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 작가는 자신을 조각가로 정의한다. 두께가 있고 만질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때문. 1992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는 이슬기 작가는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해학적 시선과 기하학 패턴, 쾌활한 색상으로 일상 사물을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한다.갤러리현대와 미메시스아트뮤지엄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에르메스, 이케아 등의 브랜드와 함께 작업했다. 3월 말엔 프랑스 투아르 지역의 아트 센터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왼쪽 ‘우물 안 개구리’, 진주 명주, 통영 누비 장인과 협업, 195×155×1cm, 2018 오른쪽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진주 명주, 통영 누비 장인과 협업, 195×155×1cm, 2018
눈이 시원할 정도로 산뜻한 원색의 배치. 색면 추상화일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색색의 명주와 흰 무명천을 누벼 만든 이불이다. 이슬기 작가의 ‘이불 프로젝트 U’ 연작. 가로 155cm, 세로 195cm인 크기도 딱 여름에 덮고 자는 그것이다. 수평으로 덮는 이불을 갤러리 벽에 수직으로 전시한 풍경 자체도 흥미로운데, 각각의 작품 제목을 알고 나면 재미는 배가된다. ‘우물 안 개구리’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등 익숙한 속담을 인용한 제목을 알고 작품을 다시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칸딘스키의 뜨거운 추상도,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도 아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유쾌한 추상?
꿈꾸는 이불
“작품 제목이 속담이라는 사실을 안 관객은 또다른 작품 제목을 직접 알아맞혀 보려고 합니다. 속담을 먼저 알려주고 그에 맞는 작품을 찾는 일도 재미있어하더군요. 대개 문화권마다 비슷한 의미의 속담이 있어서 해외 관객도 유쾌하게 받아들입니다.” 1992년부터 프랑스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이슬기 작가는 지인이 선물한 명주 누비이불의 찬란한 색에 매료되었다. 한국에 올 때마다 프랑스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누비이불을 파는 곳을 찾았지만, 이제는 그런 이불은 제작하지 않는다는 답을 들으며 언젠가 만들어보리라 결심한 그. 직접 하기엔 어려운 작업이어서 수소문 끝에 누비이불이 생겨난 통영의 누비 장인을 찾아갔다. “우리는 이불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아프거나 몸이 약해졌을 때, 목숨이 다해 죽을 때도 이불과 함께하지요. 지극히 개인적이며 친밀한 사물인 이불에 속담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담긴 이야기를 결합하면 한 줄 한 줄 염원하듯이 실을 박아 넣는 장인의 정성이 마치 주술처럼 작품을 통해 전달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의 꿈에도 영향을 미치겠지요.” 2014년 파리 국립그래픽조형미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프로젝트를 시작한 후, 그해 열린 광주비엔날레에서 제시카 모건 총감독의 의뢰로 제작한 작품이 호주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었다. 안팎으로 좋은 반응에 힘입어 그는 이 주술적이면서도 유쾌한 작업을 계속했고, 작년 11월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 <다마스스>를 열기도 했다. 한 줄 한 줄 누빈 색색의 진주 명주를 연결해 기하학적 구조로 속담을 표현하고, 흰 무명으로 테두리를 두른다. 한눈에 들어오는 속담. 가령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 벗어나려는 개구리의 수직적 움직임을 세로 누빔으로 표현하고, 우물을 누르며 개구리를 가로막는 우물 덮개를 가로 누빔으로 형상화했다. 개구리를 갈색으로 표현한 이유는 수없이 튀어 오르다가 색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2월호 표지 작품은 부엉이의 눈과 눈썹, 날개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부엉이 살림’. 보기만 해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색의 배치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부쩍부쩍 느는 살림을 이르는 말이다.
전시장 바닥에 은행잎을 가득 채워 색과 소리, 향기를 즐기도록 한 ‘은행잎 프로젝트 B’.벽에 설치한 작품은 ‘이불 프로젝트 U’ 중 ‘싹이 노랗다’.
에르메스와 협업한 캐시미어로 제작한 한정판 누비이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2017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 전시했다. 이미지 제공 에르메스
멕시코 오악사카 지방 산타마리아 익스카틀란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바구니를 만드는 마을 사람들과 이슬기 작가. 과거 이 지역에서 사용하던 익스카테코어語를 쓰는 사람은 현재 오직 네 명만 남아 있다. ©Seulgi Lee, ADAGP - Paris, France.
마을 사람들이 만든 바구니에 프랑스 금속 공예가가 황동으로 만든 다리를 결합한 작품 ‘W/ Hua(흰)2’ .©Seulgi Lee, ADAGP - Paris, France.
예술은 모든 것이다
이슬기 작가가 속담에서 착안한 도안을 만들어 공예가 정숙희 대표가 이끄는 오색 공방에 보내면 장인들이 색이 맞는 진주 명주를 누빈다. 서로 방향이 달라 입체가 된 누비천을 잇는 극히 까다로운 작업은 통영 누비장 조성연 선생의 몫. 지역 공예 장인과 협업하는 과정 역시 그의 작업에선 중요한 부분이다. 이슬기 작가는 통영의 누비장 외에도 세계 각지의 수공 예 장인과 함께 일상의 물건을 변형해 작품으로 만든다. 작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선보인 ‘바구니 프로젝트 W’ ‘나무 체 프로젝트 O’ 등이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다. ‘바구니 프로젝트 W’는 속담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입말 문화를 재조명한 작업. 멕시코 오악사카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만든 바구니에 프랑스 금속 공예가가 만든 다리를 붙이고, 마을 사람들이 쓰는 익스카테코Ixcateco라는 멸종 직전의 언어로 제목을 붙였다. ‘나무 체 프로젝트 O’는 프랑스 장인이 만든 나무 체의 둥근 테두리와 칸막이를 조합해 ‘어’ ‘우’ ‘야’ 등의 글자처럼 보이도록 한 작업. 이슬기 작가는 이를 “사물을 말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전시장 밖에서도 이슬기 작가가 장인과 함께 만드는 ‘말하는 사물’을 만날 수 있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ès의 의뢰로 캐시미어를 통영 장인들이 누빈 작품을 2017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 전시했고, 이케아 IKEA가 진행하는 ‘아트 이벤트 2019’의 일환으로 인도에서 작업한 러그는 올봄 한정 판매할 예정. “이번엔 ‘물속의 물고기’라는 프랑스 속담을 제목으로 썼습니다. ‘엄청’ 행복하다는 의미지요.” 그의 다음 프로젝트는 모로코 작은 마을에서 쇠똥과 지푸라기로 구워낸 테라코타 그릇이다. 일상의 물건이 이슬기 작가의 눈과 손을 거치면 예술이 된다. 갤러리 바닥 가득 은행잎을 깔아놓거나 (‘은행잎 프로젝트 B’), 전시장 벽을 저녁노을 색으로 칠하고 같은 색깔의 채소 수프를 관객과 나누어 먹기도 한다(‘저녁노을 수프 프로젝트’).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필요에 의해 한 모든 활동이 예술입니다. 여전히 예술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요. 호기심으로 사물을 보고,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직감적ㆍ본능적 활동을 시대와 제도에 짓눌려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이슬기 작가는 해학적 시선으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적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일반성’에 대한 근본 질문을 던집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이슬기 작가의 독특한 개성에 반해 전시를 추진했습니다.” _ 갤러리현대 도형태 대표
- 조각가 이슬기 이토록 유쾌한 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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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고 자는 이불을 전시장 벽에 걸고, 바닥엔 노란 은행잎이 가득하다. 대관절 예술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기 이전에 너무나 유쾌한 작품들. 이슬기 작가의 눈과 손을 거치면 별것 아니던 일상 사물이 예술이 되어 말을 걸기 시작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