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대 설립 이사 故 유용근 씨 가족
의미 있는 행동을 평생 이어가면 가족의 전통이 된다
1 2016년 차남 유병안 대표의 회사 건축집단 MA의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사진작가 신선혜 실장이 찍은 가족사진. 위 수술 이후 유용근 씨의 완쾌를 축하하며 가족 열네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2 유용근 씨의 회고록 <모두가 축복이고 사랑이었다>. 부부가 번갈아 찍은 가족사진으로 표지를 꾸몄다.
3 매년 아이들의 생일마다 사진을 찍어주던 폴라로이드 카메라.
4 1968년부터 매년 촬영한 가족사진.
故 유용근 씨 가족에게는 특별한 사진첩이 한 권 있다. 지난 1968년부터 4월 1일 결혼기념일마다 찍은 가족사진을 모은 것. 결혼 이듬해인 1968년부터 가족은 사진 촬영을 한 해도 거른 적이 없다. 쉰한 장의 가족사진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족이 변화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앨범을 넘기다 보면 세 아이가 차례차례 등장하고, 흑백이던 사진이 컬러로 변화함에 따라 며느리와 사위, 손주들이 하나둘 더해진다.
4월 1일, 가족사진 찍는 날 “아버지 세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열두 살 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결혼기념일은 혼자이던 아버지에게 가족이 생긴 날이었습니다. 서른아홉 나이에 뒤늦게 이룬 가족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던 아버지는 그날을 기록하고 싶어서 가족 사진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3남매 중 차남인 건축집단 MA 유병안 대표는 생전 부친이 가족사진 찍는 날을 하루도 어겨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족이 빠지면 그런대로 촬영했습니다. 그러니 사진을 보면서 이야깃거리가 되더군요. 군 시절에는 휴가를 받아 나와서 군복을 입고 촬영하기도 했고요.” 유병안 대표와 현대자동차 현대다이모스 멕시코 법인장인 그의 형 유병석 씨, 미국에 사는 누나 유리화 씨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각자의 결혼기념일에 매년 가족사진을 찍는다. 평일엔 얼굴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아버지였지만, 매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기간을 정하고 반드시 지켰다. 새해 첫날엔 큰집에서 세배한 후 제주도나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났고, 음력설에는 전통 한정식을 먹었다. 여름엔 별장이 있는 대천해수욕장에서 2주 동안 휴가를 보내고, 크리스마스이브엔 성당에서 자정 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만둣국을 먹고 윷놀이를 했다. 그렇게 가족이 함께한 의미 있는 시간이 집안의 전통이 되었고, 가족 모두에게 평생 간직할 추억을 남겼다.
가족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
유병안 대표는 부친의 미수米壽를 기념하는 회고록 <모두가 축복이고 사랑이었다>를 펴냈다. 가보家寶 같은 가족사진을 작은 사진집으로 만들어 가족, 가까운 지인과 함께 추억을 나누려 한 처음 계획이 4백 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회고록으로 탄생했다. “아버지의 회고록이지만 가족의 역사책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정리해야 가족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든 책이지요.” 유용근 씨는 아들이 반년 넘게 준비한 책의 내용을 모두 흡족하게 확인한 후 자택에서 가족의 손을 꼭 잡고 평안히 눈을 감았다. 가족의 미래는 유용근 씨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순양가헌舜壤家軒’이라는 공간으로 완성된다. 가족 소유의 강원도 횡계 땅에 가까운 지인과 가족이 살 아담한 집 몇 채와 일반인이 숙박할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를 더해 작은 마을을 이룬다. 마을의 중심은 유용근 씨가 생전에 모은 책과 음악 선생님이던 아내 최매희 씨의 LP, 피아노 등을 전시하는 작은 기념관. 그가 유난히 좋아하던 계절인 겨울 3개월만 운영하는 ‘겨울 식당’도 문을 열 것이다. 순양가헌을 직접 설계한 유병안 대표는 50대를 그곳에서 보내며 앞날을 계획할 작정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4월 1일에도 남은 가족은 함께 모여 사진을 찍고 새로운 이야기를 더할 것이다. 글 정규영 기자 | 사진 이종근, 신선혜
꽃잎 그림 작가 백은하 씨 가족
엄마와 딸 사이에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1 백은하 작가, 딸 박예린 양, 어머니 박춘강 씨.
2 조만간 발간할 꽃잎 그림 동화책 <꽃잎 아파트>의 주인공 중 하나인 공작. 화려하게 치장하길 좋아하지만 분리수거는 잘 못한다.
3 엄마와 할머니를 닮아 틈만 나면 글 쓰고 그림 그리길 즐기는 예린이는 요즘 만화 그리기에 푹 빠져 있다.
4 어머니 박춘강 씨가 초등학교 공책에 꾹꾹 눌러 쓴 동화.
5 백은하 작가의 가슴 찡한 엄마 이야기 <크루아상 엄마>.
꽃잎 그림 작가 백은하와 그의 어머니 박춘강 씨 사이엔 언제나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엄마, 그 버스에서 있었던 얘기 좀 해줘요. 난 그 얘기가 정말 재미나” 하고 딸이 말하면, 엄마는 “우리 은하가 어려서 엄청 호기심이 많았어요. 버스만 타면 사람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저 할머닌 집이 어디야? 저 아저씬 어디 가는 거야? 저 언니 가방엔 뭐가 들었어?’ 하며 끝도 없이 질문을 해댔죠. 그때마다 ‘저 할머닌 아들 집에 가고, 저 아저씬 군대에 가고, 저 언니 가방엔 책이 들었어’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줬어요”라고 답한다. 귀찮을 정도로 물어대는 딸에게 ‘넉넉지 못한 형편이라 장난감도 못 사주는데 이야기로라도 놀아줘야지’ 생각했다는 엄마 이야기는 훗날 <크루아상 엄마>라는 가슴 찡한 기록을 탄생시켰다.
호기심 많은 딸과 이야기꾼 엄마 “한번은 엄마가 집에서 키우던 동물 가족들, 그 중에서도 진돗개 ‘해피’ 이야기를 초등학교 공책에 줄줄 적어서 보내주셨어요. 옆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듯 쓰신 글이 너무 재밌고 마음에 남더라고요.” 백은하 작가가 진돗개 ‘해피’와 ‘닭순이’ ‘닭식이’ ‘야옹이’ 등 이름도 정겨운 동물 가족 이야기를 15년 넘게 소중히 간직하며, 정말 친한 친구들에게만 엄마의 공책을 빌려주는 이유다. “엄마는 뭐든 그냥 넘기시는 법이 없어요. 동네 할머니가 예쁜 꽈리를 주시면 초록색 실과 함께 메리야스 박스에 담아 저에게 보내주세요. 그러면 저는 그걸 주렁주렁 엮어 발로 만들어 작업실에 걸어두죠. 제 전시회 때는 큰 부채에 손수 시를 적어 선물로 가져오셨어요. 그 부채는 여름마다 우리 가족의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친구가 됐죠.” 이렇게 뭐든 기록하고 남기는 엄마의 습관은 딸에게, 또 그 딸에게 대물림됐다. 40년간 교회 학교 선생님으로 봉사하면서 써온 엄마 박춘강 씨의 일기는 딸의 그림과 함께 <얘들아, 교회에서 놀자>는 책으로 완성했고, 나이 마흔에 딸 예린이를 낳으며 뒤늦게 엄마가 된 백은하 작가의 육아 일기는 <‘막’ 엄마가 되려는 당신에게>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조카를 위해 쓴 첫 동화책 <사자야, 전화 왔어!>는 딸 예린이가 가장 아끼는 책이 됐다. “예린이가 다섯 살 땐가, 따로 글을 가르친 적도 없는데 저에게 <사자야, 전화 왔어!>를 가져오더니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주는 거예요. 제 첫 동화가 딸이 스스로 읽은 첫 번째 동화가 된 거죠. 너무 신기했어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족 이야기
엄마와 할머니의 이런 재능은 올해 열 살 된 딸 예린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틈만 나면 자신의 생각과 일상을 만화로 그릴 정도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것. 엄마와 함께 하는 ‘이야기 이어가기’ 역시 예린이와 엄마만의 즐거운 놀이다. “코딱지를 치즈 가루처럼 뿌리면 어떻게 될까? 코딱지를 자꾸자꾸 뭉쳐서 축구공으로 만드는 건 어때? 이런 식으로 아이들이 재밌어하는 코딱지 이야기를 시리즈로 이어가는 거죠.” 조만간 발간할 동화책 <꽃잎 아파트>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어릴 적 예린이가 하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공동생활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돼지, 캥거루, 원숭이, 코끼리 같은 동물의 특성과 연결해 재미나게 표현한 것. 엄마가 딸에게, 또 딸이 엄마에게 전해준 이야기가 책이라는 결과물로 한 권 한 권 꽃피고 있는 셈이다. 글 최혜정 | 사진 이경옥, 김규한 기자(인물)
L153 아트컴퍼니 대표 이상정 씨 가족
엄마가 보여준 우물 밖 세상
1 박창숙 여사가 1980년대 사용하던 여권. 민간인 해외여행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도 한국걸스카우트연맹에서 일하던 그는 자주 해외를 오갔다.
2 박창숙 여사가 출장 도중 가족에게 보낸 엽서.
3 1991년 이상정 씨의 프랑스 유학시절.
4 오스트리아의 기념 접시.
5 스위스에서 사 온 기념 스푼.
6 이상정 씨와 딸 이진혜 씨 모녀는 함께 떠난 세계 여행 중 서로에게 엽서를 보냈다.
7 박창숙, 이상정 씨 모녀. 이상정 씨는 올해 91세인 어머니의 생애를 정리하는 중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먼 나라로 출장을 간 어머니에게 받은 첫 엽서를 L153 아트컴퍼니 이상정 대표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긴 노랑 머리 소녀 사진이 있는 엽서였어요. ‘우리 막내딸이 생각나서 보낸다’는 엄마의 손 글씨가 적혀 있었지요.” 엄마 품이 그리운 아이는 엽서에 코를 대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엄마의 향기와 덴마크라는 낯선 나라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엽서는 향기를 싣고 그의 어머니 박창숙 여사는 30대이던 1960년대부터 한국걸스카우트연맹에 근무하며 해외로 학생들을 인솔해 세계 캠핑 대회를 나가곤 했다. “일반인에겐 여권조차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지요. 세계 캠핑 대회에 참가한 전 세계 대원들 앞에서 아이들에게 한복을 멋지게 입혀 단체 무용을 발표한 기억이 납니다.” 한번 해외로 나가면 여러 나라의 행사와 협회를 방문하느라 출장은 한 달 넘게 이어지곤 했다. 박창숙 여사는 새로운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가족에게 엽서를 보내고 작은 기념품을 샀다. “언제나 다른 풍경을 보여주셨지요. 스위스에서 보내주신 소녀의 옷과 머리카락에 곱게 자수가 놓인 엽서도 기억에 남아요. 콘플레이크도 사 오셨는데 입에서 바삭 하고 부스러지는 그 느낌이 어찌나 재미나던지.” 여행지에서 사 온 작은 물병 하나도 그 뚜껑이 달린 모양이 우리나라에서 보던 것과는 달랐다. 어머니가 해외에서 보낸 엽서와 선물로 사 온 기념품, 무릎에 앉히고 들려주던 이야기가 이상정 씨의 시야를 넓히고, 바다 밖 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그는 프랑스 유학 시절엔 틈만 나면 주변 도시를 찾아다녔고, 1990년대 초반에는 갓 태어난 딸, 어머니와 함께 4500여km를 운전해 막 여행이 가능해진 동유럽을 다녀오기도 했다. 출장으로, 여행으로 먼 나라에 닿으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 나라에서 산 엽서에 손 글씨로 내용을 적어 딸의 이름으로 보냈다.
모녀가 함께 보낸 2백75일
이상정 씨는 지난 2017년, 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딸 이진혜 씨에게 ‘세계 일주 3백65일’을 제안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딸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데, 직접 겪지도 못한 외국 사람과 문화에 대해 부정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어보니 20대가 잘 가는 인터넷 사이트에 있는 이야기라더군요.” 딸에겐 난생처음 떠나보는 장기 해외여행이고 스물네 시간 내내 함께 지내는 생활도 두려웠지만, 모녀는 과감하게 떠났다. 그렇게 2백75일 동안 이어진 여행에서 딸은 물론 엄마도 훌쩍 자랐다. “처음엔 멘토 역할을 하려고 했지요. 다른 문화를 접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츰 아이가 맡은 역할이 커지더군요.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아이의 모습에 비로소 동등한 입장에서 아이를 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지요.” 여행 도중 모녀는 쓰자 말자 이야기도 없이 한 테이블에 앉아 엽서를 쓰고 서로의 이름으로 부쳤다. 이상정 씨가 집에 도착해 받은 엽서 중 한 장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우물 속 개구리예요. 엄마는 우물에서 바가지로 나를 꺼내주려 하네요.” 글 정규영 기자 | 사진 이경옥, 김규한 기자(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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