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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진이>의 장윤현 감독 진정으로 사랑하면 바람처럼 자유롭다
장윤현 감독은 전도연·한석규 주연의 영화 <접속>(1997)으로 데뷔해 <텔미썸딩>(1999), <썸>(2004)을 연출했다. 그 전에도 영화를 만들었으나 제도권 밖에서 활동했다. 대학 재학 시절 고문당하는 대학생 이야기를 그린 단편영화 <인재를 위하여>를 만들어 주목받았고,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에서 활동하며 광주시민운동을 소재로 한 <오! 꿈의 나라> 등 사회성 강한 영화를 연출했다. 돌아보면 그의 영화들은 대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소재나 관점, 영화를 풀어가는 방식이 남달랐기 때문일 테다. 그가 이번에는 백팔십도 새로운 ‘황진이’를 만들었다. 양반가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천민인 기생이 되고, 결국에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는 여인 황진이를 보여준다. 사랑을 모르던 여인이 사랑의 본질에 다다르는 아바타로 비쳐지니,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지적인 여자, 황진이
조선시대 중종 때 살았던 여인 황진이는 지금도 유명하다. 그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인과 ‘교류’할 수 있는 기생이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명월처럼 밝은 용모, 출신성분에 관한 풍문, 서경덕이나 지족선사와의 관계에 얽힌 행적, 뛰어난 시재詩才 등 전해지는 이야기는 거개가 전설적인 수준이다.하나의 사물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각각 달리 보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같은 사람도 보는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황진이는 기생으로 유명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리학의 정수를 아는 지성이기도 하다.

장윤현 감독이 그린 황진이는 지금까지 그려진 황진이와는 좀 다르다. 관료들의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는 기생의 직업적 면모는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온실 속 화초 같던 양반가 규수가 거슬릴 것 없는 바람으로 태어나는 나날을 느린 템포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특징은 영화 포스터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의 휘호로 된 제목, 흑단 같은 가채를 올린 머리에 검은 한복을 입은 송혜교의 당당한 위용, 그리고 그 위에 씌인 문구 “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의 여인”. 요염과 관능을 뿜어내는 기생 대신 세련되고 기품 있는 여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장윤현 감독을 만난 것은 영화가 개봉된 다음. 그는 주말이면 주연배우들과 함께 지역의 극장으로 무대 인사를 하러 삼남 일대를 순회하느라 바빴다.전체 제작 기간 4년, 촬영 기간 7개월, 총 제작비 1백억 원이 들어간 이 영화는 근래 만들어진 우리 영화 가운데 눈에 띄는 대작으로 꼽힌다. 북한의 소설가 홍석중 씨가 쓴 원작 소설 영화 판권을 구입한 것이 2003년. 영화를 기획하고 담양 소쇄원, 남원 광한루, 순천 선암사, 남산 한옥마을, 양평 설매재, 철원, 부안, 안동, 용인 등 남한 팔도를 돌며 촬영 장소를 물색했고 국토의 옛 정취를 간직한 곳들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그리고 우리 영화 최초로 금강산에서 촬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구룡연 무대바위, 신계천, 상팔담 정상, 관광객 입산이 금지되어 있는 배바위에서도 촬영을 했다. -13℃의 추운 날씨, 스태프 한 사람마다 50kg의 짐을 짊어지고 산을 올라가야 하는 힘든 촬영이었다.

영화 <황진이>의 스틸. 성장한 황진이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장면.

원작 소설 <황진이>를 읽고 작품이 좋아서 연출을 맡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점이 그렇게 좋던가요?”“기생 명월이 아니라 ‘진이’라는 사람을 담은 것이 좋았어요. 저도 전에는 글 쓰는 기생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지적인 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홍석중의 <황진이>를 접하자마자 단숨에 읽었다는 그는 영화를 찍는 내내 이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두 권의 책이 너덜너덜해졌다. 원작자 홍석중은 <임꺽정>을 쓴 홍명희의 손자이자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한 홍기문의 아들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 덕분인지 그의 소설 속 황진이는 실존 인물에 가장 근사하다는 평을 듣는다.그가 평범하지 않은 인물인 황진이 역에 송혜교 씨를 캐스팅한 것은 ‘기생 명월이가 아니라 진이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 (대중들이) 상상하는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느낌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송혜교 씨에게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언론 시사회 때 감독님께서 ‘배우들의 연기를 따라가며 봐달라’고 말씀하신 게 인상적이었습니다.”“배우들이 잘 보이도록 연출하기 위해 배우들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했어요. <황진이> 전에는 감독이 중심인 영화를 많이 했는데, 이 영화를 하면서는 배우들의 연기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마음을 열어야 했지요.”

“영화 속 공간이나 의상이 굉장히 현대적입니다. 의상 디자인의 변화도 그렇고, 색상도 녹색, 청색, 검은색 등으로 파격적이에요. 현대적인 이미지를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저는 ‘사극은 옛날이야기’ 라는 생각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황진이라는 인물이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대에 사는 우리의 황진이다, 하는 느낌을 내려고 도시적이고 세련되고 현대적인 이미지들을 넣었죠.”“요즘 사람 중 황진이 같은 사람으로는 누가 있을까요?”“(웃음) 많죠. 훌륭한 여성들은 다 지금의 황진이지요. 직업적 특성을 뺀 황진이요. 홍(석중)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지금은 여성의 힘이 많이 필요해요. 그래서 황진이 얘기를 한 것 같고요. 하지만 그동안에는 여성의 모습이 많이 왜곡되어 있었죠. 여성뿐 아니라 이주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선천적인 조건 때문에 소외되거나 뭔가를 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큰 손실 같아요.”

진이는 이금이의 사랑을 위해 사또에게 몸을 허락한다. 자존심마저 버린 것이다.

기실 따지고 보면 21세기를 사는 아무개와 16세기를 살았던 황진이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계에 봉착하는 경우는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영화 속 황진이는 어떤 사태가 다가오더라도 주어진 상황에 끌리지 않는다.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삶으로 실천한다. 자신의 친모가 황 씨 댁 종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기생이 되기로 결심하고, 기생이 되면서 소꿉친구이자 노비인 놈이를 첫 남자로 선택하고, 몸종 이금이의 남편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토록 싫어하던 사또 희열에게 몸을 허락한다. 처음에는 유교 사회의 기득권층인 양반의 삶을 버리고, 나중에는 권력을 조롱하며 끝까지 놓지 않았던 자존심마저 버린다.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면서 그는 자연이 된다. 오만하고 차갑던 여인은 점차 사라지고 겸손하고 따뜻한 여인으로 변화해간다.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구도자의 사랑에 이른다.

영화 속에서 황진이가 화담 서경덕과 만나는 장면은 짧다. 그러나 서경덕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황진이의 생각과 삶은 이전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확연히 달라진다. 질적인 변화가 상당하다.“이 영화에 대해 ‘황진이의 일생을 얘기하는 영화이면서도 성장을 보여주는 성장영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장 감독님께서는 이 영화를 만들며 어떤 성장을 하셨는지요?”

“그동안에는 원작 있는 작품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제 중심적인 영화를 만들다보니 같이하는 즐거움을 몰랐던 것이겠지요. <황진이>를 만들면서 머릿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면서 원작의 고민을 함께 하다 보니 생각이 더 깊어지고 원작에서 느껴지는 감동도 더 커지더라고요.”“함께했던 배우들은 어떤 성장을 했다고 보시는지요?”

“송혜교 씨는 배우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된 듯해요. 자신의 연기가 관객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배우에게 큰 무기이니 제 마음이 고맙고 뿌듯합니다. 유지태 씨는 자기 인물을 만들 수 있는 본인의 연기 스타일을 갖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세 배우 중에서 가장 기대했던 희열 역의 유승룡 씨는 창조적이고 지적인 능력을 더 키웠고요.”“감독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배우, 스태프 등의 의견을 많이 듣고 이해하면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번에도 촬영 때마다 콘티(그림을 곁들인 대본)를 준비해 갔지만 콘티대로 찍은 적은 별로 없어요.”

“나무 한 그루가 자네가 가야 할 길을 막고 있다면 어쩌겠는가?”“나무를 피해 비켜 갈 것입니다.”“비바람이 앞길을 막는다면 어쩌겠는가?”“비바람이 멎기를 기다리겠습니다.”“자네를 막고 있는 그것들에게 왜 화를 내지 않는가?”“자연의 현상임을 어찌하겠습니까.”“자연이 너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 것은 자연에게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너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삶에 연연해서 사는 너의 이기적인 마음이다.”“제가 그 마음을 버린다면 세상을 알 수 있습니까?”“세상 모두가 너와 하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리요 참모습이다.”

-영화 속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의 대화 중에서

세상 사람들은 다 멋지다
영화감독 하면 영화 마니아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그의 경우 그렇지 않다. “영화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청소년기의 그는 평범한 영화 관객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시절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부터.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앞으로 평생 동안 전기공학을 하며 열심히 살아야 하니까 1~2학년 때는 놀아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영화 동아리에 가입했다. 들어갈 때는 ‘영화를 찍으며 잘 놀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정작 활동을 시작하니 놀이 삼아 영화를 만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1986년은 시국이 혼란스러웠던 때라 대학생들의 시위와 이들의 저항을 막는 일이 수없이 일어났다.

그의 선배 한 명이 고문을 당했고, 이어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단편영화 <인재를 위하여>를 만들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고 이 경험을 통해 ‘전기를 만지면서 평생을 사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서 사람들과 같이 즐거워하고 서로 나누면서 사는 것도 좋고 가치 있는 일이겠구나’ 생각하며 직업 감독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 뜻 맞는 사람들과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를 만들어 독립영화를 제작하다 전문적인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헝가리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정작 유학을 가서는 기술적인 공부보다는 사람 공부를 많이 했다. 사회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직업으로 영화 일을 하리라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상업 영화를 찍을 생각도 하게 되었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만든 것은 <황진이>가 처음이지요?”“예, 처음이에요. 이전에는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니까 소설을 꼭 영화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작 있는 영화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뭐든지 규칙을 만든다거나 스스로 제한을 두는 것은 안 좋은 것 같아요.(웃음)”“규칙을 만들고 제한하는 것의 안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사람들은 자기를 자꾸 규정하면서 그걸 개성이라고 생각하거나 나만의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이번 영화를 하면서) 개성이 강해지고 특별해지는 것만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없애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거든요. 예를 들면, 예전의 저는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어차피 내려올 건데 왜 올라가’ 이렇게 얘기했거든요.(웃음) 그런데 금강산에 올라가 촬영하면서 ‘아하! 정말 바보 같았구나. 많은 사람들이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고, 좋아하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는데 그걸 안 하겠다고 굳이 버티면서 개성인 것처럼 얘기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음식을 비롯해서 ‘나는 뭐가 싫어’ 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많이 없애려고 해요.”“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참 멋있는 분이군요.(웃음)”

촬영 현장에서 연출하는 모습. 사진 제공 씨네 2000, 씨즈엔터테인먼트

“사람들은 다 멋집니다.(웃음) 얘기를 해보지 않고 겪어보지 않아 몰라서 그런 거죠. 자본주의는 뭐든지 상품이잖아요. 이것의 웃긴 점이, 상품을 써보기 전에 값을 지불하게 돼 있는 거예요. 써보지 않고 상품의 가치를 먼저 판단해야 돼요. 그런데 이 상품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바탕이 되는 거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보니 그런 사고방식이 인간의 삶에도 적용되는 거예요. 사람끼리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만나서 얘기해보기 전에 선험적으로 상상하고 결정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브랜드를 입고 있으면 그 브랜드 같은 사람이 되는 거고, 시장에서 산 옷을 입고 있으면 허접한 사람이라는 상상을 자꾸 하게 되죠. 그런데 그게 굉장히 큰 실수예요.”

“선험적으로 상상하고 판단하는 게 왜 실수하는 것인가요?”“그 사람을 볼 수 있는 진정한 가치,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교류하며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좋은 감성을 다 버리게 되는 것이거든요. 기회를 잃는 거고, 시간을 버리는 일이죠. 먼저 겪었던 기분 나쁜 경험들을 새로운 상황에도 적용시키는 걸 자꾸 없애야 해요.”그런 것 같다. 무의식중에 사람도 상품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영화 <황진이>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기생 황진이를 먼저 떠올리고, 다음에는 1백억짜리 영화, 송혜교가 주인공인 점을 생각하며 맘대로 영화 내용을 상상하고는 한다.

“나쁜 경험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키는 걸 버리면 무얼 얻나요?”“사는 게 재밌고 즐겁죠. 그동안 제가 그런 실수를 많이 했거든요. 영화를 찍으면서, 뭘 해서 잘되면 계속 그것만 하려고 했는데 그게 저를 더 가두고 힘들게 만들고 창조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나는 창조적이니까 모방은 않고 오로지 새것만 만든다’고 하면 외려 창조적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는 모방을 하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모방하다 보면 내가 그걸 좋아했던 이유를 생각하게 되고, 그걸 하고 싶어 했던 이유도 알게 되고, 그러다 더 붙이고 싶은 것도 떠올리게 돼요.”

뭔가를 판단하고 규칙을 정해놓으면 그 제한 안에 갇혀 살아야 한다. 스스로 규정한 것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일이 많은데, 그것도 매트릭스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 속 네오처럼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오면 참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스스로 매트릭스를 열어야 그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만.“장 감독님께서는 왜 영화를 만드시나요?”“많은 사람들과 영화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요. 내가 느끼고 상상하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관객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재밌어요. 단순한 관객들의 반응이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요. 영화의 힘이 참 놀라운 게요, 보통 흥행한 영화들의 관객 수가 3백만~4백만 명 되잖아요. 이 숫자가 프로야구 1년 관객 수와 맞먹어요. 한 편의 영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일이죠. 몇십 명의 스태프가 몇 개월에서 1년 동안 열심히 만들어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박수를 받는다면, 그것만큼 희열이 있고 재밌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안 좋은 반응도 소통인가요?”

“그럼요. 비판은 자기 가치에 대한 주장이거든요. ‘나 같은 사람도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당신 생각만 한 것 아니냐’ 하는 얘기지요. 지루하다는 의견은 그런 뜻이겠지요.”비단 영화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재밌게 만든 영화를 보며 다른 사람도 재밌게 보고 기뻐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맛있게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내가 즐겁게 부르는 노래를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들을 수 있다면.“좋은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요?”

“관객들이 잘 아는데요, 울림이 오래가는 영화인 것 같아요. 보고 나서 자꾸 생각나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 TV 채널을 돌리다가 그 영화가 나오면 잠깐이라도 보게 되는 영화가 좋은 영화겠지요.”그의 영화 철학 가운데 도드라지는 것은 영화의 중심에 영화가 아니라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소외된 사람들을 생각하고, 사랑과 소통을 영화로 이야기하고, 그 영화로 사람들과 만나고….“영화를 만들면서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좋은 연기를 담아냈을 때 제일 기뻐요. 연기자들이 생각 이상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줄 때, 스태프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좋은 장면을 찍어줄 때 굉장히 즐겁고 행복해요. 그런 점에서 <황진이>는 특별히 기억에 더 남아요. 스태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고요.”

“영화가 개봉된 지금, 소망하는 관객 수는 몇 명인가요?”“손해 보지 않게 관객이 드는 것이죠. 저희가 돈을 많이 들였기 때문에 한 4백만 명 정도 되어야 해요. 그렇게 많은 관객과 함께 나누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 그만큼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열심히 만들지만, 열심히 만든다고 꼭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어려운데요.(웃음) 행복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 일종의 마음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기준을 자기에게 두면 행복하기 어려운 것 같고요, 열어놓고 펼쳐놓으면 그건 또 굉장히 크고 많고 다양해지는 것같아요. 말이 좀 이상하네요.(웃음) 그러니까 존재하는 시간 속에서 '내가 살아 있구나, 여기에 있구나, 내가 이걸 느끼고 있구나, 하는게 행복인 것 같아요."
"지금 행복하셔요?"
"예, 저는 행복해요."

조감독 심온 씨가 말하는 장윤현
장윤현 감독과는 몇 번 작업했는지? 감독님의 세 번째 작품인 <썸>(2004)을 만들 때부터 같이 일했다. <황진이>의 경우 감독님께서 황진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하고 기대되었라.

그가 <황진이>를 촬영하는 동안 스태프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회식을 하거나 식사 때 건배하면서 외쳤던 말이 아닐까? 그때 하신 말씀이 “황진이를 사랑합니다!”였다. <썸>을 만들 때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스태프들에게 <황진이>는 ‘이 영화가 잘되고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이 영화를 함께 만든 분들이 다 함께 노력하고 최선으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현장에서 그가 소통하는 방식은? 어떤 사안에 대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존중한다. 그리고 그 의견들 중에서 감독님의 방향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의견을 반영한다. 권위 의식이 없고 현장에서 큰 소리 치는 법이 없어서 스태프들이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편이었다.

<황진이>의 등장 인물 중 그와 닮은 인물은? 항상 시대적으로 좀 앞서 가시는 분 같고. 순간순간 과감하게 결단하시고 쉬운 선택은 잘 안 하시는 모습이 황진이 같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