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느린 삶의 미학, 슬로시티
한때 우스갯소리처럼 경상북도 3대 오지를 묶어 ‘BYC’라 불렀다. 봉화(B), 영양(Y) 그리고 청송(C). 이 세 지역은 전라북도의 ‘무진장(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다)’과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꼽혀왔다. 태백산맥이 관통하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개발의 여지가 적은 데다 교통도 불편해 사람의 발길이 뜸했던 탓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오늘날 이 오지란 말이 ‘청정 지역’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는 것.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친 만큼 자연환경이 잘 보존됐고, 또 그만큼 주민들 삶에도 순박함과 온정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조금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옛것을 아끼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자연이 깨어나는 시간에 함께 깨고, 자연이 쉬어 가는 시간에 함께 잠드는 삶. 이렇듯 산맥 밖 세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표야말로 청송을 국제슬로시티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이었으리라. 실제로 한국슬로시티본부가 소개한 청송은 “겹겹이 둘러싸인 산에서는 다양하고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순박한 마을 주민들이 사는 무릉도원과도 같은 곳”이다.
국제슬로시티로서 청송의 거점 지역은 부동면과 파천면이다. 지금은 군 전체로 슬로시티가 확대된 상태지만, 2011년 첫 인증 당시만 해도 국제슬로시티연맹의 선택을 받은 지역은 이 두 곳뿐. 부동면에는 주왕산이, 파천면에는 덕천마을이 자리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느린 삶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청송 심씨의 본향인 덕천마을이다. 과거 경주 최씨와 함께 영남의 2대 부자이던 청송 심씨 가문. 조선의 정승 열세 명과 왕비 네 명을 낳은 세도가의 위세를 드러내듯 마을은 지금도 심씨 자손들이 가꾸는 단정하고 기품 있는 고택으로 가득하다. 물론 그 하이라이트는 송소 심호택이 무려 13년에 걸쳐 지은 송소고택이다. 한때 방이 아흔아홉 칸이나 됐다는 대저택의 흔적은 오늘날 대부분 소실됐지만, 꼿꼿이 살아남은 큰사랑과 안채, 별채를 구경하는 것만으로 조선시대 만석꾼의 고아한 삶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옆에 자리한 송정고택도 반드시 들러봐야 할 코스다. 심호택의 둘째 아들이 살던 집을 현재 후손인 심증옥 여사 내외가 맡아 살뜰히 관리하고 있는데, 규모는 작아도 다정하고 따뜻한 분위기만큼은 따라갈 집이 없다는 게 현지인의 증언이다. 사실 덕천마을은 반나절쯤 일정을 잡고 찾아와 호젓하게 산책을 즐겨도 좋지만, 최소 하룻밤 이상 머물며 직접 고택살이를 체험하고 이 마을을 감싼 느린 호흡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훌륭한 여행법이다. 총 여섯 곳의 고택에서 숙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국제슬로시티란
1999년 이탈리아 소도시에서 시작한 ‘느린 마을 만들기’ 운동입니다. 지역 고유의 전통과 자연경관을 지키고 공동체와 상생하며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자는 취지에서 출발했죠. 현재 국내에는 총 열여섯 곳의 슬로시티가 있는데, 청송의 경우 주왕산과 주산지가 있는 부동면은 자연경관이, 덕천마을과 중평마을이 있는 파천면은 전통문화가 높은 점수를 받으며 경북 최초의 국제슬로시티가 됐죠.
덕천마을 미리 보기
과거엔 1백여 가구가 이 마을에 살았어요. 지금은 50여 가구만 남아 있고, 자손들이 돌아오지 않은 폐가도 늘어났죠. 그런 폐가를 정부 지원 아래 꾸준히 관리하고 있어요. 최근 마을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카페 ‘백일홍’도 폐가를 개·보수해 꾸민 공간이에요. 사실 덕천마을의 가장 큰 자랑은 호젓한 분위기와 잘 보존된 전통문화라고 생각해요. 예절 교육이나 염색하기, 도자기 만들기, 떡메 치기, 고추장 만들기 등 여행객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고요.
여행객을 위한 조언
하루 이틀 정도 마을에 머물러보기를 권합니다. 호텔이나 일반 숙박 시설보다는 다소 불편하겠지만, 고택에 머물며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을 산책하고 뒷산도 오르고, 자전거를 빌려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도시와는 전혀 다른 깊은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일단 고택에서 묵기로 했다면 휴대전화를 덜 쳐다보거나 TV를 멀리하는 등 최대한 도시 생활과 단절된 상태에서 이 마을의 분위기를 만끽하면 좋겠어요. _심재환(국제슬로시티 청송주민협의회 사무국장)
#8 청송에서 살아보기, 에피그램 올모스트홈 스테이
추운 지방에서 집 안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위해 성행한 'ㅁ'자 한옥 형태를 한 교수댁.
시원하게 펼쳐진 대청마루가 있는 훈장댁. 올모스트홈 숙소는 매일 아침 숙박객에게 지역의 농산물로 만든 조식을 제공한다.
훈장댁의 안방에는 포근하고 정갈한 침구가 제공된다.
에피그램이 청송 올모스트홈 스테이만을 위해 제작한 디퓨저.
집은 사람을 닮는다. 기거하는 이의 취향과 삶, 일상은 그대로 집에 드러난다. 이 명제를 반영하듯 청송의 옛 가옥에는 이 고을의 삶이 그대로 묻어난다. 본디 추운 고산 분지 지형이라 청송에서 도자기를 빚던 사기공들은 땅에 구릉을 만들어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일했다. 민간에선 외양간을 집 안으로 들여 ‘ㅁ’자 구조로 만든 한옥이 나타났다. 청송민의 생활을 닮은 집은 주왕산 아래 민예촌에 잘 재현돼 있다. 옛 가옥 스물한 채가 자리한 이곳에선 옛집을 둘러본 후 숙박까지 할 수 있다. 민예촌 주변으로는 리조트와 식당, 청송군수석꽃돌박물관 등 문화·편의 시설이 모여 있다. 여행객에게 더할 나위 없는 숙박처인 셈. 이곳 민예촌에 지역의 삶을 ‘거의 집’처럼 경험할 것을 제안하는 복합 공간 ‘올모스트홈 스테이’가 문을 연다. 올모스트홈 스테이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에피그램이 숙박 공간을 중심으로 지역의 맛과 멋, 즐거움을 지역민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스테이는 민예촌 내 세 곳의 객실로 구성했다. 추운 지방에서 찬 바람을 막기 위해 생긴 가옥 형태인 ㅁ자 한옥의 ‘교수댁’에서는 중정의 미학을 엿볼 수 있고, ㄱ자 초가지붕을 올린 ‘생원댁’에서는 자연의 품에서 소박한 삶을 즐긴 옛 청송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대청마루 양쪽으로 쭉 뻗은 누마루가 있는 ‘훈장댁’은 한옥의 개방감을 즐기기 좋다. 겉은 완연한 한옥이나 내부 공간에는 현대적 미감을 더했다. 국내 작가의 소반과 모던한 보료, 곳곳에 놓인 분재와 간결한 디자인의 조명이 조화롭다. 대청마루에 앉아 청송에서 나는 먹거리로 차린 조식을 먹으며 청송의 자연이 주는 여유로움에 공감할 때 즐거움은 배가될지도 모른다. 세 한옥 사이에 있는 초가삼간 ‘참봉댁’은 콘시어지와 갤러리 숍으로 운영한다. 이곳에선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45호 성명례 씨의 브랜드 ‘맥꾸룸’이 만든 장류와 에피그램이 셀렉트한 청송백자, 지역의 농산물로 만든 먹거리를 구매할 수 있다. 에피그램이 만든 청송 지도를 따라 읍내의 오래된 가게와 SNS 명소, 한지와 백자 체험 프로그램 스폿을 방문해보는 것도 올모스트홈 스테이를 즐기는 방법이다. 숙박객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지역과 상생하며 휴식하는 삶에 좀 더 공감할 것이다. 잠시 일상을 뒤집어, 또 다른 삶의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숙박 공간 올모스트홈 스테이는 3월 2일 정식으로 오픈한다. 예약은 에어비앤비와 스테이폴리오를 통해 할 수 있다. 주소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주왕산로 494 문의 02-3677-8866
#9 청송에 장이 서는 날
“내가 살던 시골의 읍내 마을에서는 5일마다 한 번씩 저자가 열렸다. 내가 살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집 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러운 장돌림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중략) 어릴 때부터 나는 땀 냄새가 푹푹 배어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왔다.” 김주영 선생이 <객주>의 서문에 적은 글이다. 총 열 권 분량에 집필 기간만 34년이 걸린 이 장엄한 대하소설 뒤에는 그를 ‘길 위의 작가’로 만든 시작점, 진보장이 있었다. 유년 시절부터 집과 진보초등학교, 진보장을 오가며 그 치열한 삶의 면면을 가슴에 새긴 것. 그것이 <객주>를 낳았고, 단편소설 <외촌장 기행>의 무대가 됐다. 그의 체험은 오늘날 여행객에게도 그대로 통한다. 실제로 어떤 지역을 찾든 현지인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공간은 아마도 시장일 것이다. 어떤 명소보다 많은 현지인이 모여 서로 부딪치고 말을 섞으며 일상을 보내는 공간. 동네별로 여섯 종류의 5일장이 열리는 청송에선 시장에 담긴 삶의 무게가 한층 더 크다. 사람들은 그때그때 필요한 식재료며 생필품 목록을 들고 5일마다 가까운 장을 찾는다. 규모나 주력 품목은 동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안에 밴 일상의 냄새만큼은 한결같이 짙고 명료하다. 그러니 반들반들 윤을 낸 관광 명소를 차례로 훑다가 문득 청송 서민들의 일상을 마주하고 싶다면 그 날짜에 여는 5일장을 찾아가볼 것을 권한다. 가장 대중적인 장은 4·9일에 서는 청송장과 3·8일에 서는 진보장이지만, 좀 더 소박한 옛 장터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면 부남장과 안덕장도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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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청송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