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법을 공부한 법학자로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던 홍성수 교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표현과 그 피해자의 고통 앞에서 차별의 현실과 말이 만나 생기는 엄청난 폭발력을 경험했다. 그는 언론 매체와 학교, 회사 등 꼭 필요한 곳에서는 적극적 혐오표현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혐오와 차별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혐오표현’이라는 첨예한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젊은 학자의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법학자 홍성수. 숙명여대에서 법철학과 법사회학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그는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드러내는 혐오표현에 대해 연구하며 수많은 소수자와 대화하고, 공청회와 토론회, 집회 현장 등에서 노골적 혐오표현을 직접 경험하며 ‘말이 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느꼈다. 홍성수 교수는 2012년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 제안 보고서>의 혐오표현 파트 집필에 참여하면서 혐오표현과 인연을 맺었다. 법학자로서 표현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던 그에게 표현을 제한할 수 있는 혐오표현 문제는 내키지 않는 주제였지만, 곧 자신이 엄청난 주제와 맞닥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고들수록 새로 고민거리가 끊임없이 나왔고, 사회적으로도 가장 첨예한 이슈로 불거졌다. 표현의 자유를 말하던 진보가 혐오 표현 규제를 이야기했고, 성장을 위해 자유를 제한하자던 보수는 얼굴을 바꾸고 표현의 자유를 말했다. 진보 매체의 주요 독자층이던 젊은 남성은 매체가 여성 혐오 문제를 다루자 절독 운동까지 벌였다. 혐오와 차별 앞에서는 기존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바로 이 시점에 홍성수 교수는 혐오표현이 무엇이고, 왜 문제인지를 다룬 대중 교양서 <말이 칼이 될 때>를 펴냈다.
혐오표현이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되는지 간략하게 답해주세요.
혐오표현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혐오표현의 문제를 넘어서지 않고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문제가 되지요.
‘공존하는 사회’라는 말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공존은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현재 신생아 스무 명 중 한 명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입니다. 외국인 이주자와 다문화 가정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다양한 소수자 집단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그에 합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내 탈북자 수가 2만 명정도인데 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 문제도 심각하지요. 앞으로 통일이 되면 60년 넘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2천5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과 어울려 함께 살아야 합니다. 2만 명도 포용하지 못하는데, 2천5백만 명과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지금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문제가 왜 불거지나요?
과거 고도성장 시대엔 사회는 물론 개인도 대부분 어떤 방식으로든 발전하고 성장했습니다. 단일민족 신화도 공고했고요. 하지만 최근 저성장 시대로 접어든 후엔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여성이 강남역에 모여 추모했는데, 그분들의 면면을 보면 평소 여성 운동을 하거나 여성 문제에 관심을 크게 두지않던 이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현장에서 ‘이분들이 도대체 왜 여기 모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일상적으로 차별과 폭력에 고통받고 있었는데, 함께해야겠구나”라는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가 그 심연이 무척 깊은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혐오표현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나요?
혐오와 차별은 어떤 계기를 만나면 순식간에 폭행과 살인 등 증오 범죄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 사회가 혐오표현의 심각성을 하루빨리 인지해야 합니다. 이미 온라인상의 혐오가 오프라인으로 넘어가는 낌새가 보이고 있지요. 2014년 일베 회원의 황산 테러와 단식 투쟁 중인 세월호 유족 앞에서 조직적으로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이는 ‘폭식 투쟁’ 등은 그들의 말이 실행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개인이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합니다. 내 권리와 자유만큼이나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특정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삶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사회문제에 앞서 공존하는 사회를 위한 기본 원칙입니다.”
차별과 만난 말, 폭발하다
홍성수 교수의 저서 <말이 칼이 될 때>에는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집회 현장에서 그가 소수자의 입장을 마음 깊이 인식하고, 변화하는 에피소드가 여럿 나온다. 강연장에서 만난 한 장애인은 장애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인터넷 뉴스와 게시판에 달리는 댓글들 (“정신병자들은 다 가둬버려야 해”)을 보고 맞아 죽을까 두려워 한동안 집 밖에 나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강연에서 “한국에서 장애인 혐오는 그리 심하지 않다”고 말한 직후였다. 2014년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제정할 때 전문 위원으로 전 과정에 깊이 관여한 그는 일반 시민과 성소수자들이 함께 참여한 행사를 기획했다. 헌장 제정이 시민 참여의 한마당이 되기를 바라며 개최한 행사였지만 성소수자들은 ‘토론’을 빌미로 사람들이 내뱉는 노골적인 혐오의 말을 무방비 상태에서 다 들어야 했다. ‘말’이 차별의 현실과 만나 생기는 엄청난 폭발력. 평소 법학자로 그가 옹호하던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꺼낼 염치가 없었다. 홍성수 교수는 닥치는 대로 관련 문헌을 섭렵하며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연간 수십 차례 이상의 강연과 토론회에 참석했고,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을 통해 혐오표현 문제를 널리 알렸다. 거리를 걷다가, 샤워를 하다가도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노트와 스마트폰에 빼곡히 적었다.
홍성수 교수가 혐오표현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한 대중 교양서 <말이 칼이 될 때>.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의 현실에 무감각한 한국의 현실에 대안을 제시한다.
주변 분들에게 “네 앞에선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 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 살면 좋겠죠. 하지만 우리가 던진 말이 누군가를 폭행하는 만큼의 피해를 유발한다면 자제해야 하고, 때로는 처벌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과하는 정도로 해결되는 문제가 대부분이니까요. 개인으로선 내가 한 말의 책임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겠지요.
혐오표현은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혐오표현을 연구하며 마주친 한국 사회의 민낯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연구를 하는 한편, 대중을 만나서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을 병행합니다. 그런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지요. 우리 사회가 각자의 삶을 돌보는 데는 많은 발전을 했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는 발전이 더딥니다.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 탓도 있겠지요.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극대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40대 남성, 정규직 대학교수라면 한국 사회에서 주류에 속하는데요,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표현 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이 부담스럽진 않나요?
제가 주인공처럼 보이는 건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우리 사회에 시급한 문제를 널리 알리고, 기여하려는 마음이지요.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항상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을 상대로 활동하는 것이 연구에 방해가 되지는 않나요?
책이나 논문을 읽는 절대적 시간은 줄어들 수 있지만,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미처 생각지 못한 조언을 받는 등 연구와 상호작용이 잘되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SNS에서도 혐오표현과 관련한 치열한 논쟁을 이어갔습니다. 제 논리의 허점을 알기 위해서였지요.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인권법을 공부하고, 스페인 국제법사회학연구소 등에서 연구했을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소수자의 입장이었을 텐데요.
한 사회에서 소수자로 사는 경험을 했습니다. 상대방이 내게 질책하거나 서로 갈등을 빚 었을 때 ‘내가 한국인이라서, 아시아인이라서 이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더군요. 저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맞을까, 그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계속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한국에서 지낼 때는 전혀 고려하지 못한 문제였지요. ‘한국 사회에서도 소수자는 늘 이런 생각을 하며 살겠구나’라는 생각을 그제야 할 수 있었지요.
홍성수 교수는 "한국어와 영어로 된 혐오표현 문헌 중 내가 대충이라도 읽지 않은 것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연구자로서 혐오표현은 어렵기에 더욱 흥미로운 주제라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 보다 실천적 영역에서 우리 사회의 혐오표현을 줄이는 방안을 고민한다.
방패가 되는 말
그렇다면 이미 심각하고,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혐오표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홍성수 교수는 “전 세계에 혐오표현을 근절시킨 나라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의 목표는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을 사회적으로 ‘구석에 모는 것’. 그러기 위해 대통령 등 정치인, 각 조직의 대표 등 영향력이 큰 공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15년 인종 증오 범죄자에게 살해당한 피크니 목사의 추도식에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며 이번 사건을 통해 신이 미국 사회에 내린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했다. 소수자 혐오 문제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사회에 전달한 것. 그런 측면에서 홍성수 교수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차별금지법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한민국에서는 한 번도 차별을 금지한다는 공적 선언을 제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범 정부 차원에서, 국회 차원에서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분명히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법조항에 무엇이 차별인지를 자세히 설명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막연히 ‘차별하면 안 된다’를 넘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나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알아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칼이 되는 말이 있다면 방패가 되는 말도 있을 겁니다. 혐오표현의 피해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대응하면 좋은가요?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신체적 특징 등을 이유로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말을 들었을 경우엔 상황을 똑같이 되돌리는 말로 맞받아칠 수 있다면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고, 그 말로 받은 상처도 더 이상 커지지 않겠죠. 하지만 개인에게 문제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건 피해자를 고립시키기 때문이지요. 현장에 있던 목격자나 동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최근 성폭력, 성추행 피해를 고발하고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대개 오래전 사건입니다. 그중 많은 문제는 초기에 주변 사람들이 가해자를 제지하고, 피해자를 그 상황에서 분리했다면 피해자의 고통이 이렇게 커지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법과 처벌도 중요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개인의 노력과 적절한 대응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그려온 ‘행복한 가정’ 역시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차별적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시대, 개인과 가정의 행복 추구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나요?
내 권리와 자유만큼이나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은 가족 내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특정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삶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때로 희생도 필요하고, 가족을 우선해야 할 때도 있지요.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을 강요하거나, 일방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도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당사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가정에서는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나 자신을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말처럼, 우선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나만큼 다른 사람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이는 사회문제에 앞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가장 기본 요소가 아닐까 합니다.
전에는 생각지 못한 문제가 우리 생활을 바꾸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그간 잠재된 혐오와 차별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지금의 현실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평창 동계올림픽 중계를 보며 선수들의 선전에 환호를 보내는 한편으로 화면에 잡힌 북한 응원단의 낯선 모습에 “탈북자 2만 명도 포용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2천5백만 명과 함께 살 수 있을까요?”라고 되묻는 홍성수 교수의 질문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혐오표현에 맞서는 방법
1 피해 당사자의 적절한 대응도 중요하지만 혐오표현이 개인의 문제가 되어선 안 된다. 목격자와 공동체 구성원이 집단적 항의에 나서야 한다.
2 2013년 2월 도쿄 신오쿠보 한인타운에 혐한 시위대가 몰려들었을 때 “차별하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든 또 다른 시위대가 맞불을 놓았다. 이른바 ‘카운터 운동’은 혐오표현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줄였으며 혐한 시위 확산을 막았다.
3 2016년 서울대 성소수자 동아리 QIS는 정문에 “관악에 오신 성소수자, 비성소수자 신입생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붙였지만 일주일 후 현수막은 예리한 칼로 찢긴 채 발견되었다. 성소수자 동아리는 학생들의 연대를 호소했다. 학생들은 반창고를 들고 현수막 복원에 참여해 지지와 연대 의사를 표명했다..
4 혐오표현과 선동은 소수자 집단을 고립시키려 하지만, 이러한 대항 표현은 거꾸로 소수자와 제삼자를 연대시켜 혐오주의자를 고립시킨다. 그 과정을 통해 피해자의 고통을 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