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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활동가, 디앤디파트먼트 창립자 나가오카 겐메이 이런 가게도 장사가 됩니다
“새롭기만 한 것은 재미가 없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자칭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다. 그는 세상에 새로운 디자인을 더하기보다 시간이 증명한 좋은 물건, 이른바 ‘롱 라이프 디자인’을 선별해 ‘팔리는 제품’이 아닌 ‘팔고 싶은 제품’을 판매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게를 만들어 디자인과 소비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전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역할에 본질적 의문을 제기하는 나가오카 겐메이의 이런 활동이 ‘새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 르네상스 시대엔 ‘디세뇨disegno’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가장 훌륭한 제도공이라 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디세뇨란 단순히 뭔가를 그리거나 만드는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생각을 시각적으로 소통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이었다. 디앤디파트먼트 프로젝트D&Department Project야말로 나가오카 겐메이의 머릿속 생각을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는 공간이다. 2018 서울리빙디자인페어의 리빙 트렌드 세미나 강연을 위해 서울을 찾은 나가오카 겐메이를 만났다. 그는 롱 라이프 디자인의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있었다.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점이 자리한 건물 지하 복도에서 포즈를 취한 나가오카 겐메이. 그가 앉아 있는 의자는 일본 가구 브랜드 가리모쿠의 K 체어로, 디앤디파트먼트 도쿄점을 준비하던 무렵 한 리사이클 매장에서 직접 발견하고 완성도 높은 디자인에 감탄해 최초로 '롱 라이프 디자인'이라고 이름 붙였고, 1960년대 일본 디자인을 재조명하는 '60 비전'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디앤디 서울점 전경. 세계 각국의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과 함께 디앤디 서울점이 선정한 한국의 특색 있는 제품과 지역 특산물 등을 창고 형태로 진열, 판매한다.

나가오카 겐메이가 발행인이자 편집장으로 1년에 세 권씩 발행하는 여행 잡지 .

송월타월과 협력해 만든 흰색 이태리타월.

일본과 한국의 플라스틱 수납 박스를 나란히 진열해놓았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형태와 쓰임새가 비슷한 물건을 한국에서도 쓰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저도 예전에는 유행하는 최신 상품의 정보를 수집하고 최대한 빨리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금세 사라졌지요. 잘 만든 물건을 생활 속에서 사용하며 그 물건을 만든 사람들과 관계 맺고, 생산한 지역과 교류한다면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통해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디자이너로서 18세부터 35세까지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마흔에 접어들 무렵, ‘디자인’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올바른 디자인’인지 찾고 싶어서 만든 것이 바로 디앤디파트먼트 프로젝트(이하 디앤디) 가게입니다. 우리 가게가 ‘올바른 디자인’을 판별하는 기준은 바로 롱 라이프 디자인입니다. 시간이 증명한 디자인, 생명이 긴 디자인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탄생한 지 20년 이상 지난 생활용품만을 정가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가게에 찾아온 대부분의 사람은 ‘허참, 이런 가게도 장사가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나가오카 겐메이가 쓴 책 <디앤디파트먼트에서 배운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전하는 가게 만드는 법>에서 옮긴 구절이다. 마치 디앤디에서 판매하는 물건처럼 꾸밈없이 간명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그가 도쿄 세타가야의 한 건물에서 첫 디앤디 상점의 문을 연 이후 일본 일곱 개 도시와 바다 넘어 서울로 퍼져나갔고, 그곳에서 취급하는 물건처럼 20년 가까운 오랜 시간을 견디며 성업 중이다. 직접 만난 나가오카 겐메이는 여러 권의 책에서 받은 인상과 사뭇 달랐다. “일본인의 보편적 디자인 감수성은 지극히 낮다” “디자이너가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등 칼로 자르듯 자신의 생각을 선언하던 선명한 문장과 달리 그는 나직한 어조로 신중하게 말을 이으며 종종 쑥스러운 듯 수줍게 웃기도 했다.

디앤디가 처음 문을 연 지도 18년이 지났습니다. ‘올바른 디자인’을 전하려는 처음의 생각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요?
그동안 일본 사회가 많이 변화했습니다. 디앤디라는 공간을 통해 세상에 전한 메시지가 어느 정도 실현된 셈이지요. 저희가 잘해서라기보단 사회가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변화를 말하는 건가요? 한국에선 언론을 통해 일본 젊은이들이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우려 섞인 소식을 접하곤 합니다.
40대 이상의 일본인은 여전히 ‘물건을 사는 것이 풍요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아래 세대 젊은이들은 새로운 물건을 구매하지 않는 경향이 확실히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행하는 신제품을 사고 싶어서 멀쩡히 작동하는 물건을 버리던 시절은 지난 것이지요. 하지만 디앤디는 고객이 물건을 구매해야 존재할 수 있는 상점입니다. 제대로 된 물건을 사고, 만들고 판매하는 건 즐겁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좋은 물건을 만들고 소비하는 기쁨을 찾아내고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디앤디에서 판매하는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은 우리 생활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저도 예전에는 유행하는 최신 상품의 정보를 수집하고 최대한 빨리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금세 사라졌지요. 잘 만든 물건을 생활 속에서 사용하며 그 물건을 만든사람과 관계 맺고, 생산한 지역과 교류한다면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과거엔 롱 라이프 디자인을 ‘처음 생산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면, 지금은 ‘앞으로 그 물건과 어떤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통해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디앤디에 진열한 물건에 생산지를 표시하고, 물건과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한 배경 이야기를 알리고 있습니다.

디앤디 서울에선 지난 3월 25일까지 한국의 롱 라이프 사무용 문구와 제조사를 소개하는 KOREA VISION MARKET <문구전>이 열렸다. 전시 외에도 상품과 생산자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디-스쿨 프로그램을 연중 운영한다. 작년에 '김장'을 주제로 진행한 디-스쿨에는 창립자를 비롯한 디앤디 일본 본사 직원이 대거 참여했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지금도 우리 집 냉장고에 그때 담근 김치가 있다"며 웃었다.
분식집 떡볶이 그릇과 흰색 이태리타월
디앤디의 첫 해외 지역점인 ‘디앤디파트먼트 서울 바이 밀리미터밀리그람(이하 디앤디 서울)’에서도 제품마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생산한 물건인지 손 글씨로 빼곡히 적어놓은 메모가 흥미로웠다. 지난 2013년 11월 9일 이태원 대로변 흰 벽돌 건물에 문을 연 디앤디 서울점엔 일본 전역과 세계에서 수집한 롱 라이프 디자인, 한국에서 발견한 특색 있는 제품이 가득하다. 분식집 떡볶이를 담는 얼룩덜룩한 연두색 플라스틱 그릇도 디앤디의 진열장에 놓이니 사뭇 달라 보였다.

디앤디의 지역점은 ‘그 가게가 자리한 지역을 이해하는 장소’를 표방합니다. 디앤디 서울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디앤디 지역점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드러내는 장소여야 합니다. ‘디앤디다움’만큼이나 ‘지역다움’도 중요하지요. 생각에 공감하고, 해외에서 그런 일을 하겠다고 제일 먼저 손들어준 분들이 서울의 밀리미터밀리그람이었습니다. 디앤디 서울에서 활발하게 표현하는 ‘서울다움, 한국다움’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디앤디 서울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제품은 무엇인가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는 물건이 때를 미는 이태리타월입니다. 한국에 그런 물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직접 보니 더욱 인상적이었지요. 디앤디 서울의 주도로 흰색 이태리타월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색을 달리했을 뿐인데도 완전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더군요. 밀리미터밀리그람의 배수열 대표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국에는 전통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의 작품은 값이 너무 비싸고, 대량생산하는 기념품은 품질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일본에는 그 중간에 위치하는 합리적 가격에 품질도 좋은 지역 공예품이 많습니다. 디앤디 서울은 한국의 지역 공예가와 협력해 그런 물건을 발굴하고, 새로 만들 계획입니다.

한국엔 전통과 현대,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는 움직임이 최근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서 ‘60 비전Vision’ ‘d47’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한 입장에서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요?
60 비전은 1960년대 일본이 제품 생산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고,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던 시대이기에 그 시대의 개념으로 돌아가서 올바른 제품을 만들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이고, d47은 일본 각 지역의 문화가 모두 평등하고, 개성적 물건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한국에서도 충분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디앤디 서울이 그 중심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로운 물건 대신 새로운 세상을
나가오카 겐메이는 초등학생 시절 제철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노동절에 제작하던 포스터와 현수막에 글자를 쓰는 일을 도우며 디자인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자인업계에서 실무를 경험한 그는 1990년 일본디자인센터에 입사했고, 이듬해엔 무인양품으로 잘 알려진 그래픽 디자이너 하라 겐야와 함께 하라 디자인 연구소를 설립했다. 1997년 자신의 디자인 사무소 드로잉 앤드 매뉴얼로 독립한 그는 새로운 형태의 리사이클 숍을 구상하다 디앤디의 문을 열었다. 디앤디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하던 그는 처음으로 발견한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인 가리모쿠사의 K 체어를 계기로 영감을 받아 1960년대 일본 디자인을 재조명하는 60 비전을 시작했다. 인터뷰를 통해 직접 이야기한 것처럼 d47은 일본 전역 47개 도도부현의 특산품과 식문화를 알리는 프로젝트. 2009년부터는 디자인과 여행을 주제로 한 잡지 을 창간, 발행인이자 편집장으로 1년에 세 지역을 취재하고 각각을 한 권의 잡지로 만들고 있다. 3년에 한 번씩 그간의 활동을 정리해 펴낸 책이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 <디자이너 생각 위를 걷다> 등이다. 최근엔 매주 화요일 ‘나가오카 겐메이의 메일’이라는 이름의 글을 써 유료로 메일링 리스트에 등록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얼마 전 발행한 ‘나가오카 겐메이의 메일’에 “지금이 나가오카 겐메이의 고비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쉰 살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이를 의식한 것도 처음이고요. 50대라는 나이는 참신한 생각을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일을 넘겨줘야 하는 시기인 한편, 몸을 움직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열정적으로 일할 수도 있습니다. 제겐 무척 고민스러운 시절이라서 ‘고비’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디앤디는 젊은 동료에게 운영을 맡기고, 저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려 합니다.

다음 단계라면 어떤 일인가요?
관광입니다. 단순히 지역에서 물건을 가져다 가게에서 판매하는 것을 넘어 물건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그 물건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직접 찾아가 구매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동하는 가게’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관광 역시 물건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과 관련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물건의 생산지를 찾아가 지역의 문화를 느끼며 구매할 수 있다면 그 경험은 보다 값진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가 어렵기 때문에 가게가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어딘가를 찾아가는 일은 계속 손쉽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가게’라는 곳이 어떤 장소가 되어야 하는지 새롭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에 도자기 붐이 일어난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 등장한 여러 스타 도예가 중 지역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이가 많았습니다. 가게에서 도예가의 작품을 사도, 그 작품을 만드는 지역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요. 그런 유행은 해당 제품의 애호가와 생산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디앤디는 가게에 진열할 공예품을 선정할 때 그걸 만든 작가와 그가 속한 지역의 관계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지역에 찾아가서 공예품을 구매할 수 있다면 지역 발전에 더욱 큰 도움을 줄 수 있겠지요.

2007년쯤 쓴 글에는 쉰 살이 되면 농촌으로 돌아가 농사짓고 싶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러지 못한 것 같은데요.
마음대로 되지 않네요.(웃음) 저는 그때그때 생각하는 것을 소리내어 입 밖으로 말하거나, 글로 써서 많은 사람에게 알립니다. 실현 여부를 떠나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 하고 싶다’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비록 농사를 짓고 있지는 않지만 자연을 많이 의식하게 되었고, 숲속에 집도 지었습니다. 말과 글을 통해 행동이 변한 것 아닐까요?

‘소유보다 경험’이라서일까? 나가오카 겐메이는 ‘이래도 장사가 됩니까?’라는 의문이 드는 상점을 보란 듯이 성공시킨 데 이어 새로운 개념의 관광을 고민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사물이 아닌, 새롭게 보고, 사고, 관계 맺고, 경험하는 방식을 디자인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일본에 47개 도도부현이 있다면, 한국은 몇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지역 문화를 알리는 게 좋을까?’ ‘1960년대 일본처럼 우리에게도 그 시대의 물건을 구매하고 싶은 시절이 존재했을까?’ ‘앞으로의 가게는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행복이가득한집>은 그런 변화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등 어느 것 하나 시원한 답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곰곰이 생각하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자체가 새삼스레 상쾌했다. 이렇게 디자인 활동가 나가오카 겐메이는 끊임없이 소리 내 말하고, 글을 쓰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함으로써 사람들의 머릿속에 생각을 전하고,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보다 나은 세상을 디자인하고 있다.


나가오카 겐메이의 오래 쓰는 물건 고르는 법
1 새로 나온 제품이 아닌, 만든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물건을 선택하라.
2 일상에서 매일 쓸 수 있을지 생각하라. 아름다운 겉모습만 보고 구매하면 생활에 스며들지 않는다.
3 물건을 생산한 지역과 산지, 기업, 나라 등을 기꺼이 응원하고 도와줄 마음이 드는지 자문하라.

글 정규영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