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역사문화연구회 문찬인 소장
유교, 불교, 선교가 꽃핀 화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를 꽂은 범왕리 푸조 나무 아래 계곡에서 만난 문찬인 소장. 고운 선생은 이 계곡의 세이암에서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청학동은 어디에 있을까? <한국인의 이상향 청학동> 이라는 책을 쓴 하동역사문화연구회 문찬인 소장은 한국인의 본향인 하동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몰두해왔다. 옛 선비의 시와 글에 숱하게 등장하는 지리산 청학동에 관한 자료를 종과 횡으로 수집하고 정리해 역사가나 학자가 아닌 보통 여행자도 하동 인문학 여행을 위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두루 접할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 선인이 옥베개를 밀치니 몸과 세상이 홀연히 천년일세(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 仙人推玉枕 身世欻千年).’ 1614년 실학자 이수광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에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리산에 대해 쓴 시를 공개했지요. 이곳 하동을 호리병 속의 별천지로 묘사한 바로 그 유명한 시입니다.” 하동을 묘사하며 쓴 이 시는 중국 시진핑 주석이 인용해 더욱 유명해졌다. 이번 취재 여행은 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린 기간과 겹쳤지만, 하동의 하늘만큼은 학이 날 듯 푸르러 바깥세상의 오염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문찬인 소장은 도시에서 살다 부인의 암 발병 후 깨끗한 환경을 찾아 화개골로 이주했는데, 부부가 20년째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하동은 주민에게나 여행자에게 나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보호막이 세상의 오염과 근심으로부터 지켜주는 것 같은 호리병 속 별천지다. 문찬인 소장은 인문학 여행을 삼신동 계곡에서 시작하라고 권유했다. 고운 선생이 직접 글을 새겼다는 ‘삼신동’ 바위를 중심으로 갈라지는 세 곳의 길을 따라 유교, 불교, 선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하동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가 흘러간다. “유교에서 유학의 종장宗匠 중 첫 번째로 모시는 분이 고운 최치원 선생입니다. 고운 선생이 하동에서 30년 넘게 살다가 90여 세에 속세를 떠나면서 ‘이 지팡이가 살아나면 나는 신선이 되리’라는 말을 하고 범왕리 푸조나무에 자신의 지팡이를 꽂았다고 해요. 그리고 세이암이라는 바위에서 계곡물로 속세에 더러워진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갔지요. 아마도 불일폭포 방향으로 갔겠지요. 이후 원래 나무가 죽고 새싹이 돋아나 5백 년간 이렇게 큰 나무로 자라니 하동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쌍계사는 금당 영역과 대웅전 영역의 두 공간으로 나뉜 특이한 가람 구성이다. 대웅전 앞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신라의 고승 혜소의 공덕을 기린 탑비로, 고운이 직접 글씨를 쓴 국보 제47호다.
두 개의 계곡이 흐르는 쌍계사를 관통하면 청학동의 문이 숨어 있다는 불일폭포로 향하는 길이 이어진다.
계곡 따라 흐르는 인문학
방향을 바꿔 쌍계사로 향하면 아름다운 경내에서 고운 선생의 필적이자 국보인 ‘진감선사대공탑비’와 쌍계석문 등 유적을 둘러본 후 불일폭포로 올라갈 수 있다. 감춰진 비밀의 문을 찾는 사람만 이상향인 청학동을 볼 수 있다는 불일폭포에 이르는 동안 신선이 된 고운 선생이 청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환학대, 말을 타고 다니면서 말 발자국을 남겼다는 마족대 등을 지나면서 선교의 전설을 따라가는 탐험 여행이 계속된다. 삼신동 계곡 위쪽 산속에 자리한 칠불사에는 가야 김수로왕의 허 왕후가 낳은 왕자 열 명 중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칠불사는 우리나라 차 문화의 중요한 유적지로, 조선 후기의 승려이자 학자인 초의선사가 칠불암에서 제다와 차 생활에 관한 내용을 집대성한 <다신전>을 완성해 우리나라의 다도 문화를 이끌었다. 또한 칠불사의 아자방은 한자 ‘아亞’ 자 모양의 구들에 한번 불을 지피면 49일에서 1백 일간 온기가 유지되는 과학적으로 설계한 온돌로, 세계 건축대 사전에 등재될 만큼 신비로운 건축법의 실화다. “이처럼 하동의 화개골에는 유교, 불교, 선교의 수많은 이야기가 흘러내립니다. 범왕리 푸조나무 아래쪽 계곡을 따라가는 좁은 산책로인 ‘서산대사길’을 따라 걸어 보세요. 얕은 절벽이지만 소沼가 세 군데나 있고 풍경이 아름다워서 한 시간 반 정도 쉬엄쉬엄 걷기에 좋습니다. 특히 새순이 돋아나는 봄이 좋아요. 얼음물이 깨지면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소리, 계곡이 이야기하는 묘한 역사와 전설이 복합적으로 얽혀 내 귀에 하나씩 스며드는데, 미처 다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지요. 서산대사도 이 길을 지났고, 보부상들도 이 길을 따라 장사를 떠났으니 그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며 이 길을 따라 하동의 역사를 산책해보세요.”
청학동 전통 서당 정병호 훈장
글을 읽고 자연을 거니는 내면의 여행
30년 전 청학동 전통 서당의 훈장을 역임한 정병호 훈장은 타지에서 전통 교육을 마치고 몇 년 전 다시 청학동으로 돌아와 전통 서당에서 기거하며 마을 아이들에게 유학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해발 800m의 산속은 초겨울에도 푸른빛이 감돈다. 흔히 청학동또는 도인촌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70여 년 전부터 갱정유도更定儒道(강대성이 창시한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수련을 하다가 자연스레 마을을 이루었다. 선대 주민들은 초가집에서 머리를 땋고 한복을 입고 서당에서 유학을 배우는 전통 생활을 해왔다. 청학동 전통 서당 정병호 훈장은 3대째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제궁에서는 사월 초파일과 시월 초파일, 창도자를 기리는 8월 16일에 삼대제를 지냅니다. 24절기에는 정화수를 올리고 지성을 드리지요. 그 제단 아래쪽에 전통 서당이 있습니다. 마을 주민이 다니는 서당으로, 청학동의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은 매일 와서 두 시간씩 글을 읽고 중ㆍ고등학생은 학교 수업이 없을 때 서당에 옵니다.” 마을 아래쪽에도 사설 서당이 몇 곳 있지만, 갱정유도 주민 1세대부터 이어져온 유일한 마을 서당인 이곳은 전통문화를 보전하기 위해 하동군청에서 지원하고 있다. “청학동 마을 주민의 아이들이 학교교육을 받는 것은 아무리 산중에 살더라도 사회와 소통하는 길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대신 서당에서는 <사자소학>부터 <천자문> <학어집> <명심보감> <소학>과 <대학>까지 사서삼경을 읽으며 유가의 글을 배웁니다. 서당에 오면 훈장에게 인사를 하고 “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으니 그 은혜는 하늘과 같고 그 은덕 두텁기는 땅보다 두텁다”라는 <사자소학>의 글을 매일 소리 내어 읽은 후 자신이 학습해야 할 부분을 또 읽습니다. 습여성성習與性成, 즉 유치원생부터 자기 마음을 다스려 온전한 선을 발산하는 행동 습관을 들이는 교육이지요.”
삼성궁은 한풀선사가 1983년부터 고조선 시대의 소도蘇塗를 복원해 신선도를 수행하는 도량이다. 수행자는 삼법 수행을 하고 전통 무예와 선무를 익힌다. 여행자는 입장료를 내고 경내를 둘러볼 수 있다.
청학동 전통 서당 입구. 주민들이 다니는 마을서당이다.
선대 주민들의 청학 전통 서당 수업 모습. 이곳은 갱정유도 주민 1세대부터 이어져온 유일한 서당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교육
우리 전통에서 서당은 기초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마을마다 서당에서 준수한 학생을 택해 국립학교인 향교로 보내거나, 향교가 멀 경우 사립학교인 서원에 가서 공부를 했다. 어릴 적부터 서당에서 기초 학문의 습관을 잘 들여야 학문이 높아질수록 언행과 마음이 합을 이루는 인성을 갖추게 된다. “그래서 서당에서는 글씨를 안 쓰는 곳이 없습니다. 붓으로 글씨를 쓰면서 내면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행동을 표출하게 하는 교육입니다. 서당에서는 글을 많이 배웠는지 적게 배웠는지, 외웠는지 못 외웠는지를 따지지 않지요. 오늘 못 했으면 내일 하면 되니까요. 대신 오늘 읽은 글을 충분히 인식하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서당 교육입니다.” 주민이나 여행자 누구든 언제든지 전통 서당을 방문하고 교육에 참여할 수 있다. 실제로 이곳을 찾아와 <주역>까지 읽은 사람도 있다. 훈장이 늘 서당에 상주하니 여행길에 들러 따뜻한 차 한잔하며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짧은 담소를 나누어도 좋다. 또 마을 아래 작은 도서관, 붓글씨를 쓰는 서실, 화상 교육관을 갖춘 청학서실을 방문할 수도 있다. 정병호훈장 역시 청학서실을 자주 이용한다. 전통 서당에서는 훈장이지만, 청학서실에 가면 붓글씨를 쓰는 학생이 되기도 하고, 통신사 지원으로 운영하는 화상 교육관에서 원격 서당의 훈장이 되기도 한다. 도서 벽지나 도시의 소외 계층 아이들과 화상으로 연결해 우리 전통의 글과 예절을 가르쳐주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자동차로 청학동까지 올 수 있지만 우리 선대는 청학동에서 화개와 악양까지 재를 넘어다녔습니다. 악양으로 넘어가는 회남재 숲길은 지금도 참 아름답지요. 총 6km 정도로, 왕복하는 데 네 시간 정도 걸립니다. 요적한 숲에서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려오고, 높낮이가 심하지 않은 평탄한 흙길이니 아이들도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본디 선하다고 본다. 다만 세상에서 듣고 보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흐려지기 쉬우니 늘 소리 내어 좋은 글을 읽고, 힘주어 글씨를 쓰고, 때때로 요적한 자연을 거닐며 마음을 닦아내라고 가르친다. 하동군청과 정병호 훈장이 뜻을 모아 청학동 전통 서당의 문화를 이어가는 데는 주민과 여행자를 위한 유교의 이러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시인, 박경리문학관 최영욱 관장
한국 문학의 수도를 찾아서
최참판댁 사랑채에 오른 최영욱 박경리 문학관장. 1만 3천 평 규모에 한옥 14동으로 실제 사람이 사는 집처럼 지은 이곳을 해마다 60~7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지리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모아 남해로 흐르던 섬진강이 악양에 이르러 거대한 산의 맥을 끊고 선 차진 들을 이룬다.” 최영욱 박경리문학관장은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 들판을 이렇게 묘사한다. 80만 평 들판을 병풍처럼 두르는 지리산 능선도, 잔잔하게 흐르는 섬진강도 그 선이 모난 데 없이 참으로 여유롭고 넉넉하다. 봄이면 보리가 바람에 푸르게 일렁이고, 가을에는 황금빛 벼가 가득하다. 사계절 따스하게 볕이 드는 이곳에 <토지> 속 최참판댁과 저자 박경리 선생의 유품을 모은 박경리문학관이 자리한다. “<토지>가 소설뿐 아니라 KBS 드라마로도 인기를 끌고, 1994년 10월 완간되면서 사람들이 평사리를 많이 찾아왔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들판과 섬진강, 지리산이 다 있는데 정작 최치수와 서희가 살던 최참판댁은 없었던 거죠. 그래서 1998년부터 이곳에 최참판댁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에 묘사된 대로 사랑채 담장엔 능소화를 심고, 별당엔 해당화를 심었지요.” 하동에서 나고 자란 시인인 최영욱 관장은 2001년 최참판댁 완공을 앞두고 원주로 박경리 선생을 찾아갔다. 최참판댁의 활용 방안을 고민하다 행정과 지역 문학계가 접점을 찾은 것. 이곳을 배경으로 문학제를 개최해 박경리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후진 양성을 하려는 시도였다. 처음엔 “내 이름으론 아무것도 하지 마라”며 거절하던 선생은 그해에만 원주로 일곱 번을 찾아간 최영욱 관장의 성의에 ‘토지 문학제’와 ‘평사리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허락했다. 그 후 2004년 준공한 문학관도 애초엔 작가의 이름 대신 평사리문학관으로 이름 지었다. 해마다 봄에는 안도현ㆍ정호승ㆍ신달자 등 시인을 초청해 막걸리 한잔하며 시를 낭송하는 ‘달빛 낭송회’를 열고, 가을에는 토지 문학제를 개최한다. 그 밖에도 북 콘서트 등 크고 작은 행사를 열어 문인과 지역 주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박경리문학관. 전통농업문화전시관으로 쓰던 건물을 고쳐 문학관으로 꾸몄다. 선생의 유품과 갖가지 책자, 초상화, 사진 등을 간결한 구성으로 전시한다. 건물 앞 마당에 박경리 선생의 동상이 아담하게 서 있다.
북천에 자리한 이병주 문학관 내부. 2008년 개관한 이곳에서 이병주 국제문학제가 열린다.
산과 강에 새겨진 우리 민족의 이야기
<토지> 외에도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 산맥>, 김동리의 <역마>, 김훈의 <칼의 노래> 등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 하동을 배경으로 쓰였고, 수많은 시인이 이곳의 자연을 노래했다. 섬진강 백사장이 내려다보이는 하동공원 섬호정 일대에는 하동을 노래한 문인의 시비를 세워 이들을 기린다. 소설가 이병주와 시인 정호승, 정공채,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고향이기도 한 하동은 한국 문학 수도首都를 자임하는 문향文香의 고장이다. 하동군은 지난 2008년 소설가 이병주의 고향인 북천에 이병주문학관을 세우고, 매년 국내외 작가와 문학 애호가를 초청해 ‘이병주 국제 문학제’를 연다. 소설가 공지영은 “박경리의 <토지>가 모성적 글쓰기로 나를 매혹시켰다면 이병주의 <지리산>과 <산하>는 내게 남성적 글쓰기의 호쾌함을 알려주었”다고 썼다. “풍광도 수려하지만, 섬진강과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아픔과 상처가 깊이 새겨진 곳입니다. 가난한 민중이 악법을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고, 민족 전쟁으로 좌와 우의 이념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지요. 그 피를 머금고 섬진강은 잔잔히 흐릅니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문인 중 지리산과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 작품 하나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최영욱 관장은 지리산과 섬진강, 평사리 들판의 아름다운 풍광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최참판댁 근처 한산사에서 30분 정도 산길을 오르면 도착하는 고소산성을 추천한다. 지리산 형제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섬진강을 만나 끊기면서 만든 절벽 위에 자리한 성터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하동 여행의 백미라 할 만하다. 소설 <토지>의 등장인물 구천이가 평사리들판을 내려다보며 등을 기대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소나무를 연상시켜 ‘구천이 소나무’라 이름 붙인 소나무 너머 전망이 특히 아름답다. 강바닥이 높아져 소설 속 인물들이 떠나고 다시 되돌아오던 섬진강 물길은 더 이상 이용하지 못하지만, 지리산을 가로지르는 육로 교통의 눈부신 발전으로 갈수록 많은 관광객이 문향을 찾아 이곳에 모여들고 있다.
소설 역마의 옥화주막 이명숙 주모
구경 한번 와보세요~ 오시면 모두 모두 이웃사촌!
지난 2016년부터 화개장터 건너편에 자리한 ‘소설 역마의 옥화주막’ 초대 주모로 일하는 국악인 이명숙 씨. 주막을 운영하며 손님을 위해 가야금 병창 공연을 선보인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하동의 화개장터를 꼭 집어 영남과 호남이 만나는 곳이라 했다. 가수 조영남의 노래가 있기 훨씬 전부터의 일이다. 지리산 화전민이 농사짓고 캐낸 약초와 산나물, 섬진강에서 잡아 올린 재첩, 남해의 해산물이 한데 모이고, 호남 소리꾼과 영남 춤꾼이 함께 어울리는 곳. 화개장터에선 장날이 아니더라도 주막에서 맑고 시원한 막걸리를 한잔 걸치며 싱싱한 활어회를 맛볼 수 있다. 우리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김동리의 <역마>는 화개장터, 그중에서도 옥화주막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가운데도 옥화네 주막은 술맛이 유달리 좋고 값이 싸고 안주인, 즉 옥화의 인심이 후하다 하여 화개장터에서는 가장 이름이 난 주막이었다.” 2014년 큰불이 난 후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장날이 따로 없이 매일 장이 서는 장터의 활력은 여전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지리산과 섬진강, 다도해가 만나는 곳답게 화개장터에선 지금도 겨우살이ㆍ까마중ㆍ꾸지뽕나무 등 온갖 국산 약초와 파래ㆍ미역ㆍ김 등 해산물을 다양하게 판매하는데, 특히 약초는 하동군이 국산만 판매하도록 엄격하게 관리한다. 가을엔 깊은 산에서 자란 능이와 송이를 사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노점 앞을 서성이자 먹어보라며 약초를 우린 차와 악양 대봉감으로 만든 다디단 곶감이며 감말랭이를 듬뿍 집어주는 시장 사람들. 화개장터에서 강 반대편으로 찻길을 건너면 ‘소설 역마의 옥화주막’이 눈에 띈다. 테이블이 여럿 놓인 바깥채 안쪽에는 초가로 지은 안채가 자리한다. 영화 <역마>를 촬영할 세트장으로 지은 곳이지만, 제작이 보류되며 활용 방안을 고민하던 하동군이 주모를 공개 채용해 운영을 맡기기로 했다. 채용 조건 중 하나가 ‘국악 공연이 가능할 것’이었는데 근거는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 육자배기들”이라는 소설 속 구절이었으리라.
꽃샘추위가 끝나고 봄으로 접어들면 하동 화개엔 화사한 벚꽃이 지천이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십리벚꽃길’은 사랑하는 남녀가 손을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 해서 ‘혼사길’이라고도 한다. 매년 4월엔 화개장터벚꽃축제가 열린다.
맛 좋은 막걸리로 소문난 소설 속 주막처럼 ‘소설 역마의 옥화주막’에선 직접 담근 동동주가 유난히 맑고 시원하다.
화개장터의 화룡점정, 옥화 주모
하동 출신 국악인 이명숙 씨는 지난 2016년부터 옥화주막의 초대 주모가 되어 이곳을 운영한다. 작지만 야무진 몸씨에 카랑카랑한 목소리. 주방과 주막 안을 가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그는 예약 손님이 있거나 일손이 달리지 않을 때는 마루에 앉아 특기인 가야금 병창을 한 곡조 뽑는다. “화개장터의 옛 정취를 찾아 많이들 오시지요. 벚꽃 피는 봄에는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장터부터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길 풍경은 기가 막히지요. 길 양쪽으로 심은 벚꽃나무가 터널을 이루는데, 꽃비라도 내리는 봄날이면 ‘내가 무슨 복을 받아서 매년 이런 걸 보나’ 합니다.” 하동에서 태어났지만 국악은 부산에서 배웠다. 전축으로 늘 흥부가를 틀어놓고 계시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판소리를 들으면 늘 가슴이 뛰었죠. 하지만 경상도 토박이라 말투를 고치기가 어려워 판소리를 포기했습니다. 대신 가야금 병창을 배웠지요.” 바다 건너 제주에서 결혼해 국악 불모지인 그곳에서 자기 키보다 가야금이 더 큰 학생들에게 병창을 가르쳐 전국 학생 국악경연대회에서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13년 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명숙 씨는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국악 공연을 하고, 하동 읍내에서 전통 음식점을 운영하다 소설 속 옥화처럼 솜씨 좋고 인심 후한 안주인이 되었다. 하동 자랑을 청하자 신에 겨워 말을 잇는 그. “하동 구석구석 가볼 만한 곳이 참 많습니다. 신흥마을과 의신마을을 잇는 서산대사길은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도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친 서산대사가 열다섯 살에 승려가 되어 오가던 길인데, 산세가 더없이 아름답지요. 의신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솔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면 대성마을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에도 주막이 두 채 있습니다. 가을이면 단풍 구경을 가곤 하지요. 그리고 섬진강 재첩을 먹을 땐 꼭 재첩회를 시켜 드셔보세요. 그렇게 달고 맛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도예가 길성
자연을 닮은 그릇, 자연을 닮은 사람들
손님이 찾아오면 도예가 길성은 작업 공간 옆에 마련한 다실 ‘여여헌’에서 직접 차나무를 재배해 만든 차를 대접한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하동 동남쪽 진교면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화개, 악양 지역에 비해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은 아니지만, 그릇 빚는 도예가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흙이 지천인 고장이다. 백련리의 통일 신라 시대 가마터를 비롯해 유서 깊은 가마터가 진교면 곳곳에 산재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하동 일대의 도공 대부분이 일본으로 끌려가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들이 만든, 아무렇지 않게 생긴 사발이 바다를 건너가 ‘이도다완井戶茶碗’ 또는 ‘고려高麗다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일본의 국보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고장인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만든 그릇인지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도자기를 처음 만드는 사람은 대개 자신도 모르게 사발 형태를 만들곤 합니다. 흙을 다루는 것이 익숙지 않고, 물레 속도를 맞추지 못해 모양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흙의 성질을 모두 이해한 도공이 마지막으로 만드는 것 역시 사발입니다. 수공을 최소한으로 가미해 흙이 지닌 순수한 성질을 가장 잘 표현한, 흙을 완전히 이해한 후에 만들 수 있는 그릇이니까요.” 도예가 길성은 하동 진교면 백련리의 한 폐교를 고쳐 마련한 길성도예에서 딸 길기정 작가와 함께 4백여 년 전 끊긴 이도다완의 맥을 잇고 있다. 경북 경주와 경기 이천, 충북 단양 등 전국 유명 도요지에서 작업하며 도예에 쓰는 다양한 흙과 기법을 섭렵하던 그는 우연히 이도다완 실물을 접한 후 재현하는데 매달렸다. 이곳에 정착한 건 2001년의 일. 좋은 흙 외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지난 4백 년간 풀리지 않던 이도다완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다름 아닌 하동의 흙이었다고 말한다. “이도다완의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비파枇杷색이라 부르는 노랗고 붉은빛, 굽 언저리와 아래에 보이는 오돌토돌한 매화피梅花皮, 표면의 균일한 육각형 구조 등이지요. 이 곳의 흙으로 찻잔을 만드니 그 모든 것이 인위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태를 만든 후 유약에 담가 가마에 단벌 소성하는 최소한의 과정만으로 이도다완의 특성이 고스란히 재현되었지요.”
길성 작가가 재현한 이도다완. 하동에서 나는 흙만으로 형태를 잡고, 유약을 입혀 단번에 구워낸다. 인위적인 손길을 최소한으로 제한한, 흙의 본래 성질에 가장 가까운 그릇이다. 처음엔 흰색에 가깝던 찻잔의 색깔이 오래 사용하면 차를 머금어 노랗고 붉은빛으로 변한다.
하동송림공원. 조선 영조 21년(1745)에 당시 도호부사 전천상이 섬진강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한 소나무 숲이 오늘날 전국에서 제일가는 노송 숲이 되었다.
차와 사람의 맛
길성 작가는 작업장 근처에 자라는 찻잎으로 직접 차를 만들어 손님을 접대한다. 찻잔은 투박한 생김새와 달리 감촉이 무척 부드럽고 크기에 비해 가벼우며 찻물을 따르면 그 빛깔이 더욱 오묘하다. 근방 금오산 전망대에서 목도한 일출 장면에서, 남해 바다 위로 해가 비친 연무가 이런 빛이었던가. 부친과 함께 작업하는 길기정 작가는 이도다완의 가치가 높은 이유로 자체의 독특한 미학도 있지만, 무엇보다 찻잔으로서 기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칫 많이 마시면 독이 될 수 있는 차 성분을 다공질 표면이 흡수하고, 차맛을 순하고 부드럽게 만든다. 열전도율이 낮아 쉽게 뜨거워지지 않고, 차를 담아두면 오랫동안 따뜻한 성질 역시 찻잔에 걸맞다. 공방에 틀어박혀 도자기 빚고 굽느라 바빠 여유롭게 나들이할 겨를이 없다는 부녀지만, 과거 하동포구 80리 뱃길로 잘 알려진 하동포구길과 7백여 그루 노송이 빼곡하게 우거진 하동송림공원, 근처에 넓게 펼쳐지는 섬진강 백사장은 하동을 찾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드라이브 코스다. 사철 꽃이 피고 풍광이 아름답지만 가을엔 물 색이 맑아 더욱 좋다. 도자기 만들고 좋은 흙을 찾느라 제주 빼고는 전국 각지를 다 다녀봤다는 길성 작가는 그래도 하동만 한 곳이 없더란다. 큰 홍수나 태풍이 왔다는 소식에 바깥을 내다보면 나뭇가지 몇 개가 부러졌을 뿐, 한겨울에도 볕을 쬐면 금세 따뜻해지고, 지리산과 섬진강, 다도해에서 나는 다종다양한 을거리가 풍부하다. 기후가 좋고 물산이 풍부하니 사람들 마음이 여유로운 것은 당연지사. 앉은 자리 어디서나 차를 권하고 함께 마시니 서로 나누는 이야기와 인정도 차 맛처럼 깊고 은근하다. “강 하나 건너고 산하나 넘으면 사람들 말투가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들 인심도 참 많이 변합디다. 하동은 사람이 참 좋아요. 사람들 사이에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 하동 사람의 하동 이야기 하동에 살어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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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할 것 없이 하동 사람들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찻물부터 끓인다.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나눈, 지리산과 섬진강, 다도해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성한 하동의 문화유산, 사철 따스한 햇살처럼 온화한 사람들의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