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까지 파라다이스 ZIP에서 열리는 에디 강 작가의 개인전은 그가 최근에 겪은 상실의 시기와 이를 극복하는 긴 여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1층 초입의 흑백 작품이 조금씩 빛과 색을 회복하며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 끝내 다정한 수호천사의 모습을 되찾는다.
‘Yeti’, 120×120cm, mixed media on canvas, 2019
소년은 그림 그리는 것이 마냥 좋았다. 어머니는 화가였고, 그의 집과 작업실은 늘 황홀한 추상화의 색감에 둘러싸여 있었다. 소년은 유치원을 다니기도 전, 손에 펜을 쥐고 무언가 끄적일 수 있는 나이부터 늘 그림을 그렸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소년의 교과서는 낙서장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은 그 맹렬한 창작열에 한층 힘을 실어줬다. 소년은 기숙사에서 밤새도록 그림을 그리며 아침이 되어 아트 스튜디오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직접 만든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해, 이른 유학 생활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오롯이 쏟아부었다. 단 한순간도 미술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 없는 삶. 에디 강의 오늘은 그렇게 완성됐다. 회화, 조각, 설치, 미디어 등 온갖 시각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온 현대미술작가. 그림으로 놀고, 그림으로 상실을 극복하며 늘 어린 아이 같은 순수의 세계로 관람객을 이끈 그가 최근 파라다이스 ZIP에 최신 작품을 잔뜩 꺼내 보였다. 전시의 부제는 ‘We will be alright’. 전염병의 불안과 공포에 빠진 이 시대, 우리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 같았다.
다양한 캐릭터를 창조해 자신만의 스토리를 담아내는 작 업으로 알려졌어요.
제 캐릭터가 확실하게 나오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 였어요. 그때 만든 캐릭터가 ‘누더기’와 ‘피에로’인데, 지금도 종종 작품 속에 등장하죠. 누더기는 제가 어릴 때 쓰던 베개를 모티프로 만들었고, 피에로는 <리어왕>에 등장하는 궁중 광대에서 착안했어요. 모든 이가 왕에게 아첨할 때 홀로 쓴소리를 하면서도 결국엔 끝까지 왕을 지키는 궁중 광대가 너무 멋지더라고요. 예술가로서 저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작에선 특히 세 가지 캐릭터가 눈에 띕니다.
‘믹스’와 ‘러브리스’, 그리고 ‘예티’겠죠. 러브리스가 아무래도 저의 메인 캐릭터일 텐데, 최근작에선 예티가 유독 많아요. 조카에게 캐릭터를 하나 만들어 선물해주고 싶었거든요. 마치 <이웃집 토토로> 속 토토로처럼 그 아이 눈에만 보이고 항상 그 아이를 지켜주는 수호천사 같은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예티는 과거 제가 동화책을 만들 때 처음 구상한 캐릭터인데, 그때와는 형태가 좀 달라졌어요. 제 마음이 훨씬 진중해져서인지 캐릭터에도 비밀스럽고 푸근한 느낌이 더해졌죠.
<행복> 표지작 주인공인 믹스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믹스는 러브리스와 함께 제가 실제로 키운 강아지예요. 버스에 버려진 유기견이었는데, 어릴 때 집에 데려와 16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 보냈죠. 정신적으로 학대받은 뒤 파양당해 오래도록 아프고 힘들던 러브리스와 달리, 구김살 없이 잘 자라준 아이예요. 사실 저는 그림을 그릴 때 캐릭터보다는 배경에 더 신경을 써요. 모든 캐릭터는 그저 저(화자)로서 존재할 뿐, 배경 속 색감이나 선을 통해 더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려 하죠. 아직까진 캐릭터로 많이 부각되는 편이지만, 제 작품 세계가 점점 무르익으면 그런 부분도 관객에게 좀 더 전달되지 않을까 싶어요.
전시 부제인 ‘We will be alright’가 특히 인상 깊었어요.
사실 지금의 사태를 감안하고 만든 타이틀은 아니에요. 저는 이미 코로나19 발생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큰 상실의 시기를 겪고 있었거든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죠. 어쨌든 우울함을 털고 나와야 한다는 마음이 컸어요. 저는 가장이고, 나를 지켜야만 내 가족과 친구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거야, 이 말로 끊임없이 저 자신을 달래곤 했어요. 그렇게 쓰게 된 부제인데, 시기가 맞물리며 제 개인적 과정과 지금의 세계적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둘 다 힘든 일을 이겨내고 일어서는 과정이니까요.
1 ‘No fear’, 29.5×21cm, mixed media on paper, 2020.
2 ‘Coming home’, 27.5×21.5cm, mixed media on paper, 2018.
3 ‘Farewell my hero’, 25.7×18.2cm, mixed media on paper, 2020.
4 ‘Golden memory’, 28×21.5cm, mixed media on paper, 2020.
5 ‘On the road’, 29.7×21cm, mixed media on paper, 2020.
6 ‘Rage’, 25.5×18cm, mixed media on paper, 2020.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이 전시에 오롯이 담긴 셈이네요.
맞아요. 처음에는 거의 수행하듯 그림을 그렸어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지기 위한 과정이었죠. 그런 감정은 무척 낯설더라고요. 그때 완성한 작품이 전시장 1층 초입부터 차례로 걸려 있어요. 흑백 대비가 선명하고 색감을 거의 배제한 그림들이죠. 동선을 따라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그렇게 이어진 작업이 조금씩 저의 상실을 치유하며, 밝고 컬러풀한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어요.
개인적 이야기를 담은 드로잉 시리즈도 최초로 공개했죠.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수집한 지도, 엽서, 호텔 메모지에 그린 드로잉이에요. 사실 제게는 작업이 일종의 탈출구라, 혼자 있는 시간엔 늘 그림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거든요. 오히려 작업실을 벗어났을 때 뭔가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지죠. 그래서 색연필이나 볼펜, 펜 형태로 나오는 오일 물감 등을 늘 가지고 다녀요. 비행기에서도 그리고, 공항에서도 그리고, 기차나 호텔 방 안에서도 그리죠.
작품에서 가장 많이 전해지는 감성이 ‘순수함’ 같아요.
저는 누구에게나 순수하던 시절이 있다고 믿어요. 근데 그 시절은 다시 되돌릴 수 있거든요. 제 작품을 보면서 그런 기억을 한 번쯤 곱씹어보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 저는 감정을 전달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완벽한 테크닉을 자랑하기보다는 좀 허술해 보이더라도 무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어요.
이번 전시 이후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비영리 전시를 준비 중이에요. 최근 코로나 19 사태가 길어지다 보니 아이들이 마음 놓고 갈 데가 없거든요. 방역을 확실히 한 뒤 안전에 유의해서 아이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을 만들려고 해요. 같이 그림도 그리고, 점토로 캐릭터도 만들고요. 전시가 끝날 무렵이면 우리 모두의 공동 작품이 완성되는 거죠.
“나에게 창작 작업이란 순수한 마음을 되찾고, 잊힌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마법의 주문과 같다.” 에디 강이 전시를 준비하며 건넨 이 말은 그의 세계로 향하는 가장 넓고 분명한 통로일 것이다. 그의 작품 속 발랄한 선과 색감을 좇다 보면 덩달아 말랑말랑해지는 의식이 이내 즐거웠던 기억, 따뜻하던 옛 시절로 회귀하게 될 테니까. 결국 작가가 개인의 상실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과정은 불안한 시대를 헤쳐나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작은 지도를 건넨다. 꼬깃꼬깃한 지도 속 이정표는 모두가 잊고 있던 마법의 주문, 이 시대 어른을 위한 한 편의 그림 동화다.
‘Yeti’, 130×97cm, mixed media on canvas, 2019
작가와의 만남
5월호 <행복> 표지를 유쾌하게 채운 에디 강 작가의 개인전에 독자를 초청합니다.
일시 5월 28일(목) 오후 2시
장소 서울시 중구 동호로 268-8 파라다이스 ZIP
참가비 2만 원(정기 구독자 1만 원)
인원 10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에 참가 이유를 적어 신청하세요.
- 현대미술가 에디 강 어른을 위한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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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그리는 자만의 것이 아니다. 바라보고 새기고 소통하는 무수한 이의 감상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결한다. 에디 강 작가에게 예술이란 그 완결을 향해 나아가는 긴 여정이다.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 안에 꿈을 섞고, 위로를 담고, 모두가 잊고 살던 마법의 주문을 소환해 촘촘히 덧칠한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