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한옥 공간 구석구석 장인의 숨결을 불어넣는 전통 붓과 매화도. 지금 정종미갤러리에서 열리는 기획전 <필과 매의 노래>의 두 주인공이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이 작품과 함께 느긋하게 머물며 한옥의 정취와 매력을 만끽할 수 있도록 카페도 운영한다
문득 어떤 풍경이 다가와 마음에 각인되는 순간이 있다. 무작위로 생을 스치던 평범한 일상의 틈에서 돌연 강렬하게 오감을 사로잡는 순간. 그 찰나의 빛깔과 질감, 냄새, 공기의 흐름까지도 선연히 기억에 남아 두고두고 기묘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정종미 작가에겐 10여 년 전 서촌의 어느 골목을 지나던 순간이 그랬다. 저명한 한국화가이자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교수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던 그는 우연히 맞닥뜨린 경복궁 서쪽의 오래된 풍광에 마음을 뺏겼다. 햇살이 켜켜이 포개지는 나지막한 고택과 물길처럼 그 사이를 흐르는 좁은 골목골목, 더딘 시간을 삼키며 더욱 선명해지는 계절의 농담. 어쩌면 그에겐 삶의 전환점 같은 순간이었을 터다.
그길로 부동산을 찾아 70년 된 일본식 가옥
과 바로 옆의 한옥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고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끌리듯 한옥 한 채를 추가로 마련했으니까. 정년 퇴임 후 하고 싶은 일과 그걸 하기 위한 공간에 대해 틈틈이 생각해보던 즈음이었다. “사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걸어두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희망하잖아요. 개인적으로도 그런 꿈이 있었는데, 누가 등 떠밀듯 정말 우연하게 이 공간이 저에게 주어진 거예요.”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마주한 순간 “가슴에 딱 안기던” 첫 번째 집과 달리 급매물로 나온 1950~1960년대 한옥은 한눈에도 무척 험해 보였고, 무분별한 개조와 증축 탓에 양옥인지 한옥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다만, 내부 폭이 일반 한옥에 비해 넓어 잘 수리하면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로부터 9년이 흐른 지난해 6월, 효자동의 오래된 골목 어귀에 ‘정종미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입구와 가까운 남쪽 홀이 갤러리의 메인 전시공간이라면 바 테이블과 소파가 놓인 북쪽 홀은안팎의 풍경을 감상하며 차 한잔 즐기기에 더없이좋다. 시시각각 한옥을 스쳐가는 계절의 흐름을한눈에 담을 수 있다.
안과 밖이 하나 되는 건축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정면으로 길게 뻗은 메인 홀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좌측 회랑을 지나면 바 테이블이 놓인 작은 홀과 미닫이문이 달린 방 하나가 중정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 홀과 마주 보는 구조다. 갤러리 겸 카페로 운영하지만 딱히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그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이 차 한잔과 함께 편안히 쉬어 가도록 구석구석 테이블을 마련해뒀다. 오래 고생하며 고치고 다듬은 만큼 보다 많은 사람과 이 공간을 나누고자 한 까닭이다. 실제로 폐가나 다름없던 옛 한옥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꼬박 1년 3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한옥 전문가인 김길성 대목장과 함께 이 여정을 안팎으로 진두지휘한 이는 정종미 대표 자신이다.
“자연의 흔한 소재, 너무 흔해서 가치 없다 여기는 것조차 사람의 손길을 더하면 아주 귀한 가치를 지닐 수 있지요. 제가 정말로 많은 시간을 들여 매달린 건 바로 그런 소재예요. 그게 저의 정서와 맞는, 가장 저다운 작업이기도 하고요. 지금도 산이나 들녘이 다 저의 재료 창고처럼 보여요.”
정종미 대표는 자연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공간으로서한옥의 매력에 깊이 빠졌다.
마당 한쪽에 자리한 툇마루. 빛과 바람을 한껏 머금은대나무가 그윽한 정취를 더한다.
과거 마당의 절반을 차지하던 연탄광을 철거하고새로 벽과 대문을 만들었다. 건물 아래 조명을 설치한덕분에 밤이 되면 마당 전체에 물이 고인 듯 은은한푸른빛이 번진다.
먼저 건물 전체의 동선부터 새롭게 짰다. 본래 작은 한옥 두 채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는데, 대문과 지붕이 자리하던 마당 부분을 실내로 끌어들여 ㄷ자 형태의 건물을 완성했다. 동네와의 호흡 역시 중요했다. 실내 면적을 조금씩 줄여 건물을 감싼 양쪽 골목에 각각 1m와 60cm를 더 내준 것도 동네 전체가 아름다워야 그 안의 공간이 함께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정 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포인트는 마당. 과거 마당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던 연탄광을 철거하고 벽을 쌓은 뒤 대문을 새로 냈다. 문 양옆으로 작은 툇마루를 놓고 가장자리를 따라 대나무도 심었다. “이 문이 공간의 핵심이 됐어요. 실제 사용하는 문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보면서 무언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거지요. 저 문을 지나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는 이 갤러리가 전시는 물론 공연과 세미나 등 폭넓은 활동이 이뤄지는 복합 문화 공간이 되기를 꿈꾸며 마당은 무대로, 실내는 객석으로 상정했다. 안쪽 벽면 대부분을 통유리 슬라이딩 도어로 마감해 실내 어디서든 마당을 바라보거나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문을 열면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고 온전히 하나의 공간만이 남도록. 실제로 정 대표가 직접 머물고 가꾸면서 느껴온 한옥의 가장 큰 매력 역시 ‘소통’이다. 자연과 인간이 쉽게 소통하고 교감하는 공간, 언제나 빛과 공기가 들락날락하는 반쯤 열려 있는 공간. 그러니까 마당이 있어야만 비로소 한옥의 의미가 살아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정 대표는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건축과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공간이 주는 즐거움도 함께 느끼기를 소망한다. “한옥은 자연을 끌어들이는 건축이다 보니 굉장히 계절을 타요. 계절마다 느낌이 전부 다르죠. 우리가 아파트에 살면서 계절을 느끼기는 쉽지 않잖아요. 제가 살아보니 그게 보통 행복이 아니더라고요. 한옥에서 보내는 시간은 무엇보다 자연을 가까이서 즐기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충북 무형문화재 제29호유필무 필장. 10대 시절붓에 입문해 전통 붓제작에 평생을 바쳐온장인이다.
붓 전체를 말의 꼬리털로 만든 말총붓. 붓대 부분은옻칠을 했다.
붓과 전통, 사라져가는 것에 대하여
물론 정성껏 빚은 그릇일수록 그 쓰임도 중요한 법. 정종미 대표가 지향하는 공간의 정체성은 기획전 <筆(필)과 梅(매)의 노래>에서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섬세한 봄볕이 스미는 한옥 구석구석, 언뜻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전통 붓 1백여 점이 정 대표의 크고 작은 매화도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온갖 종류의 초필草筆부터 율무나 연자 또는 산복숭아 씨앗으로 만든 관주붓까지, 모두 충북 무형문화재 유필무 필장이 헤아리기 힘든 시간과 공을 들여 하나하나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다. 이를테면 볏짚(고필), 갈대(노필), 칡(갈필) 등 식물성 재료로 만든 붓을 초필이라 통칭하는데, 칡 줄기를 아홉 번 삶고 수천 번 두드려야 한 자루의 갈필이 나온다고. 정 대표가 기획전을 준비하며 자신의 작품 중 아직 발표한 적 없는 매화 그림을 고른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직접 두들겨 만든 장지에 날콩을 활용해 콩댐을 하고 생강즙에 먹을 갈아 완성한 그의 매화도는 장인의 붓과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유 필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노동 집약적” 작품들이 한데 모인 셈이다. “지금껏 주로 선보여온 시사적이거나 메시지를 담은 작품과 달리 그저 제가 매화를 보고 좋아서, 편하게 그린 그림이에요. 붓이란 서예와 회화에 모두 관련되어 있으니 그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작품을 선택하는 게 맞겠다 싶었거든요.”
초필의 제작 과정을한눈에 보여주는 전시작품. 동물성 붓 제작의핵심이 ‘버리고 추리는것’이라면 식물성 붓은‘두드리는 것’이 가장중요하단다.
붓대에 비단실을 감고 붓꼭지에 ‘용비어천가’를새긴 유필무 필장의 작품.
억새의 줄기 끝부분을저온에 찌고 수천 번두드려서 만든 노필이정종미 대표의 매화도와정교한 조화를 이룬다.
이번 전시가 유 필장의 공방 마련을 위한 후원전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최근 저서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을 집필한 정 대표는 붓에 관한 조언을 얻기 위해 유 필장을 처음 만났고, 전통 공예 장인의 열악한 작업 환경에 책임감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화가이자 전통 재료 연구가로서 초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물론 동물 털을 활용한 모필毛筆도 다양하게 제작하지만, “평소 너무 흔해서 가치 없다 여기는 것에 어마어마한 손길을 더해 귀하게 만드는” 초필이야말로 가장 자신다운 작품이라는 것이 유 필장의 전언. “제가 10대 시절 붓에 입문했을 때부터 지켜온 초심이에요. 이 일이 참 귀하다는 믿음이 있었지요. 그래서 값싼 중국산이 밀고 들어오며 전통 붓의 제작 환경이 열악해진 뒤에도 오히려 ‘더 귀하게 작업하겠다’는 결의가 생겼고요.” 지난 50년간 끊임없이 붓을 연구하고 제작해온 그는 “아직 손도 못 대본 재료가 너무 많다”며 아이처럼 웃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작업에 매진하는 한편, 전통 붓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후학을 양성하고 기록을 남기는 일에도 열중할 계획이다.
정 대표 역시 유 필장처럼 외길에 서 있는 전통 미술 분야의 장인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형태로 갤러리를 활용하려는 포부를 밝혔다. 국악 공연 프로젝트와 협업도 추진하고 있으며, 자신의 전공 분야인 재료학에 관한 강좌도 준비 중이다. 한옥이 품에 안는 사계절 빛과 자연은 사실 화가로서 그의 궤적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한국화를 전공하다 보니 한때 동양철학에 굉장히 심취했어요. 그런데 동양철학의 정수는 결국 생명 철학이거든요. 나무 한 그루를 그려도 나무와 내가 서로 동등한 관계로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예술이 성립된다고 봐요. 생명주의 사상이 여전히 강세였다면 지금 우리 삶이 이렇게까지 척박해지지는 않았겠지요. 예술의 기능이란 그런 사라진 것을 다시 부활시키고 환기시켜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그림만이 아니라 이 공간도 제 작품이나 마찬가지예요.”
주소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68-19 문의 0507-1350-1104
- 서촌 정종미갤러리 자연과 사람, 예술이 만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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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바람이 수시로 드나드는 공간은 자연과 사람을 소통하게 한다. 선명한 계절의 자취가 시간의 밀도를 높이고 번잡한 일상 속에서 잊힌 것, 사라져가는 소중한 것을 상기시킨다. 예술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도 이와 같을 터. 정종미 작가가 서촌의 낡은 한옥을 개조해 예술을 들인 이유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