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동의 경사진 골목에 자리한 그의 사무실. 지나가는 이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모형 갤러리 룸을 1층에 두었다. 이 갤러리 뒤편으로는 골목길이 열려 있는데, 골목길 모습과 모형이 오버랩되는 풍경을 그가 참 좋아한다.
낙타는 속도 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리하여 매양 일정한 보폭으로 굼뜨게 발을 옮길 뿐. 하지만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건 사자도 호랑이도 아닌 낙타다. 더디더디 걷다보면 어느덧 사막의 경계에 서 있을 것이다. 마침내 사자별자리에 닿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 도시를 굼뜨게 건너는 낙타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짐짓, 생각했다. 점심시간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생각하던 아이, 지금도 비 온 뒤 웅덩이 진 놀이터를(비오면 아무런 기능이 없어지는 빈 놀이터를) 좋아하는 사람,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떨어져 있지도 않은 도산 공원 나무들을 좋아하는 사람…. 바야흐로 그는 <건축학개론> 이후 가장 대중적인 건축계 아이콘이 되었다. <알쓸신잡 2>와 <어쩌다 어른>에서 지식을 흩날리는 ‘아재 박사’로 떴다고 했다. 인터넷 세상엔 그가 흩뿌린 연애학개론(1단계 데이트 코스-공통의 콘텐츠인 영화를 보고 한 방향으로 가야 하므로 ‘코엑스몰’, 2단계 데이트 코스-인도 폭이 좁으므로 ‘가로수길’, 3단계 데이트 코스-외부 공간이지만 실내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므로 ‘덕수궁 돌담길’)이 떠돌았다. ‘피라미드를 만든 파라오와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를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풀었다 (피라미드의 위치에너지값 : 만리장성의 위치에너지값=1:2.3이므로 진시황이 파라오보다 2.3배 세다는 결론)는 전설 같은 잡설도 책과 인터넷 세상에 고스란했다. 대중적 인기 위에 ‘인문건축학자’ 또는 ‘건축과 삶의 거리를 좁힌 지성인’ 또는 ‘글 쓰는 건축가’로 불리며 그는 대중의 신망까지 그러쥐었다. 쉽고 단정하게 매만진 건축 이론들, 고감도의 비유, 거기에 행간의 깊이까지 갖춘 그의 책들은 건축 인문서로는 유례없이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사이를 넘나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책 제목으로 우리에게 연신 질문해왔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디서 살 것인가?’ 그리고 얼마 전 그가 우리에게 건넨 또 하나의 질문,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어쩌면 인생은 답을 구하는 때가 아닐 것이다. 인생은 질문을 던지는 때다.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이 거대한 ‘오해’의 세계, 서울에서 그가 던진 질문들은 어쩌면 그의 ‘진담’을, 아니 나와 당신의 ‘진심’을 말해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들을 남편처럼 의지하던 할머니, 부모님, 형과 함께 살아 긴장감이 맴돌던 가족에게 ‘온전한 네 가족만의 시간’을 선물한 건 저녁의 워커힐 산책이었다. 행복한 집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그는 ‘화목하게 만드는 건축’을 고심하는 건축가가 됐다. ©양해철
어릴 때 살던 아파트로 다시 들어간 그는 아들과 같은 가게를 다니고, 같은 놀이터를 빈둥거리며 추억을 공유한다. 명절 때 가는 고향처럼 누군가 그를 기억해주는 이가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건 크나큰 위안이다. ©양해철
그와 형만 있어도 가득 차게 느껴지던 마당이었다. 가장 좋아하던 형과 모래를 푸며 놀던 기억은 그에게 또 하나의 별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아래는 그가 어린 시절 그린 그림. ©유현준
기억이 나를 살게 한다
그는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에 이렇게 썼다. ‘나는 공간을 감정과 연관시켜 기억한다. 다양한 공간과 그 공간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한의원 약초 서랍처럼 여러개 있다. (중략)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기억들이 나를 먹고살게 한다.’ “나와 형 둘이 있으면 그림자도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꽉 차던 단층집 마당, 신사시장의 타일 깔린 바닥 면, 좋아하는 친구 몇몇과 오후에 있을 쪽지 시험 공부를 같이 하던 학교 꼭대기 층의 계단참, 아빠가 일요일마다 왁스 칠까지 하며 세차하던 구의동 주택 마당, 형과 토요일마다 용돈을 탕진하고 돌아오던 어린이회관 과학관, 밤샘 졸업 설계를 핑계로 친구들이 자주 자고 가던 2층 양옥 집… 내가 지내온 공간들, 내가 좋아하는 공간들을 바라보는 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요. 공룡의 화석처럼 나를 더 알게 해줄 테니까요.” 그가 교감한 공간, 그리하여 그를 빚어낸 공간. 설계를 시작할 때 그는 그 기억의 서랍에서 필요한 공간을 찾아 대입하는 식으로 작업한다. 그렇게 다양한 기억이 그를 먹고살게 한다. 당신을, 나를 살게 하는 것도 기억일 것이다. 아버지가 타래실을 버텨 잡고 어머니가 그 실을 풀어 실패에 감던 4월의 툇마루, 드럼통에 뿌리 내린 연산홍 가지를 넋 놓고 바라보던 불광동 골목길, 딱 메리야스 한 장 크기의 햇살이 부서지던 예배당 1층, 아이 업고 자장가 ‘브람스 룰라비’를 무한 반복하던 아파트 놀이터…. 내 기억은 이러하다. 당신을 살게 하는 기억은 무엇인가?
당신만의 ‘공간 플레이리스트’
그는 말간 글로 우리의 깊숙한 곳을 자꾸만 건드리고 다독인다. ‘같은 지붕 아래 살기 전까지 같은 공간 안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은 우산을 쓰는 것’ ‘누군가가 우리를 안아줄 때는 팔을 펴서 둥그런 형태를 만든다. 2초 텐트의 곡면 안쪽에 서게 되면 팔에 안긴 것처럼 포근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이끼가 많은 곳은 특별하다. 이끼가 있는 공간은 이끼의 양만큼 소외되고 조용하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탔을 때 둘이 다른 단에 서 있는 사람보다는 같은 단에 서 있는 사람이 더 가깝고, 서로 다른 단에 서 있으면서 서로 안고 있는 경우가 가장 가까운 사이다’ ‘사람 간의 친밀함을 만드는 거리는 45cm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테이블 모서리에 앉으면 적절하게 이 정도 거리가 된다. 모서리 자리가 연애를 부르는 자리다’…. 그의 이야기는 모두 공간으로 통한다. 그리고 사람으로 통한다. “내겐 이런 공간 플레이리스트가 있어요. 위로가 필요할때, 사색하고 싶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문득 들르는 공간. 나를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그런 공간 리스트. 콘크리트 기둥이 1km 넘게 줄 선 틈으로 빛이 떨어지는 한남대교 밑, 구름다리처럼 들려 있어 걷다 보면 물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밀당하게 되는 잠수교, 고층 빌딩에 가려진 ‘등잔 밑 공간’ 남대문교회. 나만의 공간 플레이리스트죠. 어쩌면 이 도시 속에 그런 공간을 많이 아는 사람이 부자 같아요. 주인 없는 숨은 공간도 내 것처럼 쓰는 것. 시간을 들여서 그 공간들을 찾아보세요.” 이상 시대의 마지막 시인 같은 얼굴로 그가 말해준 그것, 우리도 찾아내고 싶다.
“위로가 필요할 때, 사색하고 싶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문득 들르는 공간.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공간 리스트가 있어요. 콘크리트 기둥이 1km 넘게 줄 선 틈으로 빛이 떨어지는 한남대교 밑, 구름다리처럼 들려 있어 걷다 보면 물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밀당하게 되는 잠수교, 고층 빌딩에 가려진 ‘등잔 밑 공간 ’ 남대문교회. 나만의 공간 플레이리스트죠. 이 도시 속에 그런 공간을 많이 아는 사람이 부자 같아요. 주인 없는 숨은 공간도 내 것처럼 쓰는 것. 시간을 들여서 그 공간들을 찾아보세요.”
어디서 살 것인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산 사람들은 얼굴과 제스처, 분위기가 그 사람의 지성·재능·삶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한양대, 국문과, 중퇴’라는 프로필이 배우 윤여정과 너무 잘 맞듯, 김인문이 동국대 농업학과를 나왔다는 게 아주 잘 어울리듯. 연세대, 하버드대, MIT 대학원에서의 건축 공부, 그리고 리처드마이어 사무소에서의 실무…. 유현준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역사 같다. 그러나 그는 이 편견을 짧은 글로 갈음할 뿐이다. ‘나의 인생 경로가 적어도 내가 계획한 길의 모양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열두 시 길로 가려고 하면 두 시 길이 열렸다. 열리는 방향으로 걸었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인생은 차선이 모여서 최선이 되는 것이다’ 마당이나 옥상정원 같은 사적 정주 공간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지만, 빌딩 꼭대기 펜트하우스 같은 데에서 월세받으며 살고 싶지만, 한강이 보이는 유엔빌리지에도 살고 싶지만, 그는 여전히 몇십 년 된 아파트에 산다. “나는 도시가 좋아요. 도시에서 내가 갈 수 있는 데를 찾아보니 아파트를 고를 수밖에 없더라고요. 어릴 적 내가 살던 아파트로 들어가 아들의 기억을 함께 채우고 있어요. 아들하고 나하고 같은 문방구를 다니고, 같은 놀이터에서 놀고, 같은 그네를 타고. 새댁이던 문방구 아줌마가 이젠 50대 중반이 되어 그 문방구를 지키고 있어요. 이렇게 아들과 함께 공간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 좋아요.” 무심과 애정 사이를 휘적휘적 넘나드는 1969년생 닭띠 아빠의 말.
“서울이라는 도시는 내게… 형제 같아요. 내가 강북에서 시작해 강남으로 옮겨가며 성장한 것처럼 서울도 그렇게 지경을 넓혀갔죠. 나와 같이 자라면서 채워져갔기에 서울은 또 다른 나 같죠. 어떨 때 서울을 보면… 슬퍼요. 되게 애쓰면서 살아온 사람을 보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욕망의 도시’로는 내게 와닿지 않아요. 그래서 떠나기 싫은 것 같아요. 계속해서 내 기억과 연결된 곳에 머무르고 싶고.” 되게 애쓰면서 살아온 그일 것 같아, 나는 이 말을 오래도록 되새겼다. “나는 사람 구경을 할 수 있는 좋은 카페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한 발짝만 움직이면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좋아요. 사람들이 내게 좋은 건축에 대해 물으면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라고 답해요. 사람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주는 건축, 좁은 공간에 모여 살아도 스트레스 레벨을 낮춰주는, 화목하게 해주는, 황금 비율을 찾아주는 것이 좋은 건축이라 말하죠. 그걸 찾는 게 나같은 건축가가 할 일이고요. 그렇다고 소통이 무조건 답은 아니겠죠. 반드시 홀로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혼자, 또 함께, 이렇게 적절히 거리를 둘 줄도, 균형을 맞출 줄도 아는 건축이 좋은 건축일 거예요. 그래서 저는 문보다 창문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커튼 하나만 쳐도, 창문 하나만 닫아도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지고, 또 창문 열면 소통이 되는,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창문이 중요해요.” 아,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가 건축 이야기를 하게 해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서 건축론 대신 나뭇가지가 살짝 닿을 정도의 밀도로 떨어진 도산공원 나무를 떠올렸다.
해가 지면 갈 곳 없는 자들의 무대가 되는 놀이터. 그가 우리에게 추천하는 공간 플레이리스트 중 하나다. ©양해철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살면서 모든 순간이 아름다울 순 없다. 순간순간이 아주 가끔 아름다울 뿐이다. 우린 그 순간을 이어서 별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삶에 약간의 별빛만 있다면 우리는 그 별빛들로 별자리를 만들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검은 하늘에서 별들을 찾고, 잇고,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나는 그가 도시를 건너는 낙타일지도 모른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그만의 사자 별자리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당신의 그리운 그것도 기억의 어디쯤에서 제 별자리를 밝히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또는 잊고 있던 도시의 얼굴을 건축가 유현준이 찬찬히 뜯어보고 들려주는 도시 에세이. 그가 좋아하는 1백21곳의 공간에 대한 단문 1백21편, 사진가 양해철이 촬영한 서울 풍경이 실렸다. 와이즈베리 펴냄.
- 건축가 유현준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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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이후 가장 대중적인 건축계 아이콘이라는 이 사람. 터럭만큼의 앎도 없는 나는 그와 건축을 이야기하는 청맹과니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낸 책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속 2층 양옥집, 늦은 밤 공항, 빈 놀이터를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건축가 유현준이 자신을 만든 도시에 부치는 러브 레터가 내게, 당신에게 도착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