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구 작가는 최근 집을 이사하면서 작업실을 집 안으로 들였다. 낮게 경사진 골목골목마다 오래된 주택이 빼곡하고, 사방으로 수목이 우거진 조용한 동네다. 그는 날씨가 좀 더 따뜻해지면 작업실과 연결된 테라스의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작업에 매진할 계획이다.오른쪽 그가 전시를 준비하며 직접 디자인해 만든 도록과 디자인 스튜디오 ‘베란다’에서 정식 출간한 책 세 권.
그의 유년 시절 꿈은 자동차 디자이너였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유행하던 자동차 잡지를 뒤적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멋들어진 자동차를 상상했다. 대학에서는 광고 디자인을 전공하며 영화감독을 꿈꿨다. 틈만 나면 영화를 찾아보고 시나리오를 쓰고 친구들과 8mm 카메라로 이런 저런 영상을 찍었다. 결국 그러는 사이 몸에 밴 건 상상하고 디자인해 이야기로 만드는 습관. 그래서일까,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지금도 노준구 작가의 그림에는 늘 촘촘한 서사가 있다. 작품 속 공간이 런던의 이발소 안이든 모로코의 버스 정류장 앞이든, 거기에 사람이 있든 없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선택된 프레임’ 너머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람들, 풍경 앞뒤로 숨은 무수한 에피소드를 상상할 수 있다.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영화 장면처럼 그의 그림에는 공간과 사람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쉰다. 낯설면서 익숙하고, 은밀하지만 다채로운 세계. 이것이 일러스트레이터 노준구의 세계다.
어떻게 일러스트레이션을 시작하게 됐나요?
대학 4학년 때쯤 낙서처럼 끄적거린 습작들을 SNS에 올렸는데, 우연히 그걸 본 어느 회사에서 다이어리 일러스트레이션을 의뢰해왔어요. 총 열두 명의 작가와 협업하는 프로젝트였죠. 그 작업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욕심이 생기니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어 결국 영국 런던의 킹스턴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어요.
작품에서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느껴져요.
맞아요. 그림을 그릴 때마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욕심이 좀 있어요. 저는 일상적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제 눈에 들어오는 소소한 현실 속 풍경, 특히 사람의 행동에 관해 많이 그리게 됐죠. 거기에 저만의 관점이나 의도를 담은 장치, 숨은 에피소드를 집어넣는 걸 좋아하고요. 일단 일상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포착하면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함께 일어나요.
특히 여행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 많던데요.
개인적으로 여행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요즘에는 일상도 여행처럼 매 순간 소중하고 특별하게 보내려 하지만, 예전엔 여행을 떠나야만 그게 가능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시간을 정성껏 보내고 싶고, 평소 안 보이던 것도 갑자기 반짝반짝하게 보이곤 했죠. 다만 계속 여행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언젠가부터 아름답거나 좋은 추억, 여행지에서 보낸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랫동안 기억하고, 또 꺼내 볼 수 있게요. 누군가는 그걸 글로 쓰듯, 저는 그림으로 그리는 거예요.
‘잃어버리기 싫은 귀중한 풍경’, 종이에 아크릴, 56.5×77cm, 2013
이번 <행복> 표지작도 그런 기록의 일종인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늘 크레타 섬을 꼽는데, 그곳에서 본 풍경을 담은 작품이에요. 여행을 소재로 꾸준히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여행지의 배경보다는 사람에게 시선이 더 많이 가더라고요. 공통적으로 그리고 싶은 하나의 큰 주제가 생겼죠. 그게 ‘여행하는 사람들’이에요. 여행지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언어도 생김새도 모두 다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서로 비슷한 구석이 많잖아요. 그중 욕망에 관한 부분이 특히 제 눈에 들어왔어요. 몇 달동안 돈을 모으고 시간을 들여 고생스럽게 이동하고, 그렇게 여행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마치 보상을 받으려는 듯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시간을 보내죠. 가장 특징적 행위가 사진을 찍는 것인데, <행복> 표지작 ‘불편한 자세’를 통해 그런 여행자의 모습을 표현했어요.
그림 스타일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듯해요.
사실 오랫동안 의뢰받은 일만 하다 보면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거든요. 계속 같은 스타일로 그림을 그려야하니 발전도 없고요. 그래서 2013년쯤 동료들과 1년에 한 번씩 전시를 열자는 취지로 ‘아이구’란 소모임을 만들었어요. 모임을 유지한 5년간 실제로 매년 전시를 준비했고요.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그림 스타일을 조금씩 바꿔갔죠. 과감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연필을 좀 덜 쓰거나 물감을 많이 써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어요.
상업적 작업에선 변화를 시도하기 어려운가요?
아무래도 작업을 의뢰한 입장에서는 제게 바라는 부분이 명확한 편이죠. 가끔 새로운 시도를 조금씩 섞어보기도 하는데, 좋게 봐주는 분도 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을 보일 때도 있어요. 그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워요. 어쨌든 저의 본업은 일러스트레이터이니까요. 다만 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당장 일이 덜 들어와도 새로운 걸 계속해나가야 그걸 통해 또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겠죠. 그러지 못하면 평생 똑같은 그림밖에 못 그릴 테고요.
‘비수기의 해변’, 종이에 연필과 아크릴, 29.5×42cm, 2017
출판사 겸 스튜디오인 ‘베란다’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세요.
2016년에 작은 서점을 열면서 출판사도 함께 만들었어요. 마음이 정체되어 있던 때라 무언가 새롭고 재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이전부터 쭉 서점 운영에 대한 로망도 있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더라고요. 결국 지난해 초 서점을 정리하고 지금은 출판사 겸 스튜디오만 운영하고 있어요. 정식 출간한 책은 세 권인데, 그중 하나가 저의 그림책<HELLO, STRANGER>예요. 2018년 갤러리로얄에서 첫 개인전을 열 때 도록 대신 단행본 형태로 만든 거죠.
여행 말고도 작업에 영감을 주는 요소가 있다면요?
여행할 때와 비슷한 관점이긴 한데, 최근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 눈에 들어와요. 제가 경험한 것과 책에서 본 것, 제가 사는 이 집과 이 동네, 이 도시, 가족, 그러니까 저와 관련있는 모든 것이 제 작업에 영감을 주죠. 지금은 집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요. 여행자의 욕망을 그리는 것처럼 집에 관한 사람들의 욕망을 그림책 형식으로 엮어볼 생각이에요. 사실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해 손에 쥐어도 그 행복과 만족감이 언젠가는 사라지잖아요. 그럼 마음에 생긴 구멍이나 결핍을 또 다른 대상으로 채우고 싶어 하고요. 집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보편적 욕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어쩌면 노준구 작가가 택한 건 ‘그림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고 풍경에 이야기를 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걸 위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을 고른 셈이다. 종이 위에 연필과 물감으로 그린 작가의 분신들은 마치 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불현듯 우리 앞에 나타나 저마다 강렬한 서사를 드러내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때로는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로, 때로는 더없이 간결하고 덤덤한 이미지로, 그의 이야기는 매 순간 무수한 결말을 향해 내달린다.
노준구 작가는 홍익대학교 광고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영국 킹스턴 대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애니메이션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여러 단행본과 매거진, 음반, 기업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무수한 그룹전과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 일러스트레이터 노준구 내밀한 서사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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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의 그림에도 수십 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모든 인물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손짓 하나, 시선 한 줄기에도 뜻밖의 에피소드가 흘러넘친다.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사진이나 영상을 찍듯 일러스트레이터 노준구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그린다. 자꾸만 결말을 상상하게 되는 감칠맛 나는 옴니버스 영화 한 편이 섬세한 연필 선 너머 숨어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