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입심으로 ‘황구라’로 불리는 소설가 황석영은 전기 작가 이충렬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에는 홍구라(벽초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가 있고, 남에는 황구라가 있다. 당신 입심도 못지않으니, 해외의 ‘이구라’라고 하자.” 그리하여 붙은 별명처럼 이충렬 작가의 유쾌한 입담은 시대와 지역, 역사와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_정현종, ‘방문객’ 중
시인 정현종은 사람을 맞이하는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인은 특별한 어떤 사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닌 듯하다. 시인의 시선으로 보면 소중하지 않은 사람과 인연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사람들은 장삼이사, 갑남을녀의 고만고만한 삶을 어마어마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남다른 업적을 남긴 이를 위인이라 부르며 그들의 삶을 닮고자 한다. 전기 작가 이충렬.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이는 1994년 <실천문학>을 통해 소설로 데뷔했다.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아, 김수환 추기경>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등을 펴낸 바 있다.
“새로 펴낸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의 반응은 어떤지요?” “국내 언론 서평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습니다. 10대 일간지에서 모두 다루었으니까요. 곧 2쇄를 찍을 예정입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다룬 까닭은 무엇인가요?” “청소년에게 ‘권정생 정신’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낙담하지 않고 칠십 평생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헬조선’ 운운하며 세상을 탓하는 요즘 청소년에게 반성의 기회와 용기를 줄 수 있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권정생 선생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 아동문학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작품 활동을 하던 당시 우리나라에는 창작 동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안데르센, 이솝, 그림 동화 등 외국 번역 동화가 범람하던 시절에 나타난 새로운 시도입니다. 권정생 동화는 현실을 미화하거나, 외부에서 키다리 아저씨 같은 독지가가 나타나 도움을 주는 유의 작품과는 다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역경을 헤쳐 나가는 이를 주인공으로 그립니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에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 있지요.”
전기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던 그이는 작가 권정생의 삶에서 잊혀진 퍼즐 두 조각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최초의 작품인 ‘여선생’을 찾아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슬픈 연애의 실체를 밝혀낸 것이다. 선생의 유언장에는 “만약에 죽은 뒤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스물다섯 살 때 스물 두 살이나 스물세 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충렬은 작가적 촉으로 ‘벌벌 떨다 망친 연애 상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탐정처럼 주변을 취재하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마음에 든 상대에게 건강 탓에 ‘대리 청혼’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대리 청혼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여성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읽어볼 일이다.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출간 이후 강연 요청이 쇄도하지요?” “독립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초청이 옵니다.” 우리나라 도서관의 열악함을 실감한다며 그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차비만 주면 가겠다고 했더니 정말 차비만 줘서 밥값도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 독자와의 만남이라 생각하고 어디든 달려갑니다.” 강연료가 부족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이는 강연을 갈 때마다 화가에게 허락받은 그림을 A4 크기로 출력해 청중에게 선물하는 데 10여만 원을 쓴다. 하지만 그이는 “집안 행복은 작은 그림 한 장 속에서 오게 마련”이라며 그림 전도사를 자처한다. “전기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평소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신문이든 잡지든 인터뷰 기사가 나오면 꼭 읽어봤습니다. 르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고요.” 그이는 <한겨레21>과 <샘이 깊은 물> 등에 르포를 쓰기도 했단다. 처음 중절모를 쓴 채 배낭을 메고, 바퀴 가방을 끌며 나타난 그이는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중년 신사처럼 수줍고 과묵한 인상이었으나, 언변은 청산유수였다. ‘황구라’로 불리는 작가 황석영이 그의 입담을 듣고 ‘이구라’로 명명했다고 할 정도다.
이충렬 작가는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가장 극적인 서술 구조를 추구하지만, 반드시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이의 책 속에 등장하는 대화체 이야기도 반드시 기록을 근거로 재구성한다. <간송 전형필> 초고를 본 전형필 선생의 아들은 “마치 아버지가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다”며 출간을 허락했다.
전기 작가의 인생 역정
책날개에 적힌 그이의 이력이 독특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작가를 꿈꾸던 대학생 문학청년은 1976년 스물셋의 나이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을 간다. 42년간의 이민 생활동안 어떤 일을 겪었을까? 내가 묻기도 전에, 처음 최순우 옛집 툇마루에 걸터앉은 그이는 ‘친선적 차원의 대화’라며 자신의 이민 무용담을 털어놓았다. 때는 한국전쟁 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원색적 표어부터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내걸리던 시절이었다. “이민 장려 정책을 펼치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사업이 망하면서 전 가족이 이민을 가기로 했지요.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어차피 막노동을 할 거면 남이 안 보는 곳에서 하자’는 생각이었다. 태평양을 건너면서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남미의 파라과이였다. 한 달 만에 다시 아르헨티나로 갔다. 그곳에서 봉제업을 하면 먹고살 만하다는 아버지 지인의 권유가 있었다. 가족 모두 재봉 기술을 배우고 가내 봉제업을 시작했다. 2년 정도 지났지만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치안도 불안하고, 교육 환경도 좋지 않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LA 한인타운에서 부모, 남동생과 함께 봉제 공장에서 일했다. 몇 년 뒤 결혼을 하게된 그이는 봉제 공장 머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흑인들이 거주하는 동네에 잡화점을 차렸다. 권총 강도가 들어오곤 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목숨값을 던져주고 나면 이러려고 미국에 왔나 자괴감이 들곤했다. 가게는 차츰 커졌지만 일에 지쳐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아파도 수입이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부동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때마침 경기가 호황이었다. 땅만 사면 은행에서 건축 융자를 받을 수 있고, 건물을 짓고 나면 재융자를 받을 수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배 띄운다는 격으로 문어발식 확장을 했지요.” 촉망받는 30대 부동산 개발업자가 되었다. 헬기를 타고 부동산을 보러 다녔다. 세상이 돈짝만 하게 보이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단다. 하지만 물이 빠지자 배는 좌초하고 말았다. 걸프전이 벌어진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불경기가 왔다. 건물 세입자들이 빠져나갔으며, 융자금을 갚느라 건물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나니 달랑 5천달러가 남았다. 자동차에 아내와 딸 둘, 아들 하나를 태운 가장은 서부로 향했다. 말 한 필에 몸을 싣고 패기 하나로 서부로 향하던 19세기 카우보이와 다를 바 없었다. 열한 시간을 달려 멕시코와 잇닿은 애리조나 국경으로 향했다. 소를 치는 대신 ‘하던 장사’를 시작했다. 다시 잡화점을 연 것이다. 국경 장사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중국과 신의주 사이 만상灣商이 활약했듯이,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장사가 잘돼서 2~3년 만에 형편이 폈다. 경제적 여유는 생겼지만 문화적 혜택은 없는 곳이었다. 극장도, 서점도, 백화점도 변변치 않았다. 함께 어울릴 한국인도 없었다. 경제적 여유와 문화적 고립은 그이로 하여금 잊었던 꿈을 떠올리게 했다.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 마침내 1994년 <실천문학>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했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등단 후 신작을 몇 편 발표했지만 출판 관계자들이 소재가 너무 미국적이니 자주 한국에 들락거리며 눈을 넓히라는 겁니다.”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고는 해도, 한창 자녀들 학비를 부담하던 그이는 태평양을 동네 방죽처럼 건널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글을 접었다. 향수와 문화적 갈증이 몰려왔을 때 눈에 띈 것이 ‘판화’였다. “우연히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 모습을 그린 근대 판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의 작품을 비롯해 195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 모습을 담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그것을 사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이 생긴 그이는 한국에 올 때마다 헌책방을 돌며 <월간 미술> 등 과월호 잡지를 몇 년 치씩 사서 미국으로 가져갔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점수 60점대를 받던 ‘그림치’였으나, 그림을 수집하고, 잡지를 읽으면서 점점 안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터넷 블로그에 ‘그림 이야기’를 연재하자 방문객이 늘어 파워 블로거가 되었다. 이를 눈여겨본 김영사에서 출판 제의가 들어왔다. 그렇게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출간은 성공적이었다. 일주일 만에 초판이 바닥나고 재판을 찍었단다.
우리 창작 동화가 자리 잡는 데 막대한 역할을 한 한국 아동 문학의 큰 별 권정생 작가의 전기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생전의 글과 지인의 기록, 생존 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가의 삶을 충실하게 재구성했다.
전기,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통로
미술 애호가에서 전기 작가로 변신은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 그이는 2006년 가을 ‘간송 탄생 1백 주년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국보급 보물 1백점을 감상했다. 우리 문화유산의 유출을 막기 위해 모든 유산과 정열을 바친 간송의 삶에 깊이 감동했다. 미술관 뒤뜰에서 홀로 결심했다. 간송 전기를 써보겠노라고. 2년 남짓 자료 조사를 거쳐 펴낸 <간송 전형필>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전기 작가 이충렬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문장이 쉽고, 대화체를 통해 인물의 생생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평소 한국에 대필 문학이나 평전은 있어도 전기문학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날카로운 안목과 문장력이 블루오션을 찾아낸 것이다. ‘평전’과 ‘전기문학’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이는 “평전은 주인공을 관에서 꺼내 다시 염하는 거라면, 전기문학은 관에서 일으켜 술 한잔 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기를 쓰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면요?” “첫째 재미가 있을 것, 둘째 교훈적이지 않을 것, 셋째 민족주의에 빠지지 말 것, 넷째 연대기적 서술보다 극적 스토리텔링을 선택할 것, 다섯째 주인공의 정신과 삶의 가치를 놓치지 말 것!” 또 팩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이는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가장 극적인 서술 구조를 추구하지만, 반드시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단다. 그이의 책 속에 등장하는 대화체 이야기도 반드시 기록을 근거로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간송 전형필> 초고를 본 전형필 선생의 아들은 “마치 아버지가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다”며 출간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이는 전기 작품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서양에서는 전기문학이 하나의 장르로 발달해 있습니다. 학교의 커리큘럼에도 전기가 자 리를 잡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인물을 다루는 것은 사람이 정리가 안 되면 역사도 정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친일한 사람이 너무 많고, 해방 공간에는 월북 지식인이 많습니다. 독재와 반독재의 대결 구도 속에서 객관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도 너무 적습니다. 전기 대상을 선택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요.” 그이는 전기를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현재라는 통로”라고 말한다. 남다른 업적을 남긴 사람 거울을 통해 새로운 미래로 걸어갈 인간형을 비추어본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이충렬 작가는 전기를 쓰기에 앞서 그 인물의 행적을 1년과 한 달, 하루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정리한다. 무수한 자료를 섭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방대하고 지난한 작업. '반드시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전기 작가로서 신념 때문이다. 정작 책을 집필하는 시간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마침내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모국을 떠나 40여 년을 지낸 사람이 어떻게 모국어로 이리 매끄러운 문장을 쓰는 게 가능할까? “인터넷이 가능해지면서 모국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듣고, 문학작품을 꾸준히 읽어왔습니다.” 나는 무릎을 쳤다. 이민 1세대가 자신이 떠난 시대의 모국어를 화석처럼 지니고 있었다면, 1.5세대인 그이에게는 ‘이곳에 있으면서도 저곳에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 유비쿼터스ubiquitous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연결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글쓰기를 꿈꾸는 이에게 참고가 될 만한 사례로 보인다. 청년 시절의 꿈을 접어야 했던 이민 42년이란 시간에 대한 회한이 없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작품이 있습니다. 나는 모국에 돌아왔고 전기 작가로서 할 일을 찾았기 때문에 이민 생활의 모든 설움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홀가분한 그 표정에 “나는 자유다” 라고 외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얼굴이 비쳤다. “앞으로 전기에 다루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요?” “풍속화가 김홍도와 인권 변호사 조영래 전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집단 전기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KTX 해고 노동자’들이 사법
부의 희생양이 된 이야기도 다루고 싶습니다.” 그이는 전기를 통해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한다. 승리한 사람의 기록만이 아니라, 권력에 의한 사회적 피해자 집단을 다루는 것도 전기 작가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단다. 그이는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하지 않았다>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2백여 명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점점 작가 이충렬이 앞으로 닦아놓을 ‘사람 거울’의 너비와 깊이가 궁금해졌다.
작가 이충렬이 전기를 쓰며 새롭게 배운 것
1 전기를 쓰는 건 존경할 만한 가치관을 지닌 삶을 살아온 인물의 삶을 복원하는 일이다. 독자는 전기 속 인물의 구체적 삶에 자신의 인생을 비추어 더 나은 삶의 기준을 폭넓게 하는 계기를 만든다.
2 간송 전형필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외종 형제인 월탄 박종화 선생의 역사 소설을 읽으며 역사의식이 생겼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이 바로 선조가 남긴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었다.
3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간 성직자였다. 수도원의 성벽을 허물고, 교황청의 거대한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자는 20세기 중반 새로운 가톨릭의 정신을 평생 실천한 것이다.
4 동화 작가 권정생은 비록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지만, 평생 책을 가까이했다. 시골 마을에서 주일학교 선생을 하던 그는 농가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다 생명 사랑을 담은 창작 동화를 쓰기에 이른다.
- 전기 작가 이충렬 사람 거울로 미래를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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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傳記는 사람의 생애를 적어 사람을 되비추는 사람 거울이다. 호랑이가 더 호랑이가 되기 위해 <호랑이전>을 읽거나, 멧돼지가 더 멧돼지가 되기 위해 <멧돼지전>을 읽는 일은 없다. 장미가 더 장미가 되기 위해 <장미전>을 읽거나, 호박꽃이 더 호박꽃이 되기 위해 <호박전>을 읽는 일도 없는 걸 보면 ‘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은 호모사피엔스만의 특징으로 보인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전기 작가가 있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탄탄한 스토리텔링으로 전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충렬 작가를 성북동 최순우 옛집에서 만났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