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동안 쌓인 내공이 묻어나는 허름한 냉면 집에 한 남자가 들어온다. 평양 냉면 한 그릇을 주문한다. 5분이 채 안 되어 메밀 우린 물 한 컵과 함께 냉면이 나왔다. 두 손으로 그릇을 받친 채 경건한 자세로 국물 맛을 본 다음 식초와 겨자를 넣고 고명을 차가운 육수 속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는다. 젓가락으로 고루 섞은 뒤 면 한 가닥을 들어 입에 넣고 지그시 씹는 그의 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인다. 여기까지 묘사한 일련의 과정은 면 전문 브랜드 면사랑의 정세장 대표가 냉면을 먹을 때의 모습이다. 대한민국에 그보다 면을 많이 먹어본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면이 좋아서 이탈리아와 일본 등으로 미식 여행을 다니고 10여 년째 일주일에 서너 번은 면으로 식사한다. 자사에서 나오는 신제품을 시식할 때는 소스나 국물 없이 면만 5~6차례를 먹지만, 그 밋밋한 맛조차도 그는 질리지 않는단다. 정세장 씨가 한 종류의 면만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냉면과 우동은 물론, 소바, 막국수, 자장면, 짬뽕, 칼국수 등 면으로 된 모든 요리를 즐긴다.
면은 내 운명
정세장 씨가 면사랑을 설립한 지 올해로 꼭 14년째다. 이전에 그는 대기업 전자 회사의 해외영업본부에 근무했었다. 해외 출장을 밥 먹듯이 다녔는데 당시 한국산 가전제품의 인기가 꽤 높았다. 덕분에 어디를 가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 대접을 받았다. “7년 동안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각 나라의 다양한 음식 문화를 많이 접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 하고 있는 음식 사업에 큰 도움이 됩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메뉴가 면이더라고요. 신기한 것은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면발을 최고로 치는 것은 어디든 똑같다는 것이죠.” 각국의 면 요리를 맛보고 매력을 느꼈으며 면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때였다. 대기업의 조직 구조가 워낙 크고 복잡하다 보니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제품에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답답했다. 그래서 막연히 생각하던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고 시장의 반응을 곧바로 볼 수 있는 제조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그가 좋아하는 면이라면 자신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는 면에 더욱 매달리기 시작했다. 원산지에서 만든 듯, 제대로 된 재료로 만든 면을 선보이고 싶었다. 곧바로 붓기만 하면 완성되는 물냉면 육수를 업계 최초로 소개한 것도, 건조된 면이 아닌 생면을 내놓은 것도 그런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슈퍼마켓 진열대에 가보면 생면과 소스가 들어 있는 냉장면 상품이 여럿이지만, 면사랑이 처음으로 선보였던 2000년경만 해도 그런 제품은 파격적이었다. 면사랑에서는 우동과 스파게티, 자장과 짬봉, 냉면, 쫄면 등 다양한 면 제품이 나온다. 제품마다 면의 고유한 특성에 맞게 재료와 만드는 법을 달리했다. 스파게티의 경우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듀럼밀 세몰리나 밀가루를 이용한 면을, 냉면은 메밀의 원산지인 내몽골에서 들여온 진짜배기 메밀만을 고집한다. 필요하다면 이탈리아나 일본에서 맛 고문을 모셔오기도 한다.
1 면사랑 레스토랑에서 면을 삶는 정세장 대표. 이곳에서는 수분 함유율이 높은 생면을 사용한 신선한 면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우동과 칼국수, 잔치국수는 물론 베트남 쌀국수, 중식 스타일의 볶음우동 등 세계 곳곳의 면 요리가 있다.
2 정세장 씨는 면을 정말 좋아한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면을 먹지만 여전히 면 앞에 앉으면 설레는 표정을 감출 수 없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국물까지 후루룩 들이켠다.
국수 가락에 따라 즐기는 법도 다르다
10여 년 동안 일주일에 서너 번씩 다양한 면을 맛보다 보니 면마다 먹는 방법이 있더란다. 기본적으로 면 요리는 면 고유의 맛과 질감을 즐겨야 한다. 유명한 면집의 양념이나 소스가 순하고 담백한 것도 면 고유의 맛을 해치지 않기 위함이다. “메밀 가루를 반죽하여 만든 평양 냉면은 이로 뚝뚝 끊어 먹는 맛으로 먹는 것이니 되도록 가위질을 하지 않습니다. 우동 면발은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이 있어야 하고, 막국수는 매콤한 양념과 어우러지는 구수한 메밀 향과 투박한 식감이 핵심이죠.” 이처럼 면에 대한 확실한 철학이 있는 만큼 정세장 대표가 애용하는 단골집도 믿음이 간다.
칼국수는 집 근처에 있는 연희칼국수집(02-333-3955)에서 주로 먹는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지금은 둘 다 대학생)부터 자주 찾는 집인데 부드러운 면발이 술술 넘어간다. 제대로 된 안동 국수는 압구정동에 있는 안동국시집(02-548-4986)이 최고. 반죽에 콩가루를 30%나 넣어 씹을수록 고소하다.
냉면집은 충무로에 있는 필동면옥(02-2266-2611)을 꼽는다. 차갑게 식혀서 편으로 썬 제육과 함께 먹으면 왕후의 식탁이 부럽지 않다. 송송 썬 파를 고명으로 얹은 필동면옥 냉면은 맑지만 깊은 맛을 품고 있는 육수가 일품이다. 우동이나 소바 잘하는 집을 물으니 한동안 망설이다 1년에 두어 번 일본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을 소개한다.
1 볼로네이즈 스파게티
토마토와 레드 와인을 이용한 소스를 곁들인 볼로네이즈 스파게티. 양파와 당근, 셀러리, 마늘 등을 잘게 다진 다음 소스 팬에 올리브오일을 둘러 달달 볶는다. 채소가 갈색으로 익으면 다진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넣고 볶다가 토마토 페이스트와 토마토 홀을 넣고 계속 볶는다. 밀가루와 설탕, 소금, 월계수 잎, 바질을 넣고 젓다가 국물이 줄어들면 레드 와인과 치킨스톡을 넣고 뭉근하게 끓이면 완성이다. 면은 끓는 물에 10분 동안 삶는다. 프라이팬에 준비해놓은 소스와 파르메산 치즈 가루, 면을 넣고 함께 버무린 다음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하면 끝.
2 녹차메밀소바
도쿄 야부소바집에서 공수해온 츠유로 자주 해 먹는 요리. 츠유가 없다면 면사랑의 소바 장국으로 대신해도 된다. 소바 장국과 얼음물을 1:8의 비율로 섞어 국물을 준비한다. 녹차메밀 면(면사랑 제품)은 끓는 물에 4분 30초 동안 삶아 얼음물에 헹구어 체에 밭쳐둔다. 그릇에 물기가 빠진 메밀면을 돌려 담고 희석한 장국을 부은 다음 송송 썬 쪽파와 고추냉이소스, 깨, 무순, 무 간 것을 올리면 된다.
3 비벼 먹는 냉우동
녹차메밀소바가 장국에 면을 말아 먹는 격이라면 냉우동 요리는 우동에 소바 장국을 올려 비벼 먹는 요리다. 소바 장국과 얼음물을 1:3의 비율로 섞는다. 끓는 물에 우동 면을 잘 삶아 물기를 없애고 얼음물에 담가 차갑게 둔다. 우동 면을 그릇에 담고 레몬과 무즙, 생강 간 것, 깨를 올려 장국을 곁들여 낸다.
4 면사랑 국수
면사랑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 ‘면사랑 국수’. 멸치 육수에 다양한 채소, 등심 샤브샤브 고기를 우려낸 국물 맛이 시원하다.
국수 요리 성공하려면, 끓이고 헹구는 타이밍을 기억하라
1 생칼국수 면 6분 30초. 둥글 넓적한 생칼국수 면은 면의 굵기가 굵어 삶는 시간이 길다. 치지 않기 위함이다.
2 생소면 3분 30초. 건조면에 비해 수분함유율이 높아 매우 신선하다. 자장면으로도 이용.
3 물·비빔 냉면용 면 40~50초. 고구마전분으로 만들어 시간을 초과하면 면이 풀어진다.
4 스파게티 면 표기보다 1~2분 더. 뒷면에 표시된 시간보다 더 끓여야 한국인 입맛에 맞는다.
5 우동 면 풀어질 때까지. 우동 면은 익혀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열기만 가한다.
6 건소면 3분 30초. 끓는 물에 익힌 다음 찬물에 한번 헹구면 한결 탱탱해진다.
1 가족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하는 시간이 적은 것이 현실이다. 면사랑의 정세장 대표는 아무리 바빠도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최우선이다.
2, 3 부인 함영림 씨와 딸 수진 씨는 정세장 대표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음식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4 하루 중 한 끼는 반드시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 정세장 대표가 늦게 퇴근을 할 경우에도 식구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나눈다. 특히 미식은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소재. 아쉽게도 막내아들 수홍 씨는 학교 수업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진정 소바를 좋아하는 이라면 일본 도쿄 중심가의 간다 지역에 있는 야부소바집(やぶそば 03-325-0287)에 꼭 가보세요. 1백30년 된 집인데 소바 맛이 예술입니다. 겉껍데기만 벗겨낸 메밀을 갈아 만들어 특유의 향이 강한 편이지요.” 대대로 야부소바집의 카운터에는 이 집안 며느리들이 앉아서 주문을 받는다. 받은 주문을 주방에 알려줄 때 “자아루우~~소오~바 이~~인부운” 이런 식의 옛날 노랫가락으로 주문을 넣는 모습도 이국적인 볼거리. 우동 집을 논할 때 일본 사누키 지역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가가와 현의 옛 지명이 사누키입니다. 인구가 1백만 명이 안 되는데 우동 집이 8백 개가 넘어요. 관광객이 모일 정도죠. 제가 추천하는 우동 집은 두 곳입니다. 야마고에(山越 087-878-0420)와 오가타야(少縣家 087-779-2262). 그 많은 우동 집 중에서 단연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야마고에는 아주 뜨거운 우동 면에 달걀노른자와 산마 간 것, 츠유(우동이나 소바용 국물)를 얹어 비벼 먹는다. 이때 곱게 다진 파와 다진 생강을 곁들인다. 반면 오가타야의 우동은 ‘무지무지’ 차갑다. 손님이 직접 무즙을 갈아 올리고 생강 간 것과 실파, 츠유를 넣어 비벼 먹으면 된다. 막국수도 그가 즐겨 먹는 요리. 가장 좋아하는 곳은 춘천에 있는 샘밭막국수(033-242-1712) 집이다. 직접 제분한 메밀가루를 사용해 제대로 된 메밀 맛을 낸다.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맛집 순례 정세장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식구들과 저녁을 먹을 때다. “아빠가 퇴근이 늦어서 혼자 드실 때가 많아요. 그동안 저와 엄마, 동생도 옆에 앉아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죠. 특히 음식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딸 수진 씨 역시 아빠처럼 음식에 관심이 많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때때로 미식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집안에 경사가 있으면 이따금 홍콩으로 (오로지 먹기 위해) 여행을 간다. 항상 그 나라 음식만을 먹는 것이 철칙이며 장기간 머물더라도 한식은 가급적 안 사먹는다. 식구 수가 적지만 되도록 다양한 종류를 주문해서 맛을 볼 정도로 새로운 맛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하다. 정세장 대표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셰프에게 물어보고 기록한다. 그리고 가장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해 궁리한다. 미식 여행의 보람을 느끼는 때도 이 순간이다. 그는 가족들과 또는 혼자서 미식 여행을 다닐 때면 슈퍼마켓이나 맛집에서 판매하는 면이나 소스 등도 한 짐 가득 사서 돌아온다. 그의 부엌 찬장에는 세계 각국에서 사 온 면과 소스, 육수 등이 가득하다. 일일이 하나하나 조리해가면서 면사랑 제품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한다. 그러다 보니 요리 솜씨도 나날이 발전한다고.
딸 수진 씨와 아들 수홍 씨가 좋아하는 아빠가 만든 요리로는 스파게티와 녹차메밀소바, 냉우동이 있다. 스파게티는 면사랑에서 파스타 고문을 맡고 있는 이탈리아인 귀도 쿠리아트 씨에게 받은 레시피로 만든다. 녹차메밀소바는 메밀녹차면과 메밀 장국(모두 면사랑 제품)으로 손쉽게 만드는 요리. 냉우동 요리는 면 자체를 차갑게 먹는 것이 포인트다. 면을 끓인 다음 찬물에 헹굴 때, 빡빡 문지르면서 면 표면에 있는 전분을 모두 씻어내야 면발이 쫄깃하다. 마지막으로 얼음물에 담그면 금상첨화. 일본 출장 가서 챙겨 온 츠유와 송송 썬 실파, 레몬즙을 넣고 비벼 먹으면 된다. 자, 이제까지 15년 동안 오직 면만 파고든, 면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열정을 이야기했다. 면사랑에서 나오는 제품이 ‘현지에서 먹는 듯, 본래 면 맛의 특징을 잘 살렸다’는 호평을 받는 것도 정세장 대표의 이런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레디메이드 제품이지만 정통의 맛을 추구하여, 그 나라 요리 본래의 맛을 볼 수 있다는 것. 이는 한 사람의 노력과 애정, 그리고 끊임없는 연구의 결과다. 그에게 전염돼서인지 당장 면 요리 한그릇이 먹고 싶다.
1, 3 이탈리아와 일본 등으로 면 여행을 다닐 때마다 하나 둘 모아온 면과 소스. 집에서 일일이 만들어보면서 자사 제품과 비교한다.
2 사누키 지역에 있는 우동 집들을 다룬 <면통단의 사누키 우동을 샅샅이 뒤지다>. 사누키 면을 좋아하는 이들이 그 지역을 ‘순례’하면서 만든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