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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숙화랑 이태원 이전 전시 도예가 권대섭의 수수덤덤한 달항아리
이 세상 모든 생태계에서 ‘처음’이라는 단어는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 면에서 최근 청담동에서 이태원으로 이전한 박여숙화랑이 그 첫 시작을 위해 백자 달항아리를 빚는 권대섭 작가의 개인전을 연 것은 여러 면에서 기념비적이다. 젊은 층부터 외국인까지 더욱 다양해진 관객이 갤러리를 방문해 수수하고 덤덤한 조선의 미감을 경험하게 되었다.

박여숙화랑 이전 전시 첫 번째 주인공인 권대섭 작가는 2018년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악셀 베르보르트 갤러리에서 백자 항아리 개인전을 열었다.이번 전시는 2018년 가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달항아리가 5만 2천5백 파운드에 낙찰된 후 처음 열린 대규모 개인전이기에 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의 개인 작품집이 곧 악셀 베르보르트 갤러리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박여숙화랑의 이전 전시는 권대섭 작가 개인으로도 백자 제작 40년 세월을 결산하는 전시인 만큼, 관객은 키가 큰 백자인 입호부터 높이가 45cm에 이르는 영롱한 대형 달항아리까지 20여 점이 넘는 백자를 한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권대섭 작가는 2018년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악셀 베르보르트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에서도 단 여덟 점만 선보였을 뿐이다.

이태원 시대의 시작, 달항아리 전시
“제가 1990년대부터 계속해서 중요하게 생각해온 게 한국의 고유한 이미지와 정신을 내재한 작가와 협업하는 것이었어요. 그동안 단색화 전시 작업을 하는 박서보, 정창석, 윤형근, 전광영 작가 등의 작품을 유럽에 많이 소개했지요. 우리나라 백자의 고유한 정수인 달항아리를 빚는 권대섭 작가의 전시를 추진한 것도 그간의 단색화 전시 주제와 같은 맥락이에요.” 이태원으로 갤러리를 이전하면서 박여숙 관장은 백자 중에서도 그 고유한 형태와 크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달항아리를 전시하고 싶었다고 한다. 마치 밤하늘의 영롱한 달처럼 새하얗고 오묘한 매력을 자아내는 단색 구체는 청담동을 벗어나 젊은 층부터 외국인까지 더욱 폭넓어진 관람객에게 문을 활짝 연 갤러리에서 누구에게든 감동을 줄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부터 오직 한국의 숙련된 도공만이 만들 수 있던 달항아리는 한쪽은 바닥면이 있고 다른 쪽은 주둥이가 있는 커다란 반구 두 개를 따로 만드는 아주 특이한 제작 방식을 취한다. 반구 두 개가 각각의 형태를 유지하도록 반쯤 마른 상태에서 붙여야 하는, 전 과정에 걸쳐 고도의 기술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물레를 돌리고 뜨거운 가마 안에서 조형을 하고 유약을 발라 두 번 구워내는 오랜 시간 동안 작가는 가마의 온도와 산소 농도까지 헤아리며 이 하얀 도자기의 색과 실루엣을 위해 온몸의 촉수를 집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길 수 없는 것은 흙, 물, 불, 공기라는 자연의 간섭. 결국 두드리면 맑은 공명음을 내는 이 신비로운 고연소 도자기는 장인과 자연의 긴밀한 호흡과 사투 끝에 탄생하는 생명체인 것이다. 이토록 힘들게 만들어내는 백자도 작가의 엄격한 내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주저 없이 깨버리니, 권대섭 작가가 1년 동안 만들어 내는 백자 달항아리는 여섯 점 정도에 그친다.


젊은 층, 외국인도 집중하는 조선의 미감
갤러리 이전을 앞두고 첫 전시를 위해 작가는 공사 중인 건물을 여러 번 둘러보았다. 남산의 푸른 숲과 미니멀한 화이트 톤 갤러리 건축의 조화, 주변의 낮은 주택과 그 속에 오붓이 들어앉은 문화 공간의 잔잔한 조화에 마음이 흡족했다. 사실 권대섭 작가는 우리나라만의 달항아리는 그 특유의 형태와 크기 때문에 전 세계 어느 공간에 툭 놓아도 놀라운 존재감으로 시선을 압도하고, 누구에게라도 감동을 준다는 자신감이 있다. “지금까지 많은 전시를 해왔지만, 남산의 새 갤러리 공간을 보고 백자 전시에 딱 어울리겠다 생각했습니다. 제가 원래는 건축을 하고 싶었어요. 공예는 공간 속에 놓이며 상호작용하는 것이니까요. 이곳을 둘러보면서 이런 미니멀한 공간에 백자가 놓였을 때 더욱 멋있고, 제 기분도 관객의 기분도 좋을 것이라고 믿었어요.” 권대섭 작가의 첫느낌처럼 청담동의 한계를 벗어나 남산 숲 아래 새하얀 여백처럼 자리한 박여숙화랑은 이미 새로운 관객층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태원이라는 지역적 특성 덕분에 한국 문화를 궁금해하는 외국인 관객이 백자 전시를 많이 찾아왔다. 우리 미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젊은 관객의 방문 또한 반갑다. “이태원으로 옮겨온 후 요즘 젊은이들이 우리 문화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를 알게 되었어요. 며칠 전에는 BTS의 리더인 RM 씨가 왔습니다. 워낙 조용히 전시를 관람해 아무도 몰랐는데 제가 우연히 전시장에서 보았지요. 너무 진지하게 보고 있길래 인사를 건넸더니,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 작품을 좋아해 베네치아에서 전시할 때도 찾아갔다고 하더라고요. 한 점 한 점 심도 깊게 보며 많은 지식을 기반으로 한 질문을 하는 게 참 신선했어요. RM 씨가 그러더군요. ‘아, 이게 정말 한국이구나!’라고요. 젊은이들이 전시를 통해 그 느낌을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남산 자락의 절대 녹지는 갤러리 건물을 짓기에는 건폐율이 낮은 단점이 있다. 하지만 박여숙 관장은 남산의 자연을 오롯이 끌어들여 테라스와 루프톱이 있는 휴식 공간으로 단장했다.

작은 백자 입호부터 대형 달항아리까지 권대섭 작가의 40년 백자 인생을 총망라하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2층의 수수덤덤은 조선의 미감을 알리는 공예 갤러리 겸 찻집이다.
공예와 차, 머무는 즐거움이 있는 갤러리
이처럼 한국, 특히 조선의 미감을 국내외에 알리는 데 더욱 집중할 계획인 박여숙화랑은 앞으로 한층 다양한 관객층이 두루 즐길 수 있는 전시를 연이어 개최할 예정이다. 남산 아래 너른 테라스와 루프톱까지 갖춘 갤러리 건물에는 기획 전시관, 상설 전시관, 공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예 전시관을 복합적으로 운영한다. “전시실이 세 개 있어요. 지하 1ㆍ2층에서는 권대섭 작가 개인전이 열리고, 1층은 소장품을 전시하는 뷰잉룸이자 제 사무 공간이기도 해요. 창밖 풍경이 아름다운 2층은 공예 전시 공간입니다. 지금은 조하나 작가의 작업을 전시하고 있지요. 관객이 우리 갤러리에 오면 충분히 머물면서 두세 개 전시를 찬찬히 둘러보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2층의 공예 갤러리에는 한국 차를 마시며 휴식할 수 있는 찻집이 곧 문을 엽니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수수덤덤하다고 생각해 찻집 이름도 ‘수수덤덤’이라고 지었지요.” 남산 아래 이태원은 박여숙 관장이 오래 살았고 서울 내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지역이다. 가족이 주변에 거주하고, 몇 해 전 딸이 문을 연 P21 갤러리도 지척에 있어 모녀가 서로 응원하며 마음을 나누는 곳이다. ‘수수덤덤’이라는 이름에는 관객이 남산 아래의 갤러리에서 여유롭게 머물며 자연과 작품을 즐기고, 박여숙 관장이 느끼는 그런 편안한 기분을 더불어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수수하고 덤덤하게, 조선의 미감을 누리는 즐거움이 이곳 이태원의 갤러리에서 국내와 해외로 멀리 퍼져나가기를 기대하는 달항아리 전시는 10월 31일까지 계속된다.


<권대섭 展>
박여숙화랑이 청담동에서 이태원으로 이전하고 첫 번째 전시로 권대섭 작가의 백자 인생 40년을 결산하는 특별전을 엽니다.

일시 10월 31일(목)까지, 무료 전시, 휴관일 없음
장소 서울시 용산구 소월로38길 30-34
문의 02-549-7575

글 김민정 | 사진 이기태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