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겼다’는 유전적 선물 덕에 빠르게 유명해진 김충재 작가는 미술계 신예다. 하지만 데뷔 무대가 전시장이 아닌 브라운관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정체성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한 그. 무엇보다 깊어지기를 갈구하고 자신을 날카롭게 다듬어가기 위한 절제의 일상을 보내는 김충재 작가는 예술가로서 하루하루 성장해가고 있다. 그가 만나고 싶다 청한 작가가 양혜규라는 사실도 그의 지향점을 알려주는 듯했다. “장르나 분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모습이 멋있다 생각했어요. 저도 그렇게 확장되고 싶거든요. 양혜규 작가님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의 작품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요.”
뉴욕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등 전 세계 권위 있는 미술관에서 초청 전시를 해온 세계적 예술가 양혜규 작가는 이 만남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직업상 후배, 선배는 없다고 생각해요. 시대나 지역도 존재하지 않는 직업인데 어떻게 선후배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번 인터뷰의 특징을 설명하자 돌아온 양혜규 작가의 답이었다. 미술이라는 이름 아래 작가의 작업은 사회나 역사의 평가를 받는 것으로, 동시대에 활동하는 한 결국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시니어 아티스트라는 말은 해요.
원로 작가. 하지만 주니어 아티스트는 존재하지 않지요. 성공한 작가라는 표현도 참 어폐가 있어요. 성공이 뭔데요? 단지 명망이 있다? 과연 예술가의 성공은 생애 기간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일까요?” 그 어떤 질문을 던지든 본질적 정의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양혜규 작가. 때마침 전시를 앞두고 한국을 방문한 아주 절묘한 타이밍은 인터뷰가 성사되는 데 큰 몫을 했고, 이렇게 두 매력 있는 예술가는 한자리에 모였다.
양혜규 작가는 서울대학교 조소학과 졸업 후 독일 슈테델슐레 순수미술학부에서 유학, 현재 동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적 사유의 내용을 설치 작업으로 선보이는 그는 독보적 독창성으로 예술계에 반향을 일으켜왔으며, 현대미술계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평가받고 있다. 9월 30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전시를 개최 한다.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2017). 사진 Jens Ziehe
‘소리 나는 가물-솥 겹 솥’(2020). 사진 명이식 ⓒ양혜규, 국립현대미술관
위기는 경력을 주춤하게 할 수 있지만 생명력을 꺾을 수는 없다
김충재(이하 김) 어수선한 요즘,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양혜규(이하 양) 많은 부분에서 갑갑함을 느끼고 변화도 겪고 있어요. 강연은 온라인, 전시는 미뤄지고, 오프닝 세리머니는 없어질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문화가 달라지는 거지 전시라는 형태가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코로나19가 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봤어요. 저는 밀레니엄 시대에 활동하기 시작한 ‘인터내셔널리제이션 작가’로 분류되죠. 이런 팽창주의적 세계화 시대가 저의 배경이 었다면, 코로나19를 통해서는 ‘인터널리제이션’, 즉 내면화의 국면을 맞는 것 같아요. 인류도 마찬가지죠. 세계화가 가져온 장점을 부정하고 오히려 주변, 지역, 심리, 정서적 문제를 더 돌보는 시대가 도래한 듯해요. 충재 씨는 어떠세요?
김 내면화라는 말씀에 공감이 가요. 국제 전시 일정이 취소되고, 시간이 많이 주어지면서 작업실에서 그동안 미뤄둔 정리도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양 시대에 따라 예술가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감염병 스패니시 플루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을 때 작가들은 무엇을 했나 찾아봤어요. 아이러니컬하게도 많은 혁신이 일어더라고요. 비참했을 때 무언가 생성되기도 하는 거죠. 정신은 꺾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사상가적 면모가 중요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불안의 시대, 두려움에 떠느냐 건설적 회의를 해보느냐, 결국 생명력이 관건 아닐까요? 학생들과 수업하다보면, “앞으로 전시도 줄고 미술관도 도산한다고 하는데, 예술가의 역할이 뭐냐”는 질문이 절로 나오죠.
김 전 학생들과 가까운 입장이에요. 막막함을 느끼죠. 또래 작가들과 푸념도 하고요. 결국은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각자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 가느냐는 본인의 숙제인 것 같아요. 선생님 말씀대로 생명력이 있다면 생존할 수 있을 테니, 우선 생존해나가는 것 자체가 예술가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타고난 생김새보다 삶의 태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매력을 좌우한다
양 대중적 지명도가 엄청나다고 들었어요.
김 처음부터 방송에 나가야지 해서 나간 게 아니라, 친구 도와주려고 나갔다가 얼떨결에 유명해졌어요. 하지만 제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아직 모르는 분도 많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응원해주시는 만큼 좋은 작업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죠. 예술가 중에는 앤디 워홀처럼 스타성을 잘 이용한 예도 많은데, 저는 제 자신의 성향에 대해 고민하며 찾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양 작가한테 유명세가 따라왔을 때 어떻게 핸들링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앤디 워홀 얘기를 하셨는데, 자극적이고 도전적으로 이용해서 돌려줄 수 있다면 좋은 거고, 아니면 천박해질 수 있겠죠.
김 많은 분이 제 외모를 득으로 봐주시기 때문에 저도 주어진 것에 영리하게 대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외모는 상대적인 거잖아요. 결국 아름다움은 본인이 정의하는 것인데, 저는 작가라면 오라aura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처럼요. 또 수백 년 전 대가들의 흑백 사진만 봐도 느껴지는 강한 생명력. 제가 추구하고 노력해나가고 싶은 외관은 그런 오라를 지니는 것이에요.
양 득을 실實하게 만드시면 될 것 같아요. 이미 하신 말을 제가 워딩만 바꾸어 다시 말하자면, 외모가 태도를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죠. 언어를 예로 들면, 말을 잘하느냐보다 무슨 의견을 가지느냐가 더 중요하잖아요. 외국에서 소통할 때도 말 속에 들어 있는 생각과 관점이 중요하지, 발음이 얼마나 아름답냐는 중요하지 않지요.
김충재 작가는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홍익대학교 국제 디자인 전문 대학원에서 제품 디자인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충재화실’이라는 미술 토크 쇼를 진행했으며, 2020 대한민국 퍼스트 브랜드 아트테이너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삼성전자, 캐딜락 코리아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 프로젝트를 선보여왔으며, 최근엔 조형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Newborn’(2020).
‘45 Series: Chair’(2019).
인풋과 아웃풋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김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 그래서 작가이기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으셨나요?
양 고갈이라는 말은 ‘번 아웃burn out’과 ‘이그저스천exhaustion’ 두 가지로 쓸 수 있을 텐데, 저는 이그저스천한 상태의 고갈은 긍정적으로 봐요. 너무 몰두해 밤을 새우고 탈진한 상태는 행복한 거잖아요. 하지만 번 아웃은 일종의 피로 사회에서 오는 거겠죠? 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안증 때문에 지나치게 하는 상황이나 쫓겨서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을 알고, 자신의 열정으로 일하면 지나치더라도 병이 되진 않죠. 물리적으로 탈이 날 수는 있을 지라도.
김 아이디어의 고갈 때문에 벽에 부딪힌 적은요?
양 얄밉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런 적은 없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요, 작가는 아웃풋을 내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인풋하는 것이 결국 삶의 밸런스인 것 같아요. 저에게는 전시 개최가 양분을 섭취하는 계기예요. 전시를 아웃풋 형태로 했으면 이렇게 많이 못 했을 텐데, 전시가 연구도 하고 성장도 하는 계기가 되죠. 지금까지는 그랬어요.
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곧 전시를 하시죠? 기대돼요.
양 한국에서 네 번째 여는 개인전이고, 정부 기관에서 하는 전시는 처음이에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선정 기념 전시인데, 제목은 예요. 2001년에 <공기와 물>이라는 전시를 했는데 그걸 화학 공식으로 바꾼 거죠. 당시 이 주제는 주유소에서 가져왔어요. 공기와 물은 우리에게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물질이지만, 주유소라는 특수 공간 안에서는 주변 물질이 되죠. 이렇게 문맥에 의해 의미가 변환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제 시대도 바뀌었고 나도 성장했지만, 여전히 같은 흐름에 있는 거잖아요. 역사성을 띠는 제목인 셈이죠. 이해하기 쉽고 부르기 쉽게 ‘공기와 물’로 풀어서 써야 할까요? 저에게는 진화의 문제인데 말이죠.
김 저는 가 더 좋은데요.
양 다행이네요. 원소 상태에서는 없다가 몇 개가 조합됐을 때 의미가 생성되는 현상을 창발성이라고 해요. 어디서부터 창발성이 생기느냐 하는 시점과 단위는 종마다 다르죠. 전시도 개별 작업을 모아서 의미를 생성시키는 거잖아요. 혹시 전시 계획이 있으신가요?
김 코로나19로 자의 반 타의 반 인풋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작업실을 확장해 오피스 겸 작은 쇼룸을 만들려고 해요. 매일 전시를 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요. 그 공간을 구상하고 채워가는 게 올해의 목표입니다.
- 예술가 양혜규&김충재 화두를 던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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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세상을 향한 이야기를 담아 물질을 만들어 낸다. 그게 회화든, 조소든, 복합 미디어이든 형태 이면에 내포한 작가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전시 관람의 목적일 터. ‘미대 오빠’라 불리며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김충재 작가와 세계적 스타 아티스트 양혜규의 진중한 대화는 또 다른 형태의 전시와 다름없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