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보이는 기계는 효율적 작업을 위해 곽승용 작가가 직접 개발한 것. 한복 옷감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스텐실 작업에 유용하게 쓰인다. 그는 식탁과 의자부터 작업에 쓰이는 전동식 이젤까지 모두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해결한다.
1969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곽승용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프랑스 파리8대학 조형예술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파리 갤러리 베르나노스, 서울 금호미술관, 갤러리 가이아 등에서 개인전 14회를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과 국내외 아트 페어에 참가했다. 지난 2012년 고향인 상주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흑백사진처럼 아스라하게 그려진 서양 여인이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는데, 그 안의 나신이 고스란히 비친다. 회화 작가 곽승용의 ‘오래된 미래’ 연작.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는 모두 고전적이고 익숙한 것인데, 찬찬히 뜯어볼수록 독특하고 새롭다. “프랑스 유학 시절 교수님께 그림을 보여드렸더니 ‘동양인이 왜 서양의 것을 그리는지’를 묻더군요. 그때 받은 충격이 컸어요. 작가로서 우리 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던 중 서양 여인에게 한복을 입힐 생각을 했습니다.” 곽승용 작가에게 ‘오래된 미래’ 연작은 작가로서 정체성을 찾는 긴 여정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엔 우리가 익히 아는 얼굴이 등장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앵그르가 그린 고전 명작 회화 속 여인, 할리우드 황금기 흑백영화에 등장하던 조앤 폰테인과 잉그리드 버그먼 등 아름다운 고전 여배우들의 속살이 한복 속으로 훤히 비친다. “여전히 누드 작품 관람을 불편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친근한 이미지를 통해 누드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려는 시도였어요.” 그림의 질감도 독특하다. 고전 명화를 흑백으로 재현하거나 고전 여배우의 얼굴을 묘사 하는 솜씨가 출중한데, 작품 표면에 붓질 자국이 하나도 없고 여인의 피부 역시 대리석처럼 매끈하다. 비밀은 기법에 있다. 곽승용 작가는 붓 대신 에어브러시airbrush로 아크릴물감을 분사해 그림을 그린다. “미국 작가 척 클로스Chuck Close의 흑백 인물화를 통해 에어브러시 효과를 처음 접했지요.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시절 아르바이트로 재불 작가 이성자 선생님의 작업실을 청소하며 어깨 너머로 에어브러시 작업을 배웠습니다. 붓질 자국이 남는것처럼 에어브러시로 물감을 여러 번 겹치면 가장 밝은색부터 가장 어두 운색까지 수많은 색조(tone)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미래', 캔버스에 아크릴, 146×97cm, 2015
부조화 속의 조화
곽승용 작가의 ‘오래된 미래’ 연작 중 하나인 2월호 표지작은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Grande Odalisque’ 속 여인에게 한복을 입힌 작품이다. 다른 고전 작가와 달리 붓질자국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앵그르의 작품이 에어브러시로 그리는 자신의 기법과 잘 맞아떨어졌다는 작가의 설명. ‘모나리자’를 그린 작품도 수십 점이 있는데, 그림마다 미묘하게 조금씩 인상과 표정이 다르다. 스케치 단계에선 작품 사진을 참고하지만, 에어브러시로 채색하는 과정에선 원본을 보지않고 느낌대로 작업하기 때문. 에어브러시로 분사하는 미세한 물감 방울로 완성하는 그의 작품에선 흑백과 컬러, 과거와 미래, 동양과 서양 등 대비되는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한다. 고전적인 동시에 파격적이다. 10년 가까이 곽승용 작가의 작품을 소개해온 갤러리 가이아 윤여선 관장은 그의 작품이 국내보다 해외 미술 시장에서 더욱 반응이 좋다고 말한다. 누드작품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해외 관객은 서양과 동양의 결을 섬세하게 겹친 그의 그림을 무척 흥미로워한다고. 곽승용 작가는 고향인 경북 상주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해외 아트페어에 보낼 작품을 그리며 내년으로 계획된 개인전에 선보일 신작을 틈틈이 구상한다. 완성하는데 두어 달의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작업 과정 탓에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작업실에서도 외로울 틈이 없다는 그. “작품에 조금 더 생동감을 불어넣고 싶습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고전명화나 흑백영화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은 늘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