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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지시마에 사는 사람들 향기 아티스트 이즈미 칸
일본 열도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섬, 아와지시마. 기후가 온화하고 주변이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낙농업과 어업이 발달한 이곳엔 질 좋은 식재료가 넘쳐난다. 어디 식재료뿐인가! 일본 최대 향 생산지이자 일본 3대 기와의 생산지로 다채로운 문화를 꽃피운 아와지시마엔 그에 걸맞은 창작자가 즐비하다. <행복>은 지난 6월, 내세울 것이 너무도 많은 보물 이 같은 섬에서 세 명의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를 만났다.

이즈미 칸이 허브를 키우는 뒷마당으로 연결되는 통유리창.

일본 3대 기와 산지인 아와지시마의 기와를 사용해 만든 작업대. 사각형으로 직접 디자인했으며, 증류한 허브의 껍질로 유약을 만들어 기와에 칠한 것 또한 이즈미 칸의 아이디어였다.

일본 향의 70%를 생산하는 향 문화의 중심지 아와지시마. 이 섬에서 향기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세 번째 크리에이터 이즈미 칸을 만났다. 그는 ‘향기’를 통해 신체의 감각을 소생시키는 것을 테마로, 공간과 제품을 넘나들며 다양한 향 레시피를 창작한다.


천장을 낮추고 조명을 숨겨 최대한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작업등은 마치 땅속에서 비추는 희미한 불빛 같은 미니멀한 조명을 사용했다.
약 0.2초 만에 기억·감정·본능을 자극하는 유일한 감각, ‘후각’. 온화한 기후로 농업의 축복을 받은 아와지시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 산업이 바로 ‘향’이다. 아와지시마는 서기 595년 침향沈香나무(향의 원료로 쓰는 나무)가 내려왔다는 전설부터 1850년엔 본격적으로 향 제조에 사용하는 원료를 수입하고 판매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일본 향의 발상지이기 때문. 6월의 끝자락, 우리는 일본의 최대 향 생산지이자 선향線香의 고장이라 일컫는 이 섬에서 ‘젊은 향기 아티스트’로 꽤나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이즈미 칸いずみかんKan Izumi을 찾았다.

향기 아티스트는 그가 조향사 대신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공간부터 제품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이에 맞는 향을 디자인하기 때문에 자신을 그저 조향사로 칭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분류라는 것. 2019년 G20 정상회의가 열린 오사카 리가 로열 호텔부터 핫한 디자이너 브랜드 마메 쿠로구치와 협업한 이즈미 칸은 그야말로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즈미 칸의 브랜드 √595의 인센스 스틱. √595는 서기 595년에 일본 최초로 향의 원료가 되는 침향나무가 아와지시마에 표착했다는 데에서 영감을 얻어 명명했다.
늘 그렇듯 이 인기쟁이 아티스트를 만나러 가는 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는 세차게 내리쳤고, 얼마나 대단한 것이 숨어 있길래 이곳까지 올라야 할까 싶을 정도로 높고 험준한 길이 연속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지러울 만큼 굽이진 길을 오른 끝엔 머리가 저릿해질만큼 웅장한 산 능선이 펼쳐졌고, 거짓말처럼 날도 맑게 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엔 멋진 경치를 품은 작은 마을(Kozorasou)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사람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 카페와 늘 예약이 꽉 차 있다는 호텔, 그리고 그보다 더 안쪽 깊은 곳에서 그의 작업실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 매거진과의 촬영은 처음이라며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우리를 맞은 이즈미 칸. 허브를 일상생활에 접목하는 것이 사명이 될 정도로 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는 그는 마치 이 일을 위해 운명적으로 태어난 사람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상 그가 향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과정은 꽤나 독특하다. 테니스를 사랑하던 도쿄의 스포츠 소년 이즈미 칸은 2023년 현재 오사카 옆 작은 섬 아와지시마의 작업실에서 향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작업실 옆 작은 뒷마당에서 레몬그라스 등 허브를 기르고 있다.
부상으로 인해 사랑하던 테니스를 그만둔 후 대학에 진학해 마케팅을 전공한 그는 자신의 열정을 온전히 쏟을 수 있는 새로운 분야를 애타게 탐색했다. 오죽하면 카늘레를 좋아하던 당시엔 도쿄의 모든 카늘레 맛집을 탐방하며 카늘레 저널리스트로 데뷔할 생각까지 했다고! 

그러다 어느 초가을 귀갓길, 길가에 핀 금목서의 향기를 맡고 어릴 적 어머니와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한 그는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향의 힘을 느낀 후 도쿄를 거점으로 다양한 분야의 향기를 제작하는 작업을 찬찬히 이어왔다. 그리고 2017년, 아와지시의 지자체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향의 전통 산업이 뿌리내린 땅, 아와지시마로 이주했다.




토벽 특성상 먼지가 많이 나기 때문에 이곳에선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향의 레시피만 창작한다.
도쿄를 벗어나 아와지시마의 어느 산 중턱에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한 건 소음이 적은 작업 환경을 원했기 때문이다. 1616 아리타 재팬의 아트 디렉터 야나기하라 테루히로Teruhiro Yanagihara와 호텔 일부를 레노베이션해 호젓한 작업실을 마련했고, ‘배아’라고 이름 지었다.

“‘새벽의 창조’가 제 작업실의 콘셉트예요. 향의 레시피를 만드는 것은 오롯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 작업이 마치 동트기 전 새벽의 일과 같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향 창작 과정을 식물이 새싹을 틔우기 전 세포분열을 반복하는 과정에 비유해 배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작업실 벽, 천장, 바닥 모두 아와지시마산 흙으로 마감했어요. 흙은 냄새를 흡착하는 성질이 있어 조향하고 레시피를 만들 때 후각을 중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이죠.”


향수, 캔들, 인향, 인센스 스틱 등 이즈미 칸이 작업한 다양한 향 제품.
기와로 만든 작업실 문패.
이즈미 칸은 자신의 작업물을 한 아름 들고 나와 하나씩 소개하며 작업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클래식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향수, 2년에 걸쳐 완성한 혼다겐베에(田屋源兵衛) 프로젝트의 오비 인센스…. 그는 언제나 브랜드와 테마에 대한 충분한 조사를 바탕으로 향을 그려내기 때문에 한 제품을 완성하기까지 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완벽한 향을 디자인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작업 스토리를 하나 소개하자면 이렇다.

“패션 브랜드 마메 쿠로구치의 향을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브랜드 디자이너와 함께 그녀의 고향인 나가노를 찾았어요. 브랜드를 대표하는 향을 만들기 위해선 그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을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어릴 적 다니던 길을 걷는 등 그녀가 무엇을 보았고 보고 있는지, 패션 안에서 나타내고 싶어 하는 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나가노에서 굉장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어요. 그리고 그녀의 세세한 감정을 캐치해 ‘따뜻한 곳에 앉아 야외의 눈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을 바탕으로 브랜드의 대표 향을 만들었죠.”


작업실의 토벽은 아와지시마산 흙과 말린 레몬그라스 등 증류한 후의 허브 재료를 섞어 만들었다.
아와지시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이즈미 칸은 최근 √595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이곳에 정착하며 섬의 식물을 연구·재배하고, 이를 증류·건조하는 작업을 통해 향료 자체를 만드는 활동을 처음 시작한 그는 제작, 즉 제품화 영역까지 관심사가 넓어졌다. 아와지시마에서 가장 큰 향 공장인 군주도Kunjudo(香堂)와 협업해 √595를 만들었고, 지역 장인들과 함께 도전적인 제작을 하는 중이다.

지금까지 없던 향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일본 향 역사의 뿌리인 아와지시마의 가치를 국내외에 알리고 싶다는 이즈미 칸. 다섯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그와 대화를 나눈 후 포토그래퍼와 기획자, 그리고 기자는 그날 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지새웠다. 향을 생각하는 그의 순수한 열정과 고집, 아와지시마의 발전을 향한 마음…. 이즈미 칸 씨가 향기의 세계에 스며든 것처럼 그날 우리도 그의 세계에 은은히 스며들었다.


취재 협조 일본정부관광국

글 오송현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