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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전시 부채, 작가의 바람을 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부채가 전통에 생기를, 일상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여름생색>전은 전통문화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고, 동시대 시각예술계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시작한 가송예술상 본선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한 전시회다. 부채를 모티프로 하거나 장인과 협업한 작품이 대상이다.

올해 가송예술상 대상을 수상한 릴리 리 작가의 작품. 회화작 ‘이어질 리邐’와 설치작 ‘오르잇다’가 함께 전시됐다.
전통 쥘부채에서 영감받아 순환하는 고리 형태의 구조체를 만든 ADHD의 작품이 우수상을 수상했다.
제8회 <여름생색>전이 6월 1일부터 12일까지 인사아트 센터에서 열렸다. <여름생색>전은 가송예술상 공모전 본선 진출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2008년 가송 윤광열 동화약품 명예회장의 철학을 바탕으로 설립한 가송재단이 신진 작가를 발굴·지원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2012년 제정한 상이다. 부채 주제 부문과 부채 장인과 콜라보레이션 부문으로 나누어 1차 포트폴리오, 2차 심층 면접을 통해 본선 진출 작가를 선발한다. 부채 주제 부문 참여 작가는 접선(접는 부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콜라보레이션 부문 참여 작가는 접선 부문 무형문화재 김대석 선자장과 협업을 진행하는 것. 우리에게 ‘부채표 까스활명수’로 잘 알려진 만큼 동화약품이 접선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름생색’이란 전시명 또한 “여름 생색은 부채요, 겨울 생색은 달력이라(鄕中生色 夏扇冬曆)”는 말에서 착안했다. 올해에는 김민호, 문서진, 서지혜, 이웅철, 정희정, 최희정, ADHD, 릴리 리Lili Lee, 그리고 콜라보레이션 부문의 김다슬, 이경민까지 총 열 명의 작가가 본선에 진출했다. 이 중 대상, 우수상, 콜라보레이션상 수상작이 전시 개최 당일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통해 선정됐다.

인사아트센터 1층 본전시장에서는 샤머니즘의 주술적 이동 순간을 접선의 의미로 해석해 올해 가송예술상 대상을 수상한 릴리 리의 작품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했다. 바람·공기·햇빛의 촉감 등을 물건에 담아낸 문서진 작가의 작품, 합죽선에 그려진 그림이 접히고 펼쳐지는 모습에 착안해 전동장치를 이용한 김민호 작가의 회화 설치 작품, 프로젝터의 빛으로 선을 그어 부채 장인과 교감을 시도한 서지혜 작가의 작품이 뒤를 이었다. 이경민 작가가 김대석 선자장과 협업한 작품, 부채의 조형성을 이케아 선반으로 표현한 거대한 설치 조형물도 묵직하게 자리를 지켰다. 한편 본전시장에는 동화약품에 관한 소개와 가송예술상의 발자취도 전시했다.


1층 본전시장은 이경민 작가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와 김민호 작가의 ‘울산바위_속도의 풍경’ 등 설치 작업이 주를 이뤘다.
문서진 작가는 만질 수 없는 것의 촉감을 물건 속에 담아낸다.
관람객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김다슬 작가의 AR 작품을 체험하고 있다.
회화와 설치 작업이 주를 이룬 본전시장을 지나 2층 전시장에서는 영상 설치, 키네틱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두 번째 장인 콜라보레이션 부문 작품인, 전통 부채를 뉴미디어로 재해석한 김다슬 작가의 작품을 시작으로 최희정 작가의 반도네온 연주 영상 설치 작업물이 이어졌다. 전시장 중앙에는 ADHD의 순환하는 고리 형태의 키네틱 인스톨레이션이 빛나고, 그 옆으로 정희정 작가의 접선 형식 파노라마 영상 설치 작품, 컴퓨터 모니터 화면 보호기와 부채의 유사성을 주목한 이웅철 작가의 작품이 펼쳐졌다. 가송예술상 운영위원이자 문화역서울248 예술감독인 김노암의 말처럼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주제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화두이다. 70대 관람객이 스마트폰으로 김다슬 작가의 AR(증강 현실) 설치미술 작품을 관람하는 것을 바라보며, 이 전시가 세대 간 소통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가송예술상은 제정 이후 성장과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대상, 우수상, 콜라보레이션상, 총 세 명의 수상자를 가리는 자리에서 올해에는 우수상을 두 명 선정한 것이 하나의 근거다. 동화약품 윤현경 상무는 “올해부터 연령대를 40세 미만에서 49세 이하로 상향해 더욱 성숙된 역량의 많은 작가가 응모했고, 작품의 전반적 수준도 높다. 현직 미술관장인 심사위원들의 제안으로 우수상을 두 명 뽑은 이유이기도 하다”고 언급했다. 이어 “가송예술상은 우리나라의 신진 작가가 부채를 모티프로 재능과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꾸준히 제공해왔다”며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재능 있는 젊은 작가를 발굴·후원하는 데 일조하고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통 부채의 의미와 미학을 이어받아 표현의 폭을 한층 넓힌 현대 작품을 다음 <여름생색>전에서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대상

Lili Lee

릴리 리 작가는 동양화 재료를 사용해 샤머니즘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독창적 작업을 한다. 동양화 채색 방법인 수십 번 반복하는 붓질은 무언가를 염원하고 축원하는 행위와도 닮았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관람객이 힘, 에너지를 얻길 바란다.

이번 작품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었나?
부채는 샤머니즘의 필수 무구 중 하나다. 일반 부채와 무구로서 부채가 하는 목적과 역할이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무언가 새로운 관계나 공존을 위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자 했다. 굿의 과정에서 샤먼과 신이 만나는 주술적 순간을 시공간이 접히면서 생기는 교차점, 즉 접선의 의미로 해석해 표현했다.

알록달록 정말 다양한 요소가 있다.
방울, 부채 등 무구의 생김새와 색감이 굉장히 다양하다. 무구, 무복, 굿에서 느껴지는 리듬감, 악기의 모양과 소리, 샤먼이 추는 춤의 동선과 동태 등 지금까지 관찰해서 수집한 시각적 파편과 비가시적 요소를 함께 연결해 새로운 염원의 공간으로 구축하려고 했다. 이 작품이 하나의 통로나 중간 매개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꼈으면 좋겠나?
내 그림이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면서 힘을, 에너지를 얻는다는 느낌을 받고 가면 좋겠다.

수상 소감이 궁금하다.
너무 대단한 분들, 좋은 작업을 한 분들과 함께하게 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는데, 대상까지 받게 되어 감사하다. 한국에서 작업을 보여줄 기회가 많이 없어 심적으로 무척 지쳤는데, 이 상을 통해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하라는 응원을 받은 것 같다. 작업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콜라보레이션상
김다슬

가상과 실제, 그리고 평면과 입체의 연결 고리를 탐구하며 현실의 확장으로서 화면 너머의 세계에 관심이 많은 김다슬 작가는 AR, 라이브 매핑 등을 활용한 다양한 미디어 아트 작업을 선보인다. 이번 공모전에서는 김대석 선자장의 접선을 매개체로 가상과 현실을 이었다.


아네모텍스: 바람의 풍경, 혼합매체, 가변설치, 2023
장인과 콜라보레이션 부문에 참여했다.
그동안 공예나 전통적인 것과 접점이 없었다. 장인 선생님과 함께 작업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큰 기회라고 생각했다. 콜라보레이션 부문이기 때문에 나의 색깔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작업 방향을 잡았고, 혼자 고민하고 또 김대석 선생님과 이야기하며 작업을 조율해나갔다.

‘아네모텍스: 바람의 풍경’ 작품에 대해 소개해달라.
AR와 실시간으로 촬영한 영상이 부채에 매핑되어 상호작용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인터랙티브 작품이다. 큰 부채는 카메라를 통해 관람객이나 주변 환경을 부채 위에 먹으로 그리는 듯한 라이브 매핑을 시도했다. 작은 빨간 부채는 기존 작업관과 이어진다. 나의 작업에서 화면은 픽셀로 구성한 평면이 아니다. 화면 너머의 세계는 분명 어떤 깊이가 있을 거라 믿고, 픽셀을 부피가 있는 픽셀 큐브라고 상정하고 작업했다. 빨간 부채 앞에 있는 QR코드를 스캔하면 빨간 부채에 붙은 납작한 네모들이 스마트폰 안에서 큐브 형태로 변하며 바람이 불 때마다 돌아가면서 변한다. 전통과 현대 기술, 예술과의 공존과 조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을 본 김대석 장인의 반응은 어땠나?
선생님은 라이브 매핑이 그림인 줄 아셨다. “사람이 움직이면 이렇게 변해요”라고 설명해도 장비를 담양까지 가지고 가 보여드릴 수 없었으니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 나중에 영상을 보시고는 “이렇게 되는 거구나” 하며 굉장히 재밌어하셨다. “열심히 한다”고 해주시고 많이 지지해주셔서 작업하는 동안 큰 힘이 되었다.



우수상
최희정

최희정 작가는 종이를 접을 때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나 생기는 주름이 인간의 흔적, 역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관계와 연대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하던 그가 접선을 모티프로 한 공모전에 참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갈라테이아, 조명 조각, 가변설치, 2023 Hace Viento/It’s Windy, 반도네온 연주 영상설치, 2023
반도네온 연주 영상 설치 작업 ‘Hace Viento/It’s Windy’는 어떻게 시작했나?
반도네온은 좌측과 우측이 함께 연주해야 하는 악기다. 가운데 주름에서 하모니가 생기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관계의 결과로 멜로디가 만들어지고, 그 멜로디와 작품을 관람객이 접하며 또 다른 관계 맺기가 이루어진다. 이것을 한 공간에 담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기압차로 바람이 생기는 것 자체가 관계라는 생각이 들어 ‘바람이 분다’는 제목을 붙였다.

영상을 공간에 시각화한 것과 음악도 돋보인다.
반도네온은 탱고 음악에 많이 쓰는 악기인데, 탱고 음악이 원래 조금 무겁다. 그런데 전시명이 ‘여름생색’이지 않나. 너무 무겁지 않고, 위로가 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영상으로 만들되 그것을 한 공간 안에 하나의 접선, 주름으로 만들면 좋겠다 싶어 네 개의 채널을 사용했다.

함께 전시한 조명 조각 ‘갈라테이아’도 처음부터 같이 구상했다고 들었다.
갈라테이아는 피그말리온 신화 속 조각상의 이름이다.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한 그처럼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관계의 인물들을 만들어냈다. 그 인물들 사이에 관람객이 있고, 바람이 왔다 갔다 하며 멜로디가 흐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수상
ADHD(김영은, 김지하)

미디어 아티스트 김영은과 건축가 김지하로 구성한 ADHD는 건축, 미디어, 음악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실험을 하는 창작자 그룹이다. 2015년부터 가변적 매체와 형태의 실험을 통해 관람객에게 공감각적 경험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고리, 키네틱 인스톨레이션, 100×100×120cm, 2023
공모전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2020년 <오리가미 유니버스Origami Universe>라는 개인전을 진행했다. ‘우주, 시간, 공간, 생명’이라는 주제를 종이접기 제작 방식에 전기 기계장치를 접목해 표현한 것이다. 최근까지 이 오리가미 연작을 전시하고 작업했는데, 우리가 만들어내는 형태가 부채와 연관이 있다고 느꼈고, 부채에서 연상되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참여하게 됐다.

부채에서 어떤 영감을 얻었나?
부채를 펼치는 순간 보이지 않던 그림이 보이고, 바람이 부는 것에서 새로운 세계와 생명의 순환을 떠올렸다. 이를 접힘과 펼쳐짐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고리 형태의 종이접기 구조체로 표현했다. 한지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일반 종이나 홀로그램지를 사용해 빛을 표면에 반사해 효과를 냈다면 이번에는 부채처럼 한지를 투과한 빛이 만들어내는 느낌과 이미지에 주목했다. 한지는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습기에 따라, 풀을 먹이는 정도에 따라 경도와 느낌이 달라진다. 그런 부분이 어렵지만 재미있었다.

조명도 중요한 것 같다.
빛이 없으면 안 된다. 가운데 있는 빛의 막대기 외에도 한지 구조물 안에 LED 링이 있어 그걸 통해서 여러 느낌을 내고자 했다. 잔잔한 상태에서 태양처럼 뜨겁게 타오르다가 다시 차가워지는 등 그 안에 기승전결도 있다. 형태와 빛을 통해 우리가 표현하려고 한 생명의 순환을 느꼈으면 한다.


취재 협조 동화약품

글 김혜원 | 사진 이기태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