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크 극장 옥상에서 내려다본, 황금빛 석양에 물든 비엔나 구도심.
올드 다뉴브 지역. 매년 범람을 반복했지만 새로 물길을 튼 ‘뉴 다뉴브’를 건설한 이후 1년 내내 잔잔해 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일광욕과 수영, 레저를 여유롭게 즐긴다.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호프부르크Hofburg 왕궁, 화려한 르네상스식 원형 돔이 인상적인 미술사 박물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국회의사당, 고딕 양식 첨탑이 뾰족하게 솟은 시청 건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구도심을 이름 그대로 반지처럼 둘러싸는 링 거리(Ringstrasse)를 걷다 보면 유럽의 주요 건축양식을 모조리 만날 수 있다. 골목으로 발길을 돌리면 산책은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아르누보 건물의 기하학 문양을 홀린 듯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면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초현대식 비정형 고층 빌딩이 야트막한 스카이라인에 경쾌하게 균열을 내고, 러시아 정교회 건물의 황금색으로 빛나는 양파 모양 돔이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건물 사이사이로 지금의 비엔나를 만든 사람들의 크고 작은 동상이 서 있고, 좁은 골목이 답답할 즈음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난다. 비엔나 산책, 발견의 즐거움은 끝이 없다. 호기심을 해결하느라 발걸음을 멈추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시원한 분수가 있는 공원이나 물가에 다다를 것이다. 가히 도보 여행자의 천국이라 할 만한 도시 비엔나. 대개의 유적지와 박물관, 공연장 등이 걸어서 쉽게 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처음 가는 사람도 전차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과거를 부정하고 현대로 나아가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와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 건축가 오토 바그너Otto Wagner(1841~1918)와 그래픽· 산업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Koloman oser(1868~1918).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의 중심을 자처하던 비엔나의 당대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네 명의 모더니스트가 우연히 같은 해에 서거했고, 2018년은 그 1백 주년이 되는 해다. 도시 어디서나 이들 또는 이들이 형성한 ‘비엔나 모더니즘’과 관련한 전시나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와 배너, 입간판을 만날 수 있다. 19세기 중반 비엔나는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도시였다. 당시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5.3km 길이의 링 거리를 건설했고, 건축가들은 보수적이던 왕가의 입맛에 맞춰 링 거리 주변에 고풍스러운 건물을 지었다. 국회의사당은 민주주의가 탄생한 고대 그리스 양식을 본 뜨고, 합스부르크 왕조가 전 세계에서 사들인 예술품과 유물을 전시하는 미술사 박물관은 예술이 융성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시청 건물은 권위를 상징하는 고딕 시대의 건축물을 흉내 내는 식이었다. 이른바 역사주의. ‘과거에서 배운다’는 의고擬古 취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인물이 건축가 오토 바그너다. 카를스플라츠Karlsplatz 광장에 자리한 빈 미술관에서는 3월부터 오토 바그너의 대규모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는 링거리를 중심으로 도시 전체를 핏줄처럼 연결하는 전차 역사를 설계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였다. 그는 도로와 철로를 따라 직선으로 확장하는 비엔나에 걸맞은 새로운 기능적 건축을 주창했다. 전시는 그의 생애와 건축, 당대 비엔나를 날줄과 씨줄로 조직해 그의 현대적 신념이 변화시킨 도시의 풍경과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총 열두 섹션으로 나눈 대규모 전시의 마지막은 전시가 열린 카를스플라츠 광장에 자신이 설계한 현대적 미술관을 실현하기 위한 오토 바그너의 분투를 그린다. 이름하여 ‘카를 스플라츠 전투(The Battle for Karlsplatz)’. 도시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미술관을 짓기 위해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수년간 노력했지만 왕가의 반대로 끝내 무산된다. 견결한 모더니스트로서 곡선이 아닌 직선을, 장식 대신 기능을 강조한 그의 건축은 보수적 왕가와 귀족, 행정가들에겐 눈엣가시였기 때문. 지금 그 자리엔 그로부터 몇 년 후, 젊은 건축가 피셔 폰 에를라흐가 설계한, 오직 직선으로만 구성한 직육면체 건물이 들어서 있다. 출구 바로 앞엔 1910년 <차이트Zeit>에 실린 삽화가 크게 확대되어 걸려 있는데, 어린 폰 에를라흐가 카를스플라츠 광장을 배경으로 미술관 모형을 오토 바그너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바그너 선생님, 안심하세요. 제가 지은 건물 역시 비엔나 도시 풍경을 망친다는 비난을 듣고 있지만, 1백 년이 지나면 사람들은 우리의 건축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과연 그러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여름을 보내던 쇤브룬 궁정의 정원.
레오폴트 미술관에 전시된 에곤 실레의 작품.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우편 저축 은행. 금고를 연상시키는 외관과 밝게 탁 트인 실내가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답다.
다뉴브강의 지류인 다뉴브 운하에서 바라본 비엔나 시내.
푸르가슬후버 와이너리의 지하 와인 저장고.
그 시대만의 고유한 예술을 위하여
오토 바그너는 빈 분리파(Secession)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빈 분리파는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는 젊은 창작자들의 모임. 그들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기존 비엔나 예술계와 관이 주도하는 전시회로부터 자신들의 예술을 ‘분리’하려 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고유한 예술이, 예술에는 예술만의 고유한 자유가 존재한다”는 모토를 실현하기 위해 이들은 직접 자신들의 예술을 전시하는 공간을 만든다. 황금 이파리로 만든 원형 돔이 인상적인 분리파 회관. 지금도 갤러리로 사용하는 이곳 지하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에서 영감을 받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선과 악의 싸움이 시와 합창, 남녀의 입맞춤(!)을 통해 행복한 결말을 이루는 서사와 금박을 입힌 화려한 그림체가 더없이 클림트다운 작품이다. 클림트는 실질적으로 빈 분리파를 이끈 인물이다. 공예학교 출신으로 젊은 시절 비엔나의 극장과 박물관 등을 벽화로 장식하던 그는 동료 창작자들과 함께 빈 분리파를 설립하고, 금기시하던 여성의 누드와 화려한 초상 작품으로 이름을 얻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있다면 비엔나 벨페데레Belvedere 미술관엔 클림트의 ‘키스Kiss’가 있다. 과연 실제로 본 ‘키스’의 황금빛 광휘는 찬란하지만, 작품 앞에 모여들어 스마트폰을 들이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소 안타까운 한편으로 러시아에서 왔다는 젊은 커플은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나눈다. 분리파 회관에서 전시를 하기도 한 에곤 실레의 작품은 지금의 눈으로도 도발적이다. 왕궁의 마구간이 있던 자리에 조성한 거대한 문화 복합 단지 무제움 콰르티에Museums Quartier에 자리한 레오폴트 미술관은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다. 실레는 클림트의 영향으로 누드를 통해 여성의 내면과 감수성을 강렬하게 묘사했다. 28세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그는 지금의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도발적 걸작을 다수 남겼다. 레오폴트 미술관엔 콜로만 모저의 기획전도 함께 열리고 있었다. 모저는 그래픽 디자이너이며 산업 디자이너,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전시 기획자이기도 했다. 벽지부터 책, 문구, 가구, 포스터와 로고까지 당대 비엔나에 그의 손이 닿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모저의 기하학적이고 장식적인 표현은 1903년 설립한 빈 공방에서 제작한 아름다운 공예 작품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모저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오스트리아 응용미술박물관(MAK)이다. 클림트와 모저가 수학한 빈 공예학교 바로 옆 건물. 오토 바그너의 제자인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과 모저가 주도해 19세기 유럽 공예 문화를 혁신한 빈 공방의 컬렉션이 빼곡하다.
모더니즘의 유산을 발견하는 길
비엔나를 걸으면 걸을수록, 절대왕정의 압도적 힘을 상징하는 역사주의 건축물 사이사이에 자리한 기능적이면서도 우아한 비엔나 모더니즘 유산의 현존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1백 년 전, 자신의 재능과 현대 도시의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은 일군의 과감한 예술가들이 과거와 단절을 선언하고 새로운 문화를 건설했다. 발견의 기쁨으로 가득한 비엔나 산책에서 가장 충만한 즐거움은 온 도시에 녹아 있는 이들의 흔적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으리으리한 역사주의 건축물과 높은 초현대식 빌딩 사이에서 비엔나 모더니즘의 유 산을 발견하는 건 마치 시간 여행과 같은 경험이다. 1백 년의 산책. 클림트와 실레, 오토 바그너와 모저, 이들이 세상을 떠난 1918년은 비엔나 전체를 슬픔의 먹구름이 뒤덮은 시기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패전으로 끝났고, 도시를 건설한 선구자들이 일제히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로부터 1백 년 후, 이들의 유산은 비엔나를 세계 어느 곳과도 구별되는 도시로 만들고 있다. MAK 지하 전시장에 쓰여 있는 문구가 유난히 인상적이다. “우리 세대가 1백 년 후에 추앙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엔나는 1백 년 전의 유산을 토대로 다음 1백 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엔나와 와인
비엔나는 도시 안에 대규모 와인 재배 생산지가 있는 세계 유일한 수도이자 대도시다. 오스트리아 와인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대부분이 국내 소비되기 때문. 비엔나의 북쪽 경계, 다뉴브강과 수많은 나무로 우거진 비엔나 숲은 와인 생산에 최적의 기후 조건을 갖추었다. 비엔나 와인의 특징은 재배 단계에서 세 가지 이상 품종의 포도를 혼합 재배해 수확, 발효해
와인으로 만드는 비너 게미슈터 자츠wiener gemischter satz 방식이다. 이렇게 만든 와인은 신선도와 풍부한 과일 향, 복합적 풍미가 조화를 이룬다. 매해의 기후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1 와인 축제 매년 11월 11일은 그해의 빈티지 와인이 첫선을 보이는 날이다. 비엔나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뜨겁다. 9월 말과 10월 초에는 와인 하이킹 데이가 열린다. 와이너리가 밀집한 비엔나 숲 지역을 산책하며 자유롭게 와인을 즐길 수 있다.
2 호이리거heuriger 전통적으로 비엔나 와인은 ‘햇와인’을 의미하는 선술집, 호이리거에서 마실 수 있다. 편안한 분위기와 초록 정원, 좋은 와인과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대중 음식점이다. 전통적으로 호이리거엔 전나무 가지를 걸어 영업 중이며, 직접 생산한 비엔나 와인만을 판매한다는 의미를 전한다.
마이어 암파르플라츠Mayer am Pfarrplatz
4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곳은 비엔나를 대표하는 와이너리이자 호이리거다. 일명 ‘베토벤 하우스’라고도 하는데, 베토벤이 이곳에서 기거하며 제9번 ‘합창교향곡’을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 주소 Pfarrplatz 2, 1190 Wien, www.pfarrplatz.at
슈벨 아우어Schubel-Auer
비엔나의 주요 와인 생산지 중 한 곳이 누스버그 지역에 위치한 역사가 오래된 게스트 가든으로 ,1711년부터 10대에 걸쳐 와인 태번tavern으로 운영하고 있다. 음식과 와인을 즐기는 것과 별도로 요금을 내면 이곳에서 판매하는 모든 와인을 마실 수 있다. 주소 Zahnradbahnstr. 17, 1190 Wien, www.schuebel-auer.at
푸르가슬후버Fuhrgassl-Huber
포도밭 바로 아래 자리한 고즈넉한 야외 호이리거. 자체 생산한 게미슈터 자츠 와인을 맛볼 수 있으며, 체계적 와인 테이스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로제 스파클링 와인이 훌륭하다. 주소 Neustift am Walde 68, 1180 Wien, www.buschenschankfuhrgassl-huber.at
- 느리게 머무는 여행_ 비엔나 비엔나 모더니즘 백 년을 산책하다
-
머무는 여행 특집의 세 번째 사례는 걷기 여행이다. 8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 비엔나는 도보 여행자의 천국이라 할 만큼 걷기에도 좋은 도시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압축된 비엔나 거리를 걸으며 1백 년 전 도시의 현대화를 이끈 모더니스트들의 발자취를 좇았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