란 구체는 생명의 기적과 불안함을 의미하는데, 이와 대비되는 선명한 색감과 리듬감은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로 공간을 채운다. ‘기쁨 쌓기’라고도 부르는 이 조각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슬픔이 깃든 추억은 마음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 없음을 느꼈어요. 그 때문에 희망적이고 즐거운 무언가로 대체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스택’ 시리즈를 작업하는 과정에서 그 어떠한 역경에도 희망적 요소가 분명히 존재함을 깨달았어요.” 이번 서울에서 첫선을 보이는 개인전은 애니 모리스 특유의 리드미컬한 여성적 생명력이 다채로운 색채와 동적 형태로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구성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대표작 ‘스택’ 시리즈는 물론 그가 창조한 드로잉 기법인 ‘스레드 페인팅Thread Painting’ 태피스트리, 그리고 그의 최신작 ‘꽃 여인(Flower Woman)’까지 작품을 모두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마치 마티스의 컬러풀한 드로잉을 연상케 하는 ‘꽃 여인’ 시리즈는 작가의 뛰어난 드로잉 실력을 증명하듯 여성의 신체를 유려한 선으로 간결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조각 작품인데, 꽃 형태의 머리와 임신한 여성을 상징하는 신체를 형상화한 강철 조각은 작가 자신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작가와 만나 조각이 지닌 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여성의 신체를 유려한 선으로 그려낸 조각 작품 ‘꽃 여인’ 시리즈는 작가의 어머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Flower Woman’, Steel, paint, 300×86×2cm, 2024.
“어른이 되면 트라우마를 더욱 정교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택’ 조각들로 가득 찬 제 스튜디오에 앉아 있으면 마치 유산으로 없어진 아기가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어요.”

이번 개인전은 한국 관객에게 처음으로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스택’부터 태피스트리, 3m 크기의 ‘꽃 여인’까지 대표작이 총동원됐죠.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전시장임에도 알찬 구성이 인상적입니다. 어떤 식으로 화이트 큐브를 꾸미고자 했나요?
런던에 자리한 제 스튜디오를 재현하고자 했어요. 태피스트리부터 대형 피겨까지, 구작과 신작이 뒤섞인 일련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해 서로 간에 어떻게 합을 이루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작품도 있는데, 볼륨감·컬러·균형 등을 고려한 세 개의 스택을 제작했습니다. 강철(steel)로 만든 조각은 회화에 가까운 반면,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실로 제작했기에 입체감이 돋보이죠. 그 때문에 제 작업은 조각과 회화 사이 어디쯤 놓여 있다고 생각해요. 이 자체만으로도 관객에게 신선함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당신의 대표 작품은 단연 2014년 유산 경험에서 비롯된 ‘스택’ 시리즈입니다. 군청색, 자홍색, 황토색 등 다채로운 색상의 각기 다른 크기의 구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굳세게 일어선 인간의 의지와 생명의 기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토록 희망적인 메시지를 구현할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하룻밤 사이에 배가 납작해진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제게 일어난 이 ‘비극’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되짚어보기 위해서는 육체적 노동이 필요했고요.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행위는 말하자면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문득 그 스케치를 조각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싶었죠.

‘스택’의 모든 피스는 사이즈와 높이가 각기 다릅 니다. 어떤 식으로 구현한 것인가요?
사실 ‘스택’ 조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감입니다. 불균형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역경 속에서 살아남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열망과 끈기를 나타내기 때문이죠. 유리섬유 소재를 사용해 구를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리섬유는 가볍고 강도가 높은 특성 덕분에 무게나 구조에 제한받지 않고 여러 가지 불규칙한 모양의 구체를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또한 바람, 비, 화학적 부식을 견딜 수 있어 지속력도 뛰어나요. 가소성과 가공성이 좋아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구를 유연하게 변형할 수도 있고요.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는 조각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고 했습니다. ‘스택’ 조각은 현재 세계 곳곳에 영구 설치되어 있는데, 당신의 작품은 장소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조각은 풍경과 함께했을 때 특별히 시너지가 발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불과 같은 버닝 도구를 사용해 청동을 태우며 색의 변화를 표현했어요. 샤토 라코스테 공원에 5.5m짜리 ‘스택’ 조각을 만들었는데 나무 사이, 하늘, 풍경 등에 따라 변화하는 색감을 목격했어요. 신비로움을 느꼈죠. 개인적으로 물 주위에 작품을 설치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이유는 바로 반사(reflection) 때문인데요, 말 그대로 작품을,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죠. 멕시코에 설치한 저의 작품에서 조금은 더 특별한 ‘스택’ 조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한 ‘꽃 여인’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이 또한 당신의 아픔을 반영한 작품이라고요.
‘꽃 여인’은 제 어머니의 스토리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귀책 사유로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저는 꽃을 어머니의 초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꽃은 아름답지만 소멸하고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인 꽃을 어머니에 대입한 것이죠. 이는 저를 비롯해 시련을 겪은 모든 여성의 자화상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렇듯 당신은 개인적 트라우마를 다룬 작품을 선보여왔습니다. 자전적 이야기, 더 나아가 트라우마를 다룬 작품에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나요?
어릴 때와는 달리 어른이 되면 트라우마를 더욱 정교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유산 경험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고 심지어 건강 염려증도 생겼는데, 저는 이 모든 것을 그림과 조각을 만들며 치료해나갔어요. ‘스택’ 조각들로 가득 찬 제 스튜디오에 앉아 있으면 제 아기를 다시 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실로 그림을 그리듯 꿰맨 태피스트리 작품. ‘If You Could Be Anyone’, Thread on linen 321.5×121cm(Framed), 2022. © Annie Morris
현시대 여성 작가로서 심지어 조각 작품으로 작업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여자이기 때문에 작품의 아이디어, 주제, 감정에는 자연스럽게 여성성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성 조각가를 넘어 ‘조각가’로서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실로 그림을 그리는 스레드 드로잉 페인팅 태피스트리 작품을 탄생시켰듯 말이죠. 수채화나 오일 스틱, 연필, 흑연, 크레파스 등 다양한 느낌을 내기 위해 수십만 개의 실 자국을 추가하는데, 본질적으로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이지만,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아요. 아티스트의 손길, 즉 공예 정신을 통해야만 비로소 관람객에게 유대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구 반대편에 자리한 스튜디오에서 일과가 궁금합니다.
저와 같은 예술가인 남편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일하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습니다. 그는 종종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생각하고, 쓰고, 명상하는 반면, 저는 정반대예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바닥에 커다란 종이를 깔고 최대한 즉각적으로 많은 그림을 그리죠. 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그 때문에 사용하지 않던 색을 과감하게 쓸 수도 있었고요.

이번 개인전을 위해 내한 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이 궁금합니다. 어떤 점이 가장 흥미로웠나요?
한국은 캘리그래피의 나라임을 깨달았어요.(웃음) 붓, 잉크와 수채화 물감, 종이를 파는 가게에서 하루 종일 그런 것을 샀는데, 벌써부터 무척 기대됩니다.

수천 년 뒤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나요?
안료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아예 새로운 안료를 제작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제 작품이 최대한 많은 사람과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리고 그것이 희망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영국에 자리한 애니 모리스의 작업실. 아티스트이자 그의 남편인 이드리스 칸Idris Khan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는다. © Annie Morris, Photo: Andrew Quinn, Image provided by The Page Gallery
<애니 모리스>
기간 9월 30일~11월 2일
장소 더페이지갤러리 (서울시 성동구 서울숲2길 32-14)
문의 02-3447-0049

 

글 백세리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