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나는 캐나다에 있었다. 고고한 설산으로 둘러싸인 밴쿠버를 경유해 북미 대륙 최북단의 옐로나이프로 떠난 여행. 눈과 비를 수시로 맞고, 밤새 영하 30℃의 혹한 속에서 떨고, 그러다 찬연한 빛의 장막과 맞닥뜨린 몇 번의 낮과 밤. 출발이 한 달만 늦춰졌다면 결코 떠나지 못했을 그 여정이 사실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하다. 다만 국경이 굳게 닫히고 일상에서 여행이 사라진 반년, 그 예측하지 못한 침묵의 시간이 우리에게 여행의 의미를 되짚게 한 것처럼, 봉인해둔 사진을 꺼내 하나하나 펼치고 고르는 과정이 내겐 진심으로 위로가 되었다. 그 겨울, 섬광처럼 달음질치던 기억들. 인간의 어떤 수식어조차 무용하게 만들던 그 깊고 먹먹한 겨울 나라의 풍광이 이 여름, 당신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길.
옐로나이프에 도착한 밤, 곧장 시내 남쪽의 캄 호수 기슭으로 달려가 새벽녘까지 오로라를 기다렸다. 티피 안팎을 오가는 사이, 어느새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됐다.
티피는 북미 원주민의 전통 방식으로 만든 원뿔 형태의 천막을 일컫는다. 언뜻 엉성해 보이지만 보온 효과만큼은 뛰어나다.
옐로나이프에서 오로라 투어를 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장작불을 만날 수 있다. 추운 날 나무 꼬챙이에 꽂아 구워 먹는 마시멜로도 별미다.
옐로나이프에 대한 첫인상은 극지의 겨울밤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오후 7시 20분경, 온통 눈으로 뒤덮인 캐나다 최북단의 밤은 검고 희고 가로등 빛에 부딪혀 반짝거렸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창백한 하늘엔 소낙눈이 흩날렸고, 별빛 한 줌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니구나,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인천에서 밴쿠버까지 열 시간, 밴쿠버에서 옐로나이프까지 다시 세 시간 30분. 비행기와 공항에서 꼬박 하루를 소진하며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곳 옐로나이프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다. 언젠가 북유럽의 피오르 지대를 밤새도록 헤맨 끝에 ‘아주 미세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밤하늘’을 본 뒤, 그러고는 ‘어쨌든 오로라를 봤다’며 씁쓸한 마음으로 회고한 뒤, 사실 나는 꽤 오랜 시간 옐로나이프로의 여정을 꿈꿔왔다. 미항공우주국이 인정한 최고의 오로라 관측지, 3박 이상 머물 경우 관측 확률이 95%가 넘는다는 이 아름다운 모험가의 땅에선 적어도 내가 5%에 속하는 불운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객실 침대에 엉덩이 한번 못 붙이고 곧장 캄 호수Kam Lake 기슭으로 달려간 첫날 밤, 오로라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둘째 날 밤이 되자 그럭저럭 평온을 유지하던 마음에도 불안이 움텄다. 휴대폰이 알려준 날씨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눈 아니면 구름. 낮에도 날씨가 썩 좋지 않았는데, 밤 10시 30분쯤 오로라 스테이션Aurora Station에 도착하니 사방으로 구름이 짙었다. 30분, 한 시간,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혹독한 극지의 추위에 마음이 얼어붙었다. 한 시간 30분, 두 시간, 완전히 충전해온 휴대폰이 두 시간 만에 방전됐다. 두 시간 30분. 결국 무력감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실내로 들어서는 찰나, 건물 옥상 위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터졌다!” 생애 이보다 드라마틱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갑작스레 구름이 걷힌 밤하늘에 한낮의 모래처럼 별이 반짝거렸고, 멀리 눈 덮인 전나무 숲 위로 희미한 녹색 빛이 길게 꼬리를 빼며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육안으로도 선명해진 오로라는 마치 거대한 날짐승처럼 밤하늘을 깊이 가로질렀다. 동쪽으로 향하다 갑자기 남서쪽으로 갈라졌고,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넘어왔다. 인생의 남은 운을 다 끌어다 쓴 느낌으로 나는 이 황홀한 빛의 군무를 감상했다. 새벽 2시. 여전히 밤공기가 얼음 같지만 더는 춥지 않았다.
현지인이 추천하는 옐로나이프의 대표 맛집은 ‘블룩스 비스트로Bullock’s Bistro’. 그레이트 슬레이브 호수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피시앤칩스와 버펄로 스테이크가 인기 메뉴다.
마지막 밤, 오로라 빌리지의 오두막 위로 선명한 녹색 오로라가 피어올랐다.
오로라 빌리지의 광대한 설원 위로 극지의 해가 저물고 있다.
극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설원에서 즐기는 각종 액티비티. 개썰매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체험이다.
일찌감치 오로라와 만난 행운은 여행자의 남은 시간을 한결 여유롭게 만들어줬다. 낮에는 도시 곳곳을 쏘다니거나 현지 어부의 얼음낚시를 체험했고, 해가 지면 또다시 오로라 투어에 나섰다. 셋째 날 밤을 보낸 현지 가이드 트레이시의 오두막에선 뜨거운 생선 수프와 코코아, 배넉(오트밀이나 보릿가루로 만든 캐나다 원주민의 전통 빵)을 맛봤다. 진눈깨비 섞인 바람이 쉴 새 없이 창문을 때리던 그 밤, 하늘은 내내 깜깜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마지막 밤, 오로라는 다시 찾아왔다. 낮부터 오로라 빌리지Aurora Village에서 개썰매도 타고 설원 산책도 즐기며 극지의 겨울 풍광을 만끽한 뒤였다. 밤이 깊도록 오로라가 뜨지 않아 고심 끝에 숙소에 돌아가기로 결정한 직후, 그러니까 옐로나이프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던 그 시각, 가느다란 빛줄기가 수풀 너머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에 오르려던 인파가 저마다 카메라를 꺼내든 사이, 오로라는 10여 분쯤 밤하늘을 휘저으며 홀로 춤을 추었다. 지금도 가끔씩 떠오르는 그 짧지만 강렬한 순간. 오길 잘했다 끊임없이 되뇌던 그 밤의 짙은 초록빛은 옐로나이프가 이방인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 같았다.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리지 너머 깊은 협곡과 열대우림의 풍광이 수려하다.
밴쿠버의 발상지인 개스타운은 미식가의 성지이자 커피 애호가들의 성지 이기도 하다. 이곳은 브런치 카페로 유명한 ‘더 버즈&더 비츠’.
15분마다 증기를 뿜어내는 개스타운의 명물 증기 시계.
그랜빌 아일랜드에는 가까운 산지에서 매일 아침 실어 나르는 농산물과 해산물, 각종 가공식품이 가득하다.
그라우스 마운틴 정상에 서면 밴쿠버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녹색 도시가 건넨 쉼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온화한 항구도시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어떤 여행은 종종 선물 같은 ‘추가 시간’이 주어지는데, 옐로나이프 여행자에겐 경유지인 밴쿠버가 그런 곳이다. 바다와 숲, 마천루로 감싸인 이 캐나다 서부의 최대 도시는 산책하기 좋은 거리와 개성 강한 지역 커뮤니티, 밀도 높은 도심 속 녹지 공간으로 워낙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마음을 끈 건 한겨울에도 영상을 웃도는 온난한 기후. 매일 밤 갑옷 같은 방한복 차림으로 오로라를 기다리느라 지친 몸을 녹이고, 극지방에서는 찾기 힘든 세련된 카페 거리를 누비며, 여전히 초록이 생생한 근교 원시림에서 마음껏 삼림욕도 즐기고 싶었다.
그리하여 밴쿠버에서 보낸 이틀은 완벽히 무계획적인 쉼의 시간이었다. 비가 내리다 그치고, 하늘이 말갛게 갰다가 어둠침침해지기를 반복했지만, 이미 대륙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 뒤였다. 비가 내리면 구시가인 개스타운의 운치 있는 카페에서 하염없이 빗소리를 감상했고, 비가 그치면 스탠리 파크를 산책하거나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리지Capilano Suspension Bridge로 달려가 협곡의 짙푸른 녹음을 만끽했다. 도시 최고의 퍼블릭 마켓인 그랜빌 아일랜드Granville Island에는 가성비 좋은 맛집이며 장인의 식료품점이 가득했고, 그라우스 마운틴Grouse Mountain 정상에서 바라본 도시는 낮보다 밤에 더 아름다웠다. 고작 이틀뿐인 여정이었지만, 매년 세계적 컨설팅 기업들이 ‘살기 좋은 도시’ 리스트를 발표할 때마다 이 도시가 빠지지 않고 세계 10위권에 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밴쿠버는 세련된 대도시의 라이프스타일과 전원도시의 차분한 정서를 동시에 지닌 곳이었다. 언제든 뛰어들어 푹 파묻힐 수 있는 도심부의 거대한 숲과 공원들, 지칠 때까지 걷고 싶은 19세기풍의 우아한 거리와 풍성한 해산물을 기반으로 발달한 미식까지, 밴쿠버의 모든 것이 한겨울 여행자의 몸과 마음을 다독였다.
- 행복으로 떠나요 북극의 빛, 오로라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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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의 살얼음 같은 공기, 적요한 설원과 순백의 전나무 숲을 파고드는 일몰, 그리고 까만 밤하늘 위로 신의 옷자락처럼 너울대는 푸른빛의 장막. 여름의 한가운데서 꺼낸 겨울 캐나다의 가장 눈부신 풍광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