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 대용으로 쓰던 나무 칠판, 앉은뱅이 의자, 탈, 방패, 무당 옷, 뱀 형상의 조각, 악기까지 신상호미술관 2층을 메운 아프리카 미술. 그는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이 물건들에 사로잡힌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가슴속에 혼돈을 품어야 한다”
오래 잊지 못하는 현자의 어릴 적 일화가 있다. 한 어른이 “너, 누구와 왔니?” 물었고, 그 아이가 “네, 저는 저하고 함께 왔습니다” 했다는 이야기. 그렇다. ‘나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진실이 담겨 있다. 내가 누구인지 찾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역사요 문학이며 철학이자 예술일 것이다.
신상호. ‘한국 도자 예술의 리더’라는 수식이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이다. 1970~1980년대에 청자와 분청으로 ‘도자기의 귀재’로 불린 정통 도예가였으나, 어느 날 평탄한 터전을 박차고 나섰다. 도자는 왜 조각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한 물음 끝에 도조陶彫라고 하는 조각적 형태를 탐했다. 전통 도자의 제한된 유약에서 벗어나 윗대가 칠해본 적 없는 원색들로 도자 위에 ‘아프리카의 꿈과 혼’을 채색했다.
이후 ‘구운 그림’ 시리즈로 회화의 영역까지 침범했다. 급기야 ‘구운 그림’을 조립해 건물 외벽을 감싸는 건축 도자라는 장르를 창조해냈다(알루미늄 틀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옷 갈아입듯 건축양식을 바꿀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특허도 받았다). 홍익대학교 도예유리학과 교수로, 동 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원장으로 양명한 삶을 살면서도 늘 이반을 꿈꾸었다. 그때마다 세상은 그를 이단아 취급했으나, 그는 빈 들에 홀로 있는 밤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2017년부터 또 다른 도자 회화 ‘묵시록’에 몰두 중이다.
아프리카인의 치마, 그리고 낮은 의자와 신발.
“나는 늘 직관에 치우친 사람입니다. 나를 객관화하거나이해시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죠. 대신 생각을 뒤집어엎기 위해 애쓰며, 변화에 집착하며 살았어요. 전통이든 철학이든 스타일이든 고정된 무엇에 머무는 걸 거부했죠. 멋도 없고 재미도 없으니까요. 대신 언제나 내게 새로운 ‘혼돈과 긴장’을 안겨줄 그것을 찾아 기웃거렸죠.”
그가 내게 건넨 A4 반 장짜리 메모에 이런 문장이 있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가슴속에 혼돈을 품어야 한다.”(본래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글) 그가 쓴 책 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내가 정의하는 작가는 ‘뭔진 모르지만 뭔가 될 것 같은 걸 알아보는 사람’.” 그는 현재와 또 다른 시간, 가능과 불가능, 인정과 배반의 경계에 서서 혼돈과 긴장을 즐겨온 ‘작가’ 신상호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겠다는 그 꿈 하나를 붙잡고.
1975년 양주 부곡리에 터를 잡을 때 심은 느티나무가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자신을 바라봐주었다며, 이제부턴 그 이파리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을 흙 위에 흙으로 그리며 살겠다고 한다. 그 연작의 이름은 ‘묵시록’이다.
“이야기가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꽤 알려진 바대로 그는 ‘일종의 병’을 앓고 있다. 한국·아프리카·유럽의 골동 시장을 수십 년째 쏘다니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프리카 무당의 옷을 사 모으고, 버려진 돛이나 부표를 수집하며, 집채만 한 폐탱크를 사들인다. 그 수집의 기준은 오로지 느낌이다. 물건의 연대, 투자 가치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눈에 ‘아름다운 물건’이라 여겨지면 그만이다. 1990년대 중반, 런던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로열 아카데미의 〈아프리카 대륙의 미술전〉을 본 그는 원시미술에 사로잡혔다. 그 후 세계 최고의 골동 시장 포토벨로 마켓을 무릎 닳도록 드나든 것이 수집 병증의 시작이다. 포토벨로에서 두 번의 겨울을 보내며 그는 마켓이 열리는 날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신열에 들떴다. 골동 딜러들조차 “대체 무엇을 위해서?”라고 물으면 그가 내놓는 답은 “I’m hungry”였다.
“한순간에 한 곳에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내가 그 수집물 속에서 내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를, 거기에 담긴 영광과 상처를 봅니다. 물건을 들여다보던 내가 어느 순간 한 세기 전 아프리카 줄루족 전사가 되고, 두 세기 전 서유럽의 대장장이가 되죠. 낯선 물건이 주는 그 혼돈과 긴장 그리고 그 속에서 나 나름대로의 조화를 찾아내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나를, 내 작품을 존재하게 합니다.”
지난 시대의 안내판, 이정표, 거푸집, 마차 같은 수집물 사이로 그의 대표작 ‘The Horse’ 시리즈가 서 있다.
그 혼돈과 긴장을 만나기 위해 그는 한국·아프리카·유럽의 골동 시장을 뒤지며 흥정하고, 사기당하고, 싸움까지 불사했다. “‘뭐든 찍어 먹어봐야 아는 사람이니 직접 해보고 판단해’라며 뒤를 대주는 참 좋은 여자를 마누라로 둬서” 그 수집 일이 한결 수월했다. 그렇게 사 모은 수집품이 수만 가지에 이르고, 아프리카 미술부터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유럽에 수출된 청나라 도자까지 연대와 지역을 초월한다. 무엇보다 그를 전율케 하는 아프리카 미술.
“아프리카 미술이야말로 프리미티브primitive의 덩어리입니다. 애초에 미술을 위한 미술이 아니라 우리 가족 건강하고, 부족이 전쟁에서 이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물건이니까요. 이성이나 지식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안에 디자인, 공예, 회화를 다 수용해요. 모든 콘텐츠가 식어가던 시기인 20세기 말, 유럽 미술이 아프리카 미술을 만나 회생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미술관 벽을 메운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제품. 19세기 중엽의 인쇄기계, 습도계, 기차역 안내판까지 수집품의 종류와 갯수가 상상을 초월한다.
“한순간에 한곳에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내가 그 수집물 속에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거기에 담긴 영광과 상처를 봅니다. 물건을 들여다보던 내가 어느 순간 한 세기 전 아프리카 줄루족 전사가 되고, 두 세기 전 서유럽의 대장장이가 되죠. 낯선 물건이 주는 그 ‘혼돈과 긴장’, 그리고 그 속에서 나 나름대로의 조화를 찾아내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나를, 내 작품을 존재하게 합니다.”
이번 전시의 한 축이 바로 아프리카 미술이다. 아프리카 남성들의 호신용 곤봉, 흠집 난 곳을 그가 직접 도자기로 기운 탈, 종이가 귀하던 시절 공책 기능을 한 나무 칠판, 의자, 옷가지, 모자 등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물건을 그만의 기준으로 선별했다. 앞서 말한 A4 반 장짜리 메모 속에 이 물건들의 의미를 짚은 문장이 있다. “이야기가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본래 소설가 이병주의 대하소설 <산하> 속 문장이다) 그는 이 오래된 물건들에서 햇빛 아래 드러난 ‘사실의 세계’ 대신 달빛 어른거리는 ‘상상의 세계’를 발견해낸 것이다.
“나는 Digester(소화하는 자)”
“1970년대 중반 양주 부곡리에 자리 잡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느티나무를 심은 겁니다. ‘이 나무가 크면 여기서 환갑잔치를 열어야겠다’고 이야기했죠. 환갑도 한참 넘은 2017년 어느 날, 훌쩍 큰 그 느티나무 아래서 일하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데요. ‘고민하고 즐거워하고 힘들어하던 내 평생을 네가 여기서 지켜봐줬구나. 그래, 나는 이제부터 너만 그리다 죽을 거다’. 그때부터 나를 묵묵히 지켜본 그 나무를 그렸고, ‘묵시록’이란 이름도 붙였죠.”
느티나무 잎 사이로 빛이 통하는 형상을 도자 판에 흙으로 그린 추상회화가 ‘묵시록’이다. 여기서도 그의 변혁은 그치지 않는다. ‘흙 위에 흙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도전이 그러하고, ‘신이 만든 물감’이라는 아크릴로 흙 그림을 칠하며 새로운 색을 찾아가는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림 한 귀퉁이에 새긴 신괴申怪라는 새로운 서명. 1947년생인 그가 ‘신상호’에서 ‘신괴’로 거듭나려는 선언이다.
아프리카 수평선 아래 짐승이 떼 지어 달리는 모습을 그가 도자 조각으로 구현했다. 말인지 소인지 알 수 없는 짐승이 달리는 순간 다리는 네 개 이상으로 보인다.
“결국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건 시대정신 같아요. 시대정신이란 지금 내가, 우리가 어느 위치에 존재하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거죠. 이를 위해 나는 숱한 혼돈과 긴장을 즐겨가며 수집하고, 그 안에 담긴 역사와 변화를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어 작품에 연결했어요.” 그의 골동 수집에 길잡이가 되어준 영국 사람 데이비드가 그에게 붙여준 ‘Digester(소화하는 자)’란 단어는 허명이 아니다.
누군가 “너, 누구와 왔니?” 물을 때 “저는 저하고 함께 왔습니다”라는 답을 내려고, 말이 원시의 바람을 가르듯 인생을 내달려온 이. 그가 확인한 자신의 현재 위치, 그걸 만나려면 올가을 부곡리에 가야 한다.
오픈 하우스 및 전시 도슨트
<아프리카 미술,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묵시록>
신상호 작가의 도자 회화 ‘묵시록’ 연작과 함께 그동안 수집한 아프리카 미술품,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빈티지를 망라하는 컬렉션전에 초대합니다. 신상호 작가의 전시 도슨트, 신상호미술관 투어 등이 이어집니다.
일시 2023년 11월 9일(목) 오전 11시
장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311번길 20-39
문의 02-2262-7349
- The Digester 새 컬렉션 전시 여는 신상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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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인간에게 약간의 흙을 주셨다. 신상호 작가는 신이 주신 그 약간의 흙으로 도예와 조각, 회화, 설치미술, 건축을 넘나들며 ‘평생 겁 없이, 맘대로’ 빚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묵시록’이라는 장대한 이름의 도자 회화에 몰두하는 중이다. 그 작업에 ‘혼돈과 긴장’이라는 동력이 되어준 수집품까지 헤쳐 모아 전시를 연다. <아프리카 미술 ,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묵시록>이라는 이름(그는 아직 전시명을 확정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영국 친구 데이비드가 지어주었다는 〈The Digester〉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그는 ‘소화하는 자’이므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