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3층 옥상 공간의 벤치에 나란히 앉은 김정남 씨 가족. 집에 있을 때에도 잠시도 몸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집안일을 찾아 하는 성실한 아빠, 차분하고 지혜로운 엄마, 착하고 밝은 아이들로 화목한 가정이다.
(오른쪽) 한가한 오후를 즐기고 있는 강산이. 뒤로는 겨울을 대비한 장작이 넉넉하게 쌓여 있다. 이 집은 내부 공간이 크고 창이 많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조금 추운 편. 그래서 겨울에는 벽난로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있게 된다고.
김정남·김성민 씨 가족은 1년 반 전 이 집을 짓고 이사를 왔다. 아직 남아 있는 부암동 주택가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이곳에 살기로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이사를 온 후 가족의 삶은 아파트에 살던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김정남 씨는 아침마다 인왕산을 오르고 옥상의 텃밭을 가꾸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몸소 체험하고, 가족들은 늘어난 방문객 덕분에 일상적으로 많은 손님을 치르며 북적대는 나날을 살고 있다.
하얀 벽돌 벽과 나무 대문, 그리고 작은 마당이 반기는 이 집은 안으로 들어가면 시원한 통창과 3개 층에 걸친 계단 위로 펼쳐지는 높은 천장이 시원스럽다. 이는 김정남 씨의 형님이기도 한 건축가 김정주 씨가 설계한 것. 형제의 구상과 합작으로 완성된 이 집에는 김정남·김성민 씨 부부와 초등학생, 중학생인 딸과 아들까지 네 식구, 그에 더해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진돗개 강산이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조촐한 식구 수에도 불구하고 이 집에는 60켤레가 넘는 슬리퍼와 26개의 접이식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설마 투박하고도 실용적인 슬리퍼, 그것도 모두 똑같은 모양으로 몇십 개를 모으는 슬리퍼 마니아일 리는 없고, 아무리 손님이 많다 한들 슬리퍼가 60켤레라니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그 비밀은 바로 격주마다 이 집 거실에서 열리는 하우스 콘서트. 모르긴 해도 이 집은 ‘대한민국에서 평균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가정집 베스트 5’에 거뜬히 들 것이다.
격주마다 작은 클래식 연주회가 열리는 집
하우스 콘서트는 높은 천장 덕택에 우연히 시작되었다. 이 집 부부가 다니는 성당 선배이자 예술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가르치는 박로사 씨가 이 집에 초대받아 왔다가 문득 제안했다. “거실 천장이 높고 공간이 크니 소리 공명이 좋겠다. 너희 집에서 음악회를 하면 어떻겠니?” 박로사 씨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기량을 향상시킬 음악회 무대가 늘 절실했다. 이들은 이전처럼 대관료를 주고 공연장을 대여하는 대신 김정남 씨의 부암동 집 거실에 그랜드 피아노를 빌려다 놓고 작은 하우스 콘서트를 열기로 즉석에서 의기투합했다.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열띤 긴장이 바로 곁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하우스 콘서트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일회성으로 비롯된 일이었지만, 연주자와 주변 사람들의 호응이 좋고 김정남 씨 부부도 기꺼이 수고를 감수하기로 하여 이제 정기적인 행사로 자리잡았다. 적으면 40여 명, 많으면 80여 명의 관객이 들어찬 가운데 격주마다 토요일 5시에 소박한 거실 음악회가 진행된다.
(왼쪽) 옥상에 마련한 텃밭의 관리는 김정남 씨 몫이다. 이사 온 첫해인 작년에는 농사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올해는 실패를 밑거름으로 상추, 딸기 등 많은 채소와 과일을 수확하고 있다.
(오른쪽) 지난 6월 9일에 열렸던 하우스 콘서트 전경. 이날은 삼익 피아노 콩쿠르에서 고등부 1등으로 입상한 이종민 학생을 비롯 13명의 학생들이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성악 등으로 공연을 선보였다. 편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데, 각 곡이 끝날 때마다 잠시 쉬고 싶은 사람은 2, 3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
콘서트가 있는 날은 아침부터 손님의 발길이 이어진다. 꽃꽂이에 취미가 있는 후배는 일찍부터 꽃을 한 아름 사 들고 와서 1층 테이블을 차지한 채 음악회를 위한 꽃 장식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오후가 되면 시간 여유가 있는 손님들이 빵과 음료 등 간식을 사 들고 미리부터 이 집을 방문해 담소를 나눈다. 1층 거실과 2층의 아이들 방, 3층 AV룸과 옥상까지 3개 층을 오르내리며 손님들은 마치 자기 집인 양 편안히 이곳저곳에 머문다. 예쁜 집의 풍경, 사람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손님도 드물지 않다. 김정남 씨의 직장 동료부터 동네 사람, 일 때문에 일본에 있을 때 알게 된 일본인 친구, 성당 성가대의 선후배, 연주하는 학생들의 부모와 친구까지 콘서트를 보러 오는 관객 구성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재주로 이 음악회에 작은 기여를 하고, 특별한 재주가 없다면 간식으로 정성을 보탠다. 음악회가 있는 날은 김정남 씨도 바깥일을 일찍 마치고 돌아와 대문과 현관을 활짝 열고 옥상을 청소하는 등 부지런을 떤다. 현준이와 나연이, 두 아이도 한창 어른 말 듣지 않을 사춘기 나이로 나 몰라라 쌩하니 외출할 법도 하건만, 아버지를 도와 현관과 옥상에 슬리퍼를 꺼내놓고 의자도 챙겨놓는 것이 기특하다.
“우리 집에는 음악 전공자가 아무도 없어요. 아들이 피아노를 조금 치긴 하지만 우리 집에 연주하러 오는 아이들에 비할 실력은 아니죠. 그런데도 이런 음악회를 한다고 남다르게 생각하시면 부끄럽고요, 그냥 우리와 인연이 닿은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하는 것이랍니다.” 수십 명의 손님을 치르다 보면 번거롭고 피곤한 일도 많을 터.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자리는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흠이 나고 때도 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좋은 면과 궂은 면이 동시에 일어나는 다른 모든 인생사처럼 이 가족은 그냥 웃으며 담담히 받아들인다.
(왼쪽) 3개 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은 네 식구와 손님들의 발길로 항상 분주하다.
(오른쪽) 3층에 마련된 AV룸. 이곳에서 공연 실황 DVD를 보기도 하고, 하우스 콘서트가 끝난 후 어른들만의 와인 파티를 열기도 한다. 3 1층 복도에 걸린 이 글씨는 신영복 선생의 친필. 한자 ‘통通’의 의미가 이 집과 잘 어울린다.
우연한 선물처럼 오는 삶의 기쁨
지난 5월 이 집의 하우스 콘서트가 1주년을 맞았다. 거실에는 “축 1주년 기념 콘서트, 이웃사촌”이라는 메시지가 적힌 화분이 놓여 있었다. 1주년을 맞은 콘서트에는 평소보다 많은 손님이 이 집을 찾았고 쇼팽과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거실에 울려 퍼졌으며, 음악회가 끝난 뒤에는 삼겹살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이날 모인 이들은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풍경을 보면서, 옥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콘서트 1주년을 소박하게 자축했다. 이날도 성황을 이루었지만, 최다 인원을 기록했던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의 콘서트도 무척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은은한 초로 장식한 거실에서 연주자를 포함해 1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의자와 바닥, 계단에까지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함께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수고스럽고 번거로운 일도 많지만 때로 우연한 선물처럼 오는 행복한 순간이 있어 이 콘서트를 하는 것 같다고 김성민 씨는 말한다. “우리 집 음악회의 연주자는 주로 아마추어 학생들이지만 연주를 참 잘하고 열심히 해요. 듣고 있다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적인 순간이 있어요. 옆을 돌아보면 다른 사람들도 그 순간을 공유하고 있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유난 떤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움이 음악에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의 하우스 콘서트를 친근하게 생각한 유명 연주자들, 즉 바이올리니스트 제라드 풀레, 첼리스트 지진경,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등의 연주를 이 집에서 들을 기회가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 여긴다.
1 넓은 통창과 시원하게 펼쳐지는 공간이 매력적인 이 집은 김정남 씨의 형님이기도 한 예원건축사무소(051-807-0183) 김정주 씨가 설계를 맡았다. 그는 동서양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접목시키는 건축가로, 가톨릭 성당 설계를 많이 진행했다. 주택 또한 특유의 미적 감각으로 멋스럽고도 합리적인 공간을 창조해낸다. 시형종합건설(02-3401-5578)에서 시공을 맡았는데, 김정남 씨는 이곳의 이제열 대표에 대해 자신의 집을 짓듯 책임감 있게 시공하여 공사 과정에서 건축주를 더 젊어지게 만드는 인물이라 평한다.
2 주로 오락 공간으로 이용되는 3층은 한쪽에 작은 주방이 있어 간단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다. 정면에 보이는 문 밖은 옥상 공간.
3, 4 침실의 통창, 욕실의 천창으로 자연의 풍경이 가득 담긴다.
김정남 씨가 한 달을 고민해 지은 이 집의 이름은 ‘엘림인우Elim-in-U’. 한옥에 ‘~당’ ‘~헌’이라고 이름을 짓고 현판에 새겨 거는 것처럼, 비록 양옥이지만 그만의 이름을 짓고 문패를 만들어 대문에 걸었다. 이름의 의미를 살펴보면, ‘엘림’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오아시스, 안식처’란 뜻이며, ‘우’는 한문의 우주宇宙와 영어의 U(you)의 뜻을 지닌다. 풀어보면 우주 안의 안식처, 또는 당신 안의 안식처라는 의미. 가족의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기 힘든 시대에 이웃과 소통하는 집이 되고자, 당신 안의 안식처가 되고자 기꺼이 문을 활짝 연 이 집의 풍경이 참으로 훈훈하고 보기 좋다.
5 음악회가 끝난 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풍경을 배경으로 간단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뒤풀이 시간을 갖는다. 이들의 집에서 들리는 행복한 소리가 궁금하다면 엘림인우 홈페이지(www.eliminu.com)를 들러보도록.
6 나무 대문과 안내판이 기분 좋게 손님을 반긴다.
- 부암동 김정남 씨 댁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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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씨의 집에는 늘 소리가 넘친다. 네 명의 식구가 3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소리, 늘 찾아오는 손님과 떠들고 웃는 소리, 격주로 열리는 하우스 콘서트의 음악 소리, 사람들의 박수 소리…. 따뜻한 심성을 지닌 주인 가족의 성실함 덕분에 이 소리들은 ‘소음’이 아니라 ‘소통’이 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