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 절골, 정원 소요 코스의 반환점인 계곡 사이에 다리가 있는 풍경이다. 계곡이 깊고 수직 절벽이 많아 인간의 발길이 닿기 어려워 소나무를 비롯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수령이 오래된 극상림의 구성이다. 가을의 단풍 색깔이 노랑에서 짙은 적색까지 다양한 농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다시 한번 우리 곁에 있는 정원의 개념을 상기해보자. 예로부터 한국의 정원은 거대하지 않았고 관리와 유지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소박하고 실용적인 규모로 만들었으며, 상대적으로 부족한 경관은 집 밖의 아름다운 자연을 빌리는(차경) 지혜를 발휘했다고 첫 번째 연재 글에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우리 곁에 있는 정원은 직접 가꾸는 수고를 덜고 집 가까운 곳에 있거나 차량으로 접근하기 용이하며, 구경하는 데 비용과 제약이 많지 않은 정원이나 공원, 수목원, 자연의 숲이나 녹지 공간이면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호에는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듯해서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구경하기 쉬운 비밀의 정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옥계유원지 위에 위치한 침수정의 4월은 한 장의 사진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 많다. 사진의 왼쪽 윗부분에 있는 조그만 협곡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고, 가운데 너머에 폭포가 있다. 그런데 정작 정자 출입을 막아 절경을 감상할 수 없어 안타까움을 느낀다.
신의 정원, 시간의 정원, 돌과 물의 정원
국내외 여행을 많이 다닌 분이라면 사실 대한민국의 대중교통과 도로 사정이 세계적 수준이라는 것을 알것이다. 지금도 좁은 국토를 씨줄과 날줄로 엮는 도로공사는 여기저기에서 진행 중이며, 땅값 보상이 쉽고 민원이 비교적 덜 발생하는 산중을 뚫어가며 도로를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16년 12월 26일 상주-영덕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중부 내륙 상주 분기점에서 영덕까지 개통되어 종착지인 영덕군도 활성화되었지만, 오도 가도 못 한다는 감호소가 있던 오지 청송군에 이르는 길도 확연하게 개선되었다. 그에 따라 먼 곳으로 느껴지던 청송의 비경을 이제는 쉽게 접할 수있겠다 생각했겠지만, 막상 직접 가보면 주차장에서 내려 그 비경을 볼 수 있는 뷰포인트까지 이르는 거리나 소요 시간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실제 걸리는 소요 시간과 일행의 운동 능력까지 고려해 행선지의 일정을 꼼꼼히 짜야 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지금 소개할 이곳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산을 오른다는 생각,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오른다는 생각을 비우고 주차장에서 내려 온 가족과 함께 별다른 채비 없이, 산보하듯이 입구에서 나무 터널을 지나 100m만 낮게 거슬러 오르면 상상하지 못하는 비경이 펼쳐진다. 바로 국립공원 주왕산 절골이다.
필자가 이곳을 정원이라 부르는 이유는 정원을 구경하는 여유로운 마음 가짐으로 무리하지 않는 규모와 시간만큼만 이 계곡을 보라는 뜻이다. 이 기암 절경의 계곡 길이는 장장 10km에 이르러 기어이 다 보겠다는 욕심을 부리면 등산 채비를 단단히 하고 열 시간을 움직일 운동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500m만 느릿느릿 걸어 올라 구름다리에서 새삼 자연의 오묘함을 찬양한 뒤 인증 사진 한 장 남기고, 오를 때와 또 다른 절경을 감상하며 내려오는 약 40분의 정원 소요 코스를 추천한다. 절골은 화산 폭발로 화산재와 용암이 분출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응회암 덩어리에서 7천만 년의 긴 시간 동안 물이 흐르며 깎아 만든, 인간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자연의 형상으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됐다. 주상절리, 계곡, 수직 절벽, 기암괴석이 즐비하며 다행스럽게도 입구부터 500m 구간이 전체 경관을 요약 정리한 듯한 절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원이 인공의 자연이라지만 이곳에서 사람이 한 일이라고는 걷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산책로 조성밖에 없다. 짧은 시간이지만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을 만든 조물주의 위대함과 억겁의 시간에 대한 경외감과 물소리,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가을 햇살에 비우며 겸허해지는 투명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10월 20일 전후가 가을의 절정이며, 계곡이 깊어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가 햇살이 가장 좋고 반경 1km 이내에 이미 잘 알려진 주산지가 있다. 사과로 만나는 풍경 인간이 일반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사과이고, 우리나라 국민 역시 다르지 않으나 사과나무가 있는 풍경은 왠지 낯설다. 원산지인 카자흐스탄의 사막에서 자란 원래의 사과는 퍼석거리고 달지 않았으나 형태와 색깔, 가을에 걸맞은 풍성한 풍경이 인간의 라이프스타일과 잘 맞아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진화와 품종 개량을 거쳐 현대인의 식탁에 가장 많이 오르는 과일로 자리매김했다. 전 대륙에 걸쳐 재배되는 인기 과일이어서 서양의 경우 살던 집이나 동네에 늘상 사과나무가 가족처럼 같이 자라던 것이 일반적 풍경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생육 특성상 산지에 집중적으로 재배해서 특정 지역의 농업 경관으로 인식되기에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나마 6·25전쟁 후 70년의 세월은 먹고 사는 데 집중해 홍옥, 국광, 후지 등의 품종명은 기억해도 사과나무 단지가 만드는 풍경을 추억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사과 재배의 적정 온도와 일교차, 강수량과 일조량 등의 조건에서 청송군은 아주 적격이다. 거기다가 사과 재배의 경관과 청송의 자연이 어우러진 청정하고 낭만적인 풍경은 필자를 잠시 귀촌의 유혹에 빠져들게 하기도 했다. 눈 덮인 주왕산이나 산촌의 풍경도 절경이지만, 언덕마다 지천으로 사과 꽃이 피는 4월에서 늦서리 맞은 만생종 사과가 매달린 11월까지의 청송 풍경은 저마다의 생업과 애환과는 상관없이 그저 푸르고 찬란하며 낭만적이다. 숙소와 목적지만을 오고 가는 여행이 아니라, 청송에서는 무작정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해보길 권하고 싶다. 특히 고개 너머 영덕을 향하는 두 개의 지방도가 모두 좋다.
주산지 안에 자라고 있는 왕버들의 아침 풍경. 나무 몇 그루는 수령이 다해 현재의 모습은 사진과 좀 다르다. 방문 시 유의할 점은 농경 저수지이기 때문에 5월부터 하절기까지는 논 경작을 위해 물을 내려보내 기대하는 풍경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 청송군청
청송의 조생종 사과가 신선하고 단단하지만, 11월의 만생종 사과는 서리를 몇 번 맞고 햇살을 더 받아 차고 아삭하며 달다. 잎이 떨어진 11월에 빨간 열매만 달린 청송의 산록은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여행자에겐 항상 운이 따라야 한다. 절골의 풍경은 돌과 물과 나무가 어우러진 깊은 계곡의 풍경이다. 물이 많으면 바지를 걷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흐린 날에는 음산할 수 있다. 다행히 청량한 날씨라면 색상의 다양한 농도 변화와 콘트라스트, 자잘한 질감과 수면에 투영된 환상적 데칼코마니도 구경할 수 있다.
청송 얼음골 지나 영덕 옥계 구간
청송군 부남면에서 930번 지방도를 따라 69번 지방도를 만나 영덕을 향하는 이 코스는 미리 말하자면 4월의 신록과 10월 단풍 절기의 풍경은 압권이며 실질적이다. 특히 주왕산 기암괴석과 절정의 단풍을 볼 수 있는 부동면 대전사 코스는 좋기는 하지만 몰려드는 차량과 인파, 입장료, 소요 시간 등을 따지면 가성비가 매우 떨어지고 짜증이 날 것이다. 더구나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니 그 체증은 더욱 심할 것이다. 쾌적하고 아름다운 가을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동선을 꼼꼼하게 설계하는 게 필수적이다. 그래서 청송읍에서 주왕산 정문 매표소에 이르는 길은 가을 성수기에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914번 지방도와 영덕군, 930번 지방도를 이용한 현명한 가을 나들이길을 권하는데, 풍경이나 숲은 측광이나 역광으로 보는 것이 최선이니 오전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후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 맞춤이다. 따라서 주산지의 물안개와 물그림자를 아침에 제일 먼저, 절골은 오전에 구경하고 914번 지방도를 타고 단풍 구경을 하며 동쪽으로 달려 영덕 강구항에 도착해 대게나 해물로 점심을 하고, 오후에는 930번 지방도를 따라 옥계를 거쳐 청송 얼음골로 향하며 단풍 구경을 하는 하루 또는 1박 2일 코스가 최적일 것이다. 바쁘더라도 반드시 들러서 구경해야 할 비밀의 정원이 하나 더 있다. 청송 얼음골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류와 옥계가 만나는 삼각 지점에 옥계유원지가 있고, 약 300m 위쪽에 침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아쉽게도 정자를 출입할 수는 없으니 그 옆의 계곡길을 따라 들어가 꼭 구경해보자. 그리고 새삼 조상의 수준 높은 심미안에 감탄하고, 이러한 공간을 내버려두는 후손의 어리석음을 헤아려보기 바란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이동협은 경기도 파주에서 정원을 가꾸며 21년째 살고 있으며 천리포수목원을 1백90번쯤 다녀간 정원 구경광이다. 2009년 <정원소요, 천리포수목원의 사계>(디자인하우스)를 출간한 후 지금도 마음에 두고 있는 정원을 찾아 사계를 기록하며 소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