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호텔 센트럴 파크의 로비. 식물과 돌, 목재 등 다양한 자연 요소가 어우러져 있다. Ⓒ1 Hotel Central Park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산하 호텔인 W 발리 스미냑에서 발리 해변가에 조성한 물고기 조형물.
지난 10월 1일 저녁 9시, 서울·부산·제주의 특급 호텔 열 곳을 밝히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고요한 어둠이 삽시간에 건물 전체를 감쌌지만, 어느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십 분쯤 지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불이 들어왔다. 정전도 아니고, 시스템적 오류도 아닌 이 현상의 실체는 환경부와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 주관한 ‘지구 살리기 전등 끄기’ 캠페인. 2007년 호주에서 시작한 지구촌 소등 캠페인 ‘어스 아워Earth Hour’의 국내 축소판이다. 친환경과 지속 가능성이 호텔업계의 화두가 된 지 오래다. 이미 많은 호텔에서 크고 작은 정책을 펼쳐왔고, 일부 호텔의 경우 아예 기획 단계부터 ‘친환경’을 테마로 삼기도 했다. 따라서 현재의 양상이 좀 달라졌다면, 그건 호텔업계의 변화라기보다 사람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라 해야 맞을 듯하다. 몇 년 새 미세먼지나 폭염 같은 기후변화의 징후를 체감하며 우리의 친환경 의식이 급격히 고조됐기 때문이다. “친환경과 지속 가능성은 이제 어떤 산업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사회 전체의 큰 화두입니다. 특히 업계를 이끄는 브랜드일수록 윤리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워커힐 호텔앤리조트 도중섭 총괄의 말이다.
플라스틱 생수병을 제공하는 대신 원 호텔 브루클린 브리지의 로비에 설치된 생수 급식대. 언제든 텀블러나 컵에 생수를 따라가면 된다.
원 호텔 사우스 비치가 마련한 여러 액티비티 프로그램을 통해 투숙객은 자연과 가까워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아이를 위한 프로그램도 따로 마련돼 있다.
자연스러운 친환경 숙박 체험
호텔에서 마주하는 친환경 요소는 대개 객실에 구비된 작은 소품에서부터 시작한다. 방법은 다양하지만 결국 그 핵심은 소품이나 포장재에서 플라스틱이 사라졌다는 것. 이를테면 아난티 리조트 그룹에서는 지난 8월 플라스틱 용기가 필요 없는 고체 타입의 어메니티를 개발했다. 샴푸, 컨디셔너, 페이스&보디 워시, 페이스&보디 로션 등 4종의 어메니티가 종이 케이스나 펄프로 만든 생분해성 케이스에 담겨 있는데, 기존 고체 제품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개발에만 3년의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올해부터 워커힐 호텔앤리조트 내 세 개 호텔의 전 객실에 구비한 ISO 인증 칫솔도 비슷한 맥락. 칫솔대는 밀짚 플라스틱(농작물의 섬유 줄기와 고성능 수지의 복합체), 칫솔모는 숯으로 만든 완벽한 친환경 칫솔이다. 칫솔 하나, 욕실용품 몇가지에서부터 친환경 라이프스타일을 살짝 맛봤다면, 이제 객실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변화에도 관심을 가질 차례다. 예를 들어, 런던의 사보이 호텔에서는 음식 폐기물을 매립하는 대신 생물 비료로 활용하거나, 첨단 기술을 동원해 재생에너지로 변환시킨다. 워커힐 호텔앤리조트처럼 자체적으로 태양광발전 시설을 설치해 전력을 생산하고, 이를 실제 활용하는 곳도 적지 않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친환경을 설계의 중심에 둔 호텔일 것이다. 이미 자리 잡은 상태에서 친환경 정책을 펼치는 게 아니라, 아예 친환경 호텔로 태어난 곳들. 이런 곳에서 그저 숙박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다양한 환경친화적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스타우드 캐피털 그룹 소속인 원 호텔 체인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이 체인에 속한 네 곳의 호텔 모두가 친환경 디자인과 지속가능한 라이프스타일 체험을 기본으로 한다. 그중 캘리포니아 웨스트할리우드에 위치한 원 호텔의 경우 일단 객실에 들어서면 거의 모든 요소에서 플라스틱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카드 키도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 재질이다). 바닥에는 카펫 대신 재생섬유로 만든 매트가 깔려 있고, 나무 옷장 안에는 골판지로 만든 옷걸이가 걸려 있다. 생수도 종이 팩에 담겨 있고, 로비의 프런트데스크 역시 오래된 가옥과 건물에서 가져온 고재로 만든 것이다.
워커힐 호텔앤리조트의 그린 캠페인 카드. 침구 교체를 원하지 않을 경우 카드를 침대에 올려 두면 친환경 기념품을 증정한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그룹은 욕실 어메니티를 대용량 제품으로 교체하는 중이다.
아난티 리조트 그룹이 플라스틱 용기가 필요 없는 고체 어메니티를 개발했다.
지구의 미래 이야기
최근의 중요한 화두는 글로벌 호텔 체인이 하나둘 강력한 친환경 정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발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들이 하나의 정책을 제대로 실현했을 땐 파급 효과가 클 수 밖에 없다. 대표적 그룹이 메리어트 인터내셔널과 인터컨티넨탈 호텔 그룹이다. 실제 두 호텔 그룹의 행보는 지금 어떤 단일 호텔보다 맹렬하고도 뜨겁다.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의 경우 지난해 플라스틱 빨대와 커피 스틱 사용을 전면 금지한 데 이어 올해부터는 ‘객실 내 일회용 욕실용품 퇴출’이란 새로운 화두를 꺼내 들었다. 지난 9월까지 북미 지역 1천여 곳 호텔이 어메니티를 대용량 제품으로 교체했고, 나머지 호텔도 2020년까지는 이 행보에 동참할 계획이다. 소용량이나 대용량이나 플라스틱을 쓰는 건 마찬가진데 뭐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의미가 크다. 대용량 펌프 용기 하나에는 미니 용기 10~12개에 해당하는 용량이 담긴다. 미니 용기는 보통 일회용으로 쓰고 버려 매립지에 묻히지만, 대용량 용기는 재활용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그룹이 총 서른 개 브랜드, 6천5백 개가 넘는 호텔을 보유한 세계 최대 규모의 호텔 체인이라는 사실.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아태 지역의 객실·스파·로열티&브랜드 운영 부사장인 제니 토는 이 모든 일이 “지속 가능성을 기업의 가치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지난해 시작한 플라스틱 빨대 퇴출 프로젝트를 통해 쓰레기 매립지에서 연간 10억 개의 플라스틱 빨대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환경을 위해 의미 있는 변화를 지속적으로 찾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죠.”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의 최신 프로젝트는 W 발리 스미냑에서 진행한 ‘고비 물고기 먹이 주기’. 지금 발리 해변가에는 거대하고 투명한 물고기 조형물이 설치돼 있는데, 플라스틱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세계 곳곳의 여행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그룹의 행보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해부터 플라스틱 빨대와 커피 스틱 사용을 금지하고, 올해부터 어메니티를 대용랑 제품으로 교체하겠다고 발표한 것만 봐도 이 사안이 현재 대형 호텔 체인의 최대 화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환경친화적이면서 크게 불편하지 않고, 누구나 부담 없이 지속 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을 체험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호텔을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부분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고객이 호텔에 투숙하는 동안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연보호에 동참할 수 있어 의미가 깊다”는 아르네 소렌슨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CEO의 말처럼 호텔의 변화는 소소하지만, 분명하게 우리 삶을 진화시킬 것이다. 사실 이건 지구의 미래에 관한 일이기도 하다.
- 환경보호를 기업 가치로 삼다 지속 가능한 호텔, 지속 가능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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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호텔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건 쾌적한 객실, 수준 높은 서비스만이 아니다. 지구와 환경을 생각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도모하는 라이프스타일 체험이 이제 그 어떤 초호화 서비스보다 더 중요해졌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