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F/W 컬렉션에서 선보인 하프 뷔스티에. 남성 재킷의 몸판을 해체, 패치워크해 완성한 것으로, 다양한 스타일링이 가능하다. 이미 완성된 제품 중 최적의 상품을 골라 해체·조합해 새롭게 디자인하는 과정을 통해 래;코드는 독자적 디자인을 창조한다.
일반적으로 3년이 되도록 주인을 찾지 못한 옷은 소각하는 게 패션계 관행이다. 특히 명품 브랜드일수록 행여나 재고가 암시장에서 헐값에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태워버리는 게 원칙. 하지만 그로 인한 손실은 금액적으로나 환경적으로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니 패션 산업에서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여 있는 물품들은 어떤 기업이든 해결해야 할 골칫덩이인 셈.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는 패션 브랜드를 20여 개나 보유하고 있으니 매년 쌓이는 재고의 솔루션이 절실했던 건 당연지사. 어쩌면 ‘재고를 자원으로 삼아 새 옷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은 누구든 쉽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아이디어를 현실화한 패션 대기업은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뿐이다. 비교적 간단해 보이는 이 시스템이 사실상 아무나 시도하지 못하는 빅 프로젝트임을 방증하는 것일 터.
실제로 래;코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장애물은 셀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공급 과잉으로 버려진 것들, ‘재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재고로 만든 옷을 사느니 새 옷을 사는 게 낫지’라는 인식부터 깨야 했어요. 또 ‘패션은 트렌디해야 한다’는 관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죠. ‘이번 시즌엔 이걸 입어야 트렌디하다’는 식의 소구 포인트로 생명을 얻는 패션 산업에서 래;코드는 유행이 지난 옷을 소재로 사용해 만드니 트렌드와 거리가 멀 수밖에요. 또 옷 제작 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비효율성과의 싸움이고요. 전에 없는 시도이기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어려운 점이었어요.” 코오롱인더스트리 FnC 한경애 전무의 회상이다. 그럼에도 극복책을 모색하고, 꿋꿋하게 인류가 좇아야 할 가치의 방향을 제시해온 래;코드는 단지 옷 이상의 문화와 정신을 제안해주는 브랜드로서, 매년 해외 패션&디자인 세미나에 초청받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패션 역사의 모범 사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업사이클링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리;테이블 워크숍을 위한 공간. 백화점 팝업 스토어 이후 폐기한 집기를 활용해 공간을 꾸몄다.
옷의 해체는 래;코드에만 있는 디자인 과정이다.
에코백 만들기 워크숍 결과물.
노들섬의 지속 가능한 패션 스튜디오에서는 옷의 제작 과정을 누구나 볼 수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업이 해야 할 일을 고민한다는 한경애 전무.
단단히 내공을 쌓아온 지난 7년
세상에 업사이클링 브랜드는 수없이 존재한다. 2012년 래;코드를 론칭할 당시에도 어느 정도 개념이 확산되고,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 단위의 작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중고 혹은 재활용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던 때. 래;코드는 업사이클링으로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디자인의 힘’을 전달하자는 게 가장 큰 전략이었다. “오늘날 래;코드가 해외에서 좋게 평가받는 부분이기도 해요. 재고의 단순한 활용이 아니라 옷을 해체하고 조립해 재해석하는 수준이 남다르고, 의상 디자인의 스펙트럼을 넓혔다는 평이죠. 어떻게 보면 대기업으로서 남는 재고의 종류가 각양각색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풍부한 재료 덕분에 얻은 새로운 아이디어들, 이를테면 스포츠와 포멀을 접목하거나 남성 옷을 활용한 여성복, 상의와 하의, 혹은 니트와 패딩의 조합, 안과 밖의 파격적 해체 등 여러 가지 신개념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었지요.” 한경애 전무의 설명처럼 래;코드는 수많은 업사이클링 디자인 아카이브를 쌓아왔고, 이는 그 누구도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는 자산이 되었다. 실제로 래;코드는 다른 기업으로부터 재고 솔루션을 의뢰받으며 예상치못한 수익 구조도 생겼다는 사실! 래;코드가 선도적 입지를 다진 것은 업사이클링 디자인, 즉 환경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다. 단지 옷을 판매하는 것에서 나아가 생산과정에서 미혼모나 난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상생의 가치를 전파하는 윤리적 행동도 한몫한다. 게다가 소비자로 하여금 환경을 생각하게 하는 경험을 제공하며, 의식의 변화를 추구하기까지 최근 업사이클링 산업이 유행처럼 커지는 가운데 래;코드의 진정성이 빛을 발하는 이유다.
노들섬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다
올가을, 래;코드는 또 한 번 새로운 실험을 한다. 9월 말 개장하는 노들섬 복합 문화 공간에 둥지를 틀어 지속 가능한 패션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것. 누구나 와서 래;코드 옷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고, 업사이클링에 대해 경험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으로 이해하면 쉽다. “래;코드의 가치가 한 군데로 모여 좀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노들섬은 한강의 한가운데에서 음악과 젊음이 만나고, 패션과 무관한 문화와 접점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한경애 전무의 말. 브랜드가 지닌 철학과 추구하는 가치를 접하는 공간을 마련해야 해체와 조립으로 만든 래;코드 옷을 어렵게 느낄 사람들이 ‘이 옷이 이렇게 만들어졌구나’ ‘이런 사람들을 돕고 있구나’ 알게 되고, 그 순간 낯선 옷에서 소유하고 싶은 옷으로 인식이 바뀔 거라는 이야기다. 한편으로는 ‘브랜드의 노하우를 공개하겠다’는 대범한 선언이기도 한 셈이다. “래;코드는 가치를 좇아 마음과 행동을 움직이게 하는 ‘무브먼트’를 추구하고,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원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체하고 어떻게 새롭게 만드는지 노하우를 알려주고자 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환경에 이로운 일일 테니까요.” 그는 현재 업사이클링 디자이너든 학생이든 많은 사람이 래;코드라는 플랫폼을 통해 배워나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래;코드는 이곳 노들섬에서 보다 많은 이가 업사이클링을 이해하고, 래;코드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직접 재고 스포츠 점퍼로 가방을 만들거나 폐자동차 시트로 카드 지갑을 만들어보는 업사이클링 워크숍 ‘리;테이블’, 자신의 옷을 가지고 와서 수선이나 업사이클링을 의뢰할 수 있는 ‘박스 아틀리에’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박스 아틀리에는 이곳에서 처음 시작하는 프로그램으로, 바느질 장인에 대한 인식개선을 꾀하고 싶다는 한경애 전무의 바람이 담겼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이 한 시즌 입고 버리는 옷을 만들어냈지만, 사람들은 다시금 옷에 대한 인식을 바꿀 거라 생각해요. 제대로 만든 옷을 사서 아껴 입고, 구멍이 났다고 버리는 대신 고치거나 꿰매 입고…. 다시 바느질에 대해 친밀감부터 느꼈으면 해요.”
래;코드의 행보를 들여다볼수록 참 신기한 기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으레 이윤을 추구하기 마련인 기업으로서 어떻게 이토록 착한 일만 할 수 있을까? 도대체 큰 그림은 뭘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 창출이죠. 실제로 우리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잡지사와 신문사에서 취재를 하고, 일부 방송국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어요.” 즉 ‘환경과 사회적 약자를 위하는 사업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업이 해야 할 일’이라는 신념으로 시작한 일이 결국 소비자의 신뢰와 지지를 얻어 기업의 이윤에 도움을 준다는 것. “7년 전에는 래;코드가 이런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앞으로 7년 후의 모습도 매우 다른 방향으로 사회와 환경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한경애 전무는 밝게 미소 지었다.
매년 여름 프랑스 서남부 레삭Le-ssac 지역의 부아부셰 성 영지 일대에서 열리는 디자인&건축 축제 '부아부셰 여름 워크숍'에 올해 초청받은 래;코드. 열세 명의 수강생이 재고 의류, 낙하산, 자동차 에어백 등으로 옷을 만들어 선보였다.
독일 베를린 팝업 스토어 내 리;테이블 공간. 늘어뜨린 안전벨트를 소재로 열쇠고리를 만드는 시간을 마련했다.
폐카시트로 만든 카드 지갑.
해외에서 더 주목하는 래;코드
자원의 순환, 사회적 약자와의 상생, 혁신적 디자인 등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며 그 결과에 대한 학습 데이터를 쌓아온 래;코드. 그 자산 덕분에 래;코드는 해외에서 열리는 각종 패션&디자인 세미나와 프로젝트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기존 패션 산업 시스템 전반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대안을 모색하는 안티 패션 프로젝트에 매년 참가하는가 하면, 올해는 프랑스에서 열린 디자인&건축 워크숍 부아부셰Boisbuchet에 참여한 것. 그런가 하면 9월 독일의 아트워크 기간에는 베를린 3대 편집매장인 ‘더 스토어’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해외에서 강연할 때 래;코드를 팔로잉하는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하면, 작년 안티 패션에서는 주최자 정도였어요. 그런데 올해는 반 이상이 손을 들더라고요.” 한경애 전무의 말처럼 업사이클링을 비롯해 패션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래;코드는 큰 지지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를 너머 전 세계로부터!
리;테이블체험
카시트 가죽을 업사이클링해 나만의 카드 지갑을 만들어봅니다.
일시 10월 18일(금) 오후 2~4시
장소 노들섬 래;코드 패션 스튜디오
참가비 2만 원(정기 구독자 1만 5천 원)
인원 15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에 참가하고 싶은 이유를 간단히 적어 신청해주세요.
- 가치에 멋을 더하는 업사이클링 패션 래;코드RE;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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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일’은 어떤 면에서 힙한 감성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치기도 한다. 모범생이 연상되는 따분한 인상이랄까? 그런데 래;코드는 이 편견을 깨뜨리고 디자인 힘으로 발상의 전환을 이끈다. 재고를 재활용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잊히는 가치를 되새기는 착한 행동이야말로 진짜 멋진 일이라고 일깨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