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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죽음_ 에세이 나의 마지막 디자인

내 무덤의 묘비명


해변을 걷다가 죽은 새 한 마리를 만났다. 가냘픈 다리가 딱딱하게 굳어 바다를 향해 뻗어 있었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날아간 것일까? 새의 죽음 위로 하늘이 열려 있었다. 뜨거운 감촉, 환한 아픔, 참말로 고왔던 수많은 거짓말, 온몸으로 쓸고 닦았을 저 푸르른 창공. 그 삶과 길로 새는 어디쯤 날아갔을까? 삶은 투명해서 위태롭다. 너무 투명해서 만지고 있는 순간에도 만져지지가 않는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몸부림을 치면 유리창 같은 것이 종종 앞을 가로막는다. 쓰러지면서도 나는 끝내 삶을 알지 못한다. 삶에서 투명한 것을 제거하면 고기-육체만 남는다. 죽음이다. 죽음은 전심전력으로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을 피한다. 도처에 죽음은 ‘내던져져’ 있고, 그 죽음들 사이를 우리는 살아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허공을 날아가며 새는 괴로워했을까? 떠도는 것, 멀리 가는 것, 여행이 아니라 유랑인 것, 화해가 아니라 영원한 불화로 남는 것. 정직한 깨달음은 없고, 참회는 영원한 독백으로 남으리라. 새의 주검에서 나는 나의 죽음을 들어 올렸다. 내 무덤의 묘비명을 적기 시작했다. “세상을 떠돌던 철새 가지런히 발을 모으다.” 묘비명이 명백했기 때문에 살기만 한다면 죽음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결국 묘비명을 적으며 내가 바라본 것은 죽음이 아니라 저 푸르른 창공, 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강렬한 태양과 무연한 고독, 그 사이를 가르며 당당히 날던 새의 날갯짓이었다. _서상영(시인)


어머니의 마지막 전수 음식


요즘은 나의 인생을 어떻게 마감할지를 화두로 생각을 키우고 있다. 먼저 궁중 음식 연구가 황혜성, 가장 큰 스승이던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몸은 떠나도 혼은 살던 집에 머물다 간다고 여겼다. 궁에서는 혼전魂殿을, 여염집에서는 마루에 상청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살아 계실 때처럼 상을 차려 탈상할 때까지 올렸다. 그것을 상식上食이라 한다. 나는 어머니의 자취를 돌아보며 묘소로 가시던 날, 어머니께서 남긴 상식 발기에 근거해 마지막으로 진짓상을 올렸다. 2년 전 어머님 서거 10주기 제사를 궁중연구원 실습실에서 지낼 때도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먹으며 각자 어머니와의 인연과 추억을 이야기했다. 나는 돌아가시기 두어 해 전 병실에 누워 계신 어머니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는 비록 과거는 잊었지만, 궁중 음식에 대해선 생생하게 기억하셨다. 마침 그날은 잔칫날이었나 보다. “이제부터 잡채를 할 테니 내 말대로 하거라.” “네 어머니.” “그럼 고기는 채 썰어 양념하거라. 채소도 채 썰어 데치거나 절이고 볶아야 한다.” 나는 침대에 놓인 테이블을 손으로 두드려 고기 다지는 칼 소리를 냈다. “참, 당면은 많이 넣는 게 아니란다. 옛날에는 당면 없이 잡채를 했지. 재료가 고루 섞일 만큼만 넣으면 돼. 삶아낸 당면에는 간장과 참기름으로 밑간을 해야 전체 간이 맞는단다.” 나는 눈물범벅이 되어 병상 침대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궁중 음식을 전수 받았다. 내 장례 때는 제자들에게 부탁해 어머니의 병상에서 받은 마지막 전수 음식 잡채를 조문객에게 대접하면 어떨까 욕심내 본다. _한복려(궁중음식연구원장)


바람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날 때는 아주 조용히 떠나고 싶다. 공식적으로 알리고 싶지도 않다. 장례는 가까운 지인과 가족만 불러서 조용히 치르면 좋겠다. 입고 가고 싶은 옷은 있다. 삼베보다는 염색하지 않은 소색 손명주를 구해 내 손으로 한복과 두루마기를 준비해서 깨끗한 차림으로 떠나고 싶다. 설날에 때때옷 입고 친척 만나듯 또 다른 곳으로 갈 때 입는 옷이니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 입는 옷을 입으란 법도 없을 것이다. 화장한 골분을 납골당에 두고 싶은 마음도 없다. 골분을 나누어서 동해 바닷가라든지 부산 범어사 주변이라든지 내게 의미가 있는 여러 곳에 뿌리도록 부탁하고 싶다. 비석도 필요 없고 아무런 표식도 남기지 않을 거다. 그저 바람처럼 깨끗하게 사라지면 좋겠다. 세상엔 내가 한 일과 이름이 남을 테니까. 삼일장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가까운 지인과 가족이 하루만 다 같이 모여 평소 내가 좋아하던 별다를 것 없는 음식 맛있게 나누어 먹으며, 웃고 있는 내 사진 보면서 담소를 나누었으면 한다. _정구호(패션 디자이너, 공연 연출가)


꽃으로 삶을 기억하는 방법


꽃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바로 라파엘전파의 대표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가 셰익스피어 <햄릿>의 한 장면을 그린 것으로, 사랑하는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후 오필리어가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실물 크기의 이 작품을 봤을 때 으스스하면서도 애틋한 기분에 소름이 번졌다. 이 그림은 랭보Rimbaud의 시에서 비롯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시구는 다음과 같다. “긴 장옷을 입고 근처 강가에 떠내려가는 그녀를 본 사람이 있다네/ 손에는 부케를 든 그녀는 계속해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네….” 그림 속 오필리어의 화관에는 ‘깨어지지 않는 사랑’ 이라는 꽃말을 지닌 아이비가 들어가 있고, 목에는 ‘순결한 사랑’을 뜻하는 제비꽃을 두르고 있다. 삶의 또 다른 시작일 결혼식을 준비하다 죽음을 맞은 비운의 여인 오필리어. 그림 속에는 고독을 의미하는 들장미가 피어 있지만, 오필리어의 머리 위로는 ‘아버지의 사랑’을 뜻하는 능수버들이 늘어져 있고, 강(웅덩이)은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한다.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아늑하고 따스한 가족과 신의 품으로 회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떠올리며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어떤 꽃으로 장식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이 그림을 떠올렸다.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인간과 신을 하나로 잇는, 끝없이 환원하는 그 순리를 표현하는 원 모양의 리스를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고인이 죽은 날 가족들이 플로리스트를 찾아가 고인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그를 기억하는 꽃을 만들어 묘를 찾는 풍습이 있다. 나도 훗날 가족과 후손들이 나를 기억하며 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리스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보라색 팬지, 연보랏빛 스위트피, 분홍 설유화를 중심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봄꽃을 가득 넣어 봄의 정원을 닮은 리스를 만들었다. 언젠가 죽음을 맞는다면 햇빛 찬란한 봄이 좋을 것 같아서. _정미영(플로리스트, ‘르 부케’ 대표)


기분 좋은 마지막, 그리고 음악


종교를 믿는 사람도 사후死後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이며,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눈에 빤히 보이는 것도 믿기 힘든 세상이니 더 그럴 수밖에. “천국과 지옥이 있는 줄 알고 여태껏 신앙 생활을 잘했는데, 죽고 나서 보니 그런 건 없더라…. 그래도 밑질 건 없지 않나요? 그런데 설마 그런 게 있을까 하면서 원 없이 살았는데, 죽어보니 설마 했던 천국과 지옥이 있고 나는 지옥행으로 결정 나 있으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거지요. 그러니까 우선 믿어보는 게 맞지요?” 평소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이 웃으면서 하신 말씀인데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난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고 주변에 떠나는 사람도 많아지는 때가 되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될까’ 상상하게 된다. 어떤 때는 가족과의 헤어짐이 너무나도 아쉽고 서운해서 가슴 저리게 슬플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천년만년 사는 것이 반드시 행복할 것 같지만은 않아 이만큼 살았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복이런가 싶기도 하다. 가장 기분 좋게(?) 세상을 떠나는 상상은 이렇다. 1백 세 시대라고 하니 어느 정도 유행을 좇아 그 나이 가까이까지 살고 이 세상을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내 주위에 둘러앉은 자녀, 손주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춘 뒤 엷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연다. “자, 이제 헤어지자… 너희들 덕분에 정말 행복했다.” 그러곤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으며 하얀 옷의 천사들과 하늘나라로 떠난다. 머리맡에 있는 스피커에서는 베토벤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 2번 F장조가 흐르고 있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진 아들과 딸은 “아버지는 말이야 너희들과 다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 그러면 꼭 이 곡이 떠올라”라고 말하며 그럴 때마다 매번 같은 음반을 재생하며 행복해하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린다. 자녀들은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지만, 자신들 역시 아버지 덕분에 행복했음에 이내 미소를 짓는다. _강석우(배우,CBS FM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DJ)


땅으로 시집가는 옷


3년 전,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암 진단 후 치료를 받으시던 중 홀연히 저 먼 세상으로 떠나셨다. 어머니께서 떠나시기 얼마 전, 문득 어머니의 마지막 옷에 생각이 미쳤다. 경황이 없어 수의壽衣를 장만해두지 못한 터였다. 흔히 하듯, 거칠고 누런 삼베 수의를 입혀드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오늘날 삼베 수의가 ‘우리의 전통’이라는 탈을 쓴 채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사실 우리의 전통 수의는 비단 등 좋은 직물을 쓰고 색도 화려하게 한다. 일제강점기에 반포된 ‘의례준칙儀禮準則’으로 인해 삼베 수의가 강제로 보급되어 왜곡된 수의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서 땅으로 시집가실 때 입으실 옷을 삼베로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마련해둔 고급 옷감으로 어머니 수의를 급히 만들었다. 분홍색 비단으로 저고리와 치마를 만들고, 다듬이질을 해 반들반들 윤이 나는 하얀 한산 모시로 두루마기를, 유물을 고증한 후 직접 실을 골라 주문해 짜둔 사면교직絲綿交織 원단으로 원삼을 장만했다. 가족 모두 어머니와의 갑작스러운 이별로 충격에 휩싸였지만, 어머니께 밝고 화사한 수의를 입혀드리면서 점차 평안과 위안을 얻었다. 그 후 나와 가족이 얻은 평안과 위안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15년 한 해 동안 문헌과 유물 등을 고증해 전통에 바탕을 두되 현대에 맞는 수의를 만들어 2016년 봄 <땅으로 시집가는 날>이라는 전시를 통해 공개했다. 옷을 만들 때 어머니께 옷을 지어드리듯 온 마음을 다했는데,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정성 들여 만든 수의를 보고 감동했다는 분들을 보며 나 또한 감동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대의 예서禮書에 따르면 나이 칠십이 되면 수의를 장만한다고 한다. 언젠가 일흔 즈음이 되면, 나는 어머니와 같은 옷을 장만할 생각이다. 그렇게 곱고 예쁜 혼례복을 입고 3년 전 땅으로 시집가신 어머니를 따라 나 또한 땅 신에게 시집가려 한다. _최연우(단국대 전통의상학과 교수)

담당 정규영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