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화가'로 잘 알려진 어머니 노숙자 화백처럼 꽃 그림을 그리는 동양화가 이정은에게 꽃은 치밀하게 들여다 보며 그릴수록 새록새록 재미를 느끼게 하는 소재다.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정은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일상의 풍경을 차분하고 꾸준하게 기록하며 동양화의 전통을 잇고 있는 이정은 작가는 갤러리 가비, 목인갤러리, 공화랑 등에서 개인전 여덟 차례를 열었으며, 2017년 6월 사진작가 구성수와 함께한 2인전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나풀나풀', 백자 환원 소성, 38x38x22cm, 2017.도예가 성석진의 환원 소성 백자에 철화 안료로 나비를 그려 넣은 작품.
열 평 남짓한 작업실 안으로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온다. 그 풍경만큼이나 밝고 소박한 꽃 그림이 차곡차곡 정리된 작업실, 동양화가 이정은에게 이곳은 놀이터같은 공간이다. “아침에 일어나 남편과 아이 챙겨 보내고, 집안일 얼른 정리한 후 작업실에 와요. 1층 상가에서 김밥 한 줄 사 들고 올라오면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설레지요. 흠뻑 빠져서 그림을 그리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개운해져요. 휴대폰 배터리 충전하는 것처럼 여기서 나를 충전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림 그리는 일이 즐거워요.”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부드럽게 이야기를 잇는다. 이정은 작가의 모친은 ‘꽃의 화가’로 잘 알려진 동양화가 노숙자 화백. 삼남매의 맏이인 그는 늘 꽃을 가꾸고 그림 그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가족이 살던 주택 지하실을 개조해서 작업실로 쓰셨는데, 학교 다녀와서 어머니가 안 보인다 싶으면 늘 거기서 그림 그리고 계셨어요. 식사 시간 되면 올라와서 밥 차리고, 크고 작은 집안일을 처리한 후 또 짬을 내어 그림을 그리곤 하셨죠.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 예술이라는 게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걸 배웠어요.”
꽃 그림이라는 가업
이정은 작가 역시 모친처럼 꽃을 그린다. 어찌 말하면 꽃 그림이 가업인 셈. 그런데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화려한 색으로 야생화와 들꽃의 생명력을 강렬하게 표현한 노숙자 화백의 그림과 달리 그의 꽃 그림은 차분하고 섬세하다. “어머니는 꽃씨를 구해다 심어서 꽃을 피운 후에 그림을 그리셨어요. 귀한 야생화를 발견하면 뿌리를 캐다 옮겨 심어 직접 키운 후에 화폭에 옮기셨지요. 반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제겐 꽃의 의미가 달랐어요. 마치 채소와 과일처럼 계절의 변화를 전하는 대상이자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사치로서의 의미가 큽니다. 꽃 그림으로 유명한 어머니 때문에 일부러 꽃을 피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려보니 색과 형태, 구조 모두 너무나 아름다운 소재더라고요. 즐겨 그리는 일상의 소재 중 하나이던 꽃이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꽃을 그리기 전 그는 일상의 물건을 그렸다. 아이가 어질러놓은 장난감, 친구에게 선물 받은 쿠키 상자, 여행지에서 사 온 기념품 등 일상의 물건에 담긴 추억을 환기하는 그림들. 주부로서 생활을 챙기는 틈틈이 붓을 잡은 그에겐 주변의 물건을 그리는 것이 가장 손쉽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중 ‘6학년 2학기’라는 작품이 재미있다. 당시 아이가 좋아하던 기타와 야구용품, 지겨워하던 학습지, 매일같이 끓여달라 조르던 ‘신상’ 라면 봉지를 한 화면에 그렸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물건에 담은 작지만 소중한 생활 이야기들. 선물 받은 과자 상자 같은 것은 그림을 그리고 나면 부담 없이 버릴 수 있다며 웃는다. 몇 년 전 대만 여행을 다녀온 모친에게서 화려한 중국 화병이 실린 화집을 선물 받은 이정은 작가는 재미 삼아 화병을 화폭에 하나둘 옮겨 그린 후 거기 꽂을 꽃을 그리다가 꽃이라는 소재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아이가 자라며 육아의 부담에서 벗어난 후 일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꽃을 대상으로 삼은 건 그에게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양재동 꽃 시장에서 계절에 맞는 꽃을 산 후, 그에 어울리는 화병 형태와 바탕색을 결정한다. 꼭 살아 있는 꽃을 대상으로 그리는데, 사진을 보고는 그 입체감과 생생한 생명력을 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 해바라기나 장미처럼 형태가 정해진 꽃보다는 작약이나 수국, 양귀비 등 풍성하게 흐드러지는 꽃을 그리는 일이 더 재미있다고. 아무런 약속이 없는 날엔 수국처럼 빨리 시드는 꽃을 골라 종일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린다. 그렇게 몰두해 그림을 그리면 눈에 초점이 잘 맞지 않을 정도로 피로하지만, 더없이 행복하다. 3월호 표지작인 ‘화병에 담긴 풍요’ 역시 흰색 중국식 화병에 담긴 풍성한 작약을 그린 작품. 장지에 아교를 섞은 옅은 색 물감을 수십 번 덧발라 은은한 바탕색을 만든 후, 그 위에 세필로 꽃과 화분의 문양을 섬세하게 그렸다. “전통 회화에서는 모란을 ‘부귀화’라고 해서 귀하게 여겼는데, 둥글게 뭉쳐 있는 작약 꽃봉오리를 보면 흐드러지게 필 모습이 상상되면서 늘 기분이 좋아져요. 작약의 그런 모습이 풍요를 떠올리게 해서, ‘화병에 담긴 풍요’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왼쪽 '이음', 장지에 채색, 100×70cm, 2017.
인상 깊게 본 전시의 팸플릿과 엽서 등을 간유리에 빼곡하게 붙인 작업실 여닫이문.
아들과 함께 놀이하듯 그림 그리고 색칠한 의자.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이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스포츠 경영인을 꿈꾼다.
어머니 노숙자 화백이 대만 여행길에 사다 준 중국 도자기 화집. 모친은 언제나 눈에 띄는 대상이 있으면 그에게 가져와 그려 보기를 권한다고. 화려한 문양과 아름다운 형태에 매료되어 중국 화병을 하나둘 화폭에 옮기다 꽃을 함께 그리게 되었다.
작가를 닮은 그림
우리 동양화의 전통에 충실한 방식으로 그림 그리는 그이지만, 꽃을 담는 화병으로 문양이 화려한 중국 도자기를 그리는 이유는 바탕색 위에 그림을 올리는 작업 방식과 잘 맞기 때문이다. 우리 백자와 청자의 맑고 은은한 느낌을 표현하는 건 그가 앞으로 해결하고 싶은 과제 중 하나. 화병에 담긴 꽃 외엔 책가도를 그린다. 지난 2016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시대 궁중화·민화 걸작전>에서 본 책가도의 아름다움 때문. 서가 주인의 직업과 취미, 개성을 드러내는 책들과 함께 꽃과 과일, 도자기, 추억이 담긴 일상품을 칸칸이 차곡차곡 그려 넣는다. 전통 화법으로 그리는 현대적 물건들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새롭다. 작은 것까지 꼼꼼하게 관찰한 대상을 섬세하고 차분하게 표현하는 작업을 통해 이정은 작가는 그림속 정물에 깃든 소중한 마음과 추억이 보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저 지금처럼 즐겁게 그림 그릴 수만 있으면 좋다는, 꽃 시장에서 꽃을 사서 표 구하기까지 그림과 관련한 모든 과정이 행복하다는 그의 이야기와 함께 늦겨울과 초봄 사이 밝고 안온한 오후가 천천히 흘러갔다.
- 동양화가 이정은 꽃 그림에 담은 마음
-
다만 차분하고 조용하게 마음에 와 닿는 꽃 그림. 햇살 가득한 작업실에서 동양화가 이정은을 만났다. 작품과 공간, 작가가 하나같이 밝고 소박하고 안온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