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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 희수마자 곁으로 돌아온 연어 시인 안도현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로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인 안도현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스로 연어가 되어 모천母川으로 회귀한 것이다. 누가 가장 반갑게 그이를 맞아주었을까? 고향 마을에 남아 농사짓던 몇몇 옛 동무일까? 살뜰하게 서로 보살펴주던 친척들일까?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던 몇백 년 묵은 정자나무일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요즘엔 눈만 뜨면 상전아파트, 벽해빌라가 들어서곤 하는데 그이의 고향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 안도현은 어린 시절 뛰놀던 내성천 근처에 집을 짓고 집필실을 꾸렸다. 햇살이 눈부신 한낮, 아무 의자에 편히 앉아 책 읽기 좋은 곳이다.
시인으로, 동화 작가로, 산문가로, 선생님으로, 대학교수로 문단과 교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안도현이 고향으로 돌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도연명처럼 세속에 염증을 느껴 돌아와 부르는 ‘귀거래사’일까? 세상에서 뜻한 바를 모두 이루고 고향에서 꿈꾸는 ‘안빈낙도’일까? 그이를 만나러 서울에서 예천으로 달려갔다. 산이 막으면 명치를 뚫어 터널을 만들고, 강이 막으면 고가를 놓아 거리를 좁히는 첨단 도로 건설로 한껏 가까워졌다지만, 그이가 돌아온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마을까지는 네 시간이 족히 걸렸다. 그이의 고향 마을이 가까워왔을 때 나는 창밖에 비치는 풍경에 환호성을 질렀다. 내성천의 희디흰 모래사장이 6월의 햇빛을 눈부시게 되비추며 방문객을 맞아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이의 귀향을 가장 먼저 반겨준 것도 저 내성천 모래사장의 흰 발꿈치였을 것이다.


새와 나무와 돌과 시인의 집
시인의 집은 내성천 변의 논과 논 사이로 난 작은 시멘트 포장도로 끝에 있었다. 녹음이 짙어가는 산자락이 둥글게 에워싼 집터는 아늑해 보였다. 새로 지은 시옷 자 지붕을 인 집 한 채가 그곳에 있었다. 시인과 시인의 아내가 마중을 나왔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정원부터 둘러보았다. 새집은 나지막한 흰 돌담을 두르고 있었는데, 정교하게 쌓지 않아서 편안해 보였다. 돌과 돌 사이로 다람쥐가 세 들거나, 구렁이나 두꺼비가 들어 지킴이를 자처할 만했다. 그러잖아도 이 집에는 고라니와 멧토끼가 집들이 삼아 다녀갔다고 들었다. 물까치와 비둘기가 나무에서 날아올랐고, 멀리서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가 났다. 네 음절로 된 저 새의 울음소리를 어떤 이는 “어절씨고!”라고 듣고, 어떤 이는 “홀딱벗고~”라고 듣는다고 한다. 미얀마나 인도네시아에서 날아온 저 철새가 울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는 여름이다.

정원에는 복사나무, 화살나무, 인동, 단풍, 황매화 등 어린 묘목을 심어놓았다. 요즘 얻은 손녀 ‘슬라’를 위해 이끼 정원도 아담하게 꾸며놓았으나, 아직은 새 터에 적응하느라 힘겨워 보인다. 건축이든 정원이든 마지막으로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람과 비의 모습으로 다듬는 시간의 손길이다. 마당 어귀에 마련한 텃밭이 제법 볼만했다. 얼갈이배추는 당장 뽑아서 김치를 담가도 되겠다. 땅콩과 아욱과 옥수수와 들깨와 가지와 고구마와 상추가 왕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텃밭 농사의 비결을 물으니 그이가 말한다.

“전라도 말로 ‘냅싸도 농법’입니다.” 웃음이 나왔다. ‘유기遺棄 농법’이자 ‘유기有機 농법’이다. 충청도 말로 하면 ‘내비둬 농법’쯤 될 터이다. 쑥갓은 식용이 아니라 나비를 부르는 용도로 심은 듯하다. 대궁마다 꽃봉오리들이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흙벽돌로 지은 헛간 그늘에서 잠시 뙤약볕을 피했다. 팬 중의 누가 선물한 듯 그이의 시구를 새긴 서각이 한 점 걸려 있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의 아내가 내온 시원한 오미자차를 마시며 중얼거려보았다. “오미자차 함부로 마시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시원한 사람이었느냐.” 좋은 시는 무한 변주되는 법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 내외에게 가장 큰 변화는 주거 환경일 것이다. 집은 단지 거주 공간일 뿐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사유가 반영되는 곳이다. 나는 특별히 집을 지을 때 염두에 둔 고상한 철학이라도 있는지 적잖은 기대를 하고 시인에게 여쭈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집짓는 일은 아내가 다 했습니다. 나는 비만 안 새면 된다고 했어요.” 너무 간결한 건축 철학에 잠깐 놀랐다. 그러자 시인의 아내가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어휴, 늘 저렇게 말하니까 답이 안 나올 때가 있어요. 서로 상의해서 아이디어를 내면 좋으련만 설계부터 시공, 인부들 식사까지 제가 다 준비해야 했어요.” 시인이 덧붙인다. “남들은 집 지을 때 보니 창문 크기 가지고도 서로 싸우더군요. 저는 아내를 믿고 맡겼고, 결과에 만족합니다.”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내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을 신봉하고, 남편은 “백지장을 맞들면 찢어진다”는 속담을 믿는 듯했다. 내외의 역할 분담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시인은 글 쓰는 일과 바깥일에는 꼼꼼하기 이를 데 없지만, 집안일에는 무간섭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내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할 것이다. 둘은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왔으니 행복한 모습만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스갯소리를 던졌지만, 가벼운 티격태격이 더 미더워 보였다. 이곳에 오니 사람들이 불쑥 찾아오지도 않고,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없단다. 내외는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마다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것이 낙이란다.

오미자차를 다 비우고 마침내 본채로 들어섰다. 단층이었으나 천장이 높아서 수직의 공간감이 시인의 작업에 영감을 더해줄 것 같았다. 시인의 아내는 집필실과 살림 공간을 분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현관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집필실이, 오른쪽으로 거실과 부엌 등 살림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책들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에서 시인과 마주 앉았다.


집필실로 들어서면 문과 가까운 왼쪽 벽에 가느다란 창이 나 있고, 그 옆 모서리를 따라 시인의 컴퓨터 책상과 작은 책장이 하나씩 자리한다. 책장 안에 빼곡한 책은 대부분 그가 쓴 것이다.

시인의 야심작인 이끼 정원. 이제 막 조성 중이 라 아직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어릴 때 내성천 강변에 가서 하루 종일 놀았습니다. 강에서 물장구치다가 나와 갱빈에서 모래를 파내면 그 속에 물이 다시 고이지요. 그런 경험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

다시 내성천으로 돌아오기까지
그이는 고향에 돌아와 인생 3막을 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1막은 유년기와 고등학교까지 학창 시절을 보낸 예천과 대구에서의 20년, 2막은 대학을 마치고 문단과 사회 활동을 한 전라북도에서의 40년. “고향에 돌아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는 길에 본 내성천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내 상상력의 시원지’라고 표현하신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유년 시절 내성천에 깃든 추억 한 토막을 들려주신다면?” “여기 말로 ‘갱빈’이라고 해요. 어릴 때 내성천 강변에 가서 하루 종일 놀았습니다. 강에서 물장구치다가 나와 갱빈에서 모래를 파내면 그 속에 물이 다시 고이지요. 그런 경험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무심히 겪은 환경이 무척 중요한 듯합니다.”

물고기가 제가 태어난 물맛을 기억하는 것과 비슷할 터였다. 고향 마을에서의 원형적 기억은 시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낙동강’은 바로 내성천 체험이 담긴 시란다. 경북 봉화군 선달산에서 발원해 남류하면서 영주시와 예천군을 지나는 내성천은 낙동강의 상류이다. 이곳은 멸종 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지정된 흰수마자를 비롯해 수달과 먹황새와 독수리가 살던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시인은 풍산국민학교와 경북대사대부중과 대건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경상도 청년으로 자랐다. 일찍이 문재를 뽐내며 여러 대학의 백일장을 휩쓸던 그이는 원광대학교 국문과 문예장학생으로 들어가면서 오랜 전라도살이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이는 시단에 데뷔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등의 시집으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경상도 청년이 전라도로 대학을 진학했을 때 지역감정으로 인한 차별이나 왕따를 경험하지는 않았습니까?” “지역색으로 인한 차별이나 피해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스무 살 전후에 경험한 전라도로 인해 역사의식에 눈뜨게 되었고, 글쓰기와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얻었습니다. 나는 경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라도에서 대학을 마쳤고, 직장을 얻었고, 아이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전북에서의 삶은 그이에게 삶의 균형 감각을 지니도록 해주었다. 지난 2월, 전주에서는 그이를 떠나보내는 것을 아쉬워하는 선배, 후배, 제자들이 모여 성대한 송별회를 열었다고 한다. 전북작가회의, 원광문학회, 동시창작모임, 시 읽기 모임 회원들이 모였다. 송별시를 지어 낭송해주었다고 한다.

흙벽돌로 지은 헛간 옆에는 텃밭을 가꾸는 중간중간 쉴 수 있도록 작은 그늘 공간을 만들었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 벽 사이로 햇살이 새어 들어온다.

“책을 읽다가, 책을 쓰다가 마침내 책이 된 사람, 우리들의 교과서, 안도현. 우리 삶의 모든 갈피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둡니다”라는 글귀를 새긴 ‘참고운상’ 상패를 주기도 했단다. 그들은 떠날 때 전라도산 나무 하나를 보냈다. 뒤뜰에 심어놓은 팽나무 한 그루가 바로 그 기념물이다. 시인의 아내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낯선(?)’ 고향으로 가는 걸 만류했다고 한다. 김용택 시인 부부는 “성공해서 고향에 가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조언을 했단다. 실패해서 낙향한 사람들에겐 저 말이 위안이 될까?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2013년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일들’이 터져 나오자 절필을 선언하기도 한 진보 인사인 그이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고향으로 가는 것을 지인들이 걱정했다. 그런 우려를 어떻게 떨쳐버렸을까? “그저 겸손하게 ‘인사를 잘하자’ 생각하고 왔어요. 정치적으로 생각이 달라도 귀 기울여 잘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당을 둘러싼 돌담길.

시옷 자 형태의 집이 예천의 자연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본채 현관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공간. 거실 너머 부엌이 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을 가꾸는 일
그이가 고향에 돌아오게 된 계기는 지난해 천안에 있는 단국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비롯되었다. 굳이 전주에 있을 이유가 없어지자 부쩍 고향 생각이 나더란다. “고향에 돌아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삶을 바꾸고 모색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손을 씻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옷소매 걷어붙이러 오셨군요. 이곳에서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시는지요?” 그이는 책상 한 편에 있던 잡지 하나를 건넨다. <예천산천>이라는 제호의 잡지 창간호였다. <예천문학>이 아니라 <예천산천>이어서 의외였다. 문예지가 아니라 예천의 역사, 사람, 풍습을 다룬 종합 계간지였다.

“전주에 살면서도 이곳 문화 예술인들을 만나왔습니다.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천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천의 문화를 널리 알려보자, 특히 이곳에서 자라는 다음 세대에게 알려주자는 생각에서 첫 번째 일로 잡지를 창간하게 되었습니다.” 표지 디자인과 본문 레이아웃이 세련되어 보인다고 말하자, 문학평론가 하응백 선생이 운영하는 출판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창간호의 특집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모래강, 내성천’을 다루고 있다. 내성천의 과거와 현재를 사진을 통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내성천은 4대강 사업의 하나로 영주댐이 건설되면서 수량이 줄어들어 모래가 사라지고 풀밭으로 변하고 있었다. “영주댐이 생기니 내성천에 홍수 날 기회가 없어지더군요. 홍수가 있어야 모래가 깨끗해지고, 새 모래가 유입되는데요.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나는 내성천을 알리고 살리는 데 힘쓰려고 합니다.” 바다에도 태풍과 해일이 있어야 해초와 물고기가 풍성해지는 것처럼, 강모래도 홍수가 모래톱을 새롭게 한다는 이야기가 신선했다.

“두 번째 하고 싶은 일은 ‘시를 읽는 모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 모임이 아니고요?” “언젠가부터 시를 쓰려는 사람들보다 시를 읽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더군요. 마침 여기서 15분 거리에 신도시가 생겼어요. 경북도청이 이전해 와서 공무원과 가족들을 비롯해 주민이 늘어났어요. 전주에서의 경험을 되살려 소박한 시 읽는 모임을 꿈꾸고 있습니다.” 또 하나, 그이가 꿈꾸는 것은 해마다 진달래 꽃이 필 때 ‘예천시회’를 여는 것이다. 여러 시인을 초대해서 예천의 문화유산을 보여주고, 예천을 주제로 한 시를 쓰게 한다. 그리고 시인들이 이곳에 온 김에 주변 학교에서 강연도 하도록 주선하고, 술자리도 열며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다. 살구꽃 피면 모이고, 복숭아꽃 피면 모이고, 참외 익으면 모이고, 국화꽃 피면 모여서 시를 읊는 모임을 만든 정약용의 ‘죽란시사’를 떠올리게 했다. “어떤 시 세계를 펼칠지 구상하고 계신 게 있는지요?” “8년 만에 새 시집이 나올 예정입니다. 책이 나온 다음 생각해보려 합니다.” 새 시집의 제목이 궁금했으나 아직 정하지 않았단다.

“많은 미래학자가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 문명사의 전환점이 될 거라고 예측합니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선생님의 글쓰기에 변화가 있을까요?” “코로나19는 인간의 문명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책을 보면 황폐한 사막에 숲을 가꾸는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노인이 나옵니다. 그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를 심어 사람의 마을이 다시 깃들이게 하지요. 욕망에 의해 작동하는 거대한 도시 문명보다는 자연에 관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요즘 동물원보다 식물원이 더 인기가 많다고 하죠? 동물적 욕망보다 식물적 상상력이 더 필요할 듯합니다. 조금 덜 가져도 좋고, 천천히 가도 좋은 쪽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입니다. 시인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서로에게 겸손해지는 것, 사람뿐 아니라 고양이와 팽나무에게까지 겸손한 마음을 지니면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귀거래사를 들으러 왔다가 출사표를 보았다. 그이에게 귀향은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처럼 보였다. 그이가 존경하는 시인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라고. 백석의 후배인 안도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가꾸러 가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리는 대상을 닮듯, 시인도 시인이 그리는 대상과 닮기 마련이다. 그이는 그가 그린 연어이자, 남방돌고래이자, 흰수마자처럼 보였다.

글 반칠환(시인) | 사진 이주연 | 담당 류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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