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캔버스에 유채, 45.7×35.5cm, 1988,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한여름 중천의 커다랗고 둥근 해 같기도 하고, 그믐날 산허리 위에 낮게 걸린 보름달 같기도 하며, 민트색 하늘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 같기도 한 이것은 ‘장욱 진의 나무’다. 올해 탄생 1백 주년을 맞은 故 장욱진 화백이 8절 스케치 북 크기의 아담한 화면에 수십 년간 펼쳐온 초록의 스펙트럼은 한평생 초록을 들여다본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 할 만큼 다채롭다. 초록이 짙어 푸르름으로 번지는 7월의 어느날 아침, 장욱진 화백이 1986년부터 작고한 1990년까지 말년을 보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 북동의 고택을 찾았다. 오래된 주택가 골목과 고층 아파트 숲 사이에 자리 잡은 이 집은 등록문화재 제404호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 고택은 경운박물관장이자 장욱진미술재단 이사로 경기도 양 주시립장욱진미술관을 설립하는 데 애쓴 맏딸 장경수 씨를 비롯한 5남 매가 함께 관리한다. 그와 함께 고택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故 장욱진 화백은 1917년 충남 연기군 출생으로 전국 규모 소학생 미술전에서 대상을 받고 일제강점기에 도쿄의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해방 직후 국립중앙박물관, 195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잠시 재직했다. 이후 덕소, 수안보, 신갈 등에 화실을 마련해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하다 1990년 타계했다.
1884년에 지은 장욱진 고택은 ㅁ자형 한옥이다. 장욱진 화백이 1985 년 이곳으로 이주할 당시 심각하게 변형되고 쇠락해 집의 원형을 되찾 기 위해 크게 수리했다. “사랑채 툇마루에 앉으면 앞산이 아름답게 펼 쳐지고, 시냇물이 흐르는 풍경을 볼 수 있는 한옥이었어요. 지금은 주 변이 난개발되면서 예전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요. 그 점이 참 아쉬워 요.” 안채 뒤편에는 한 평 남짓한 크기의 정자가 자리한다. 장욱진 화백 이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생활하고 작업한 명륜동 집 연못 정자의 현판인 ‘관어당觀漁當’을 그대로 옮겨왔다.
“계 단 위쪽 양옥은 나중에 지은 거예요. 한옥에 서 3년 정도를 생활하시다 불편했는지 양옥 한 채를 짓고 싶어 하셨지 요. 1988년 봄에 ‘설계도 없는 집을 지어보겠다’ 하시더니 이듬해 여름 에 드디어 완성하셨어요.” 이 양옥은 장욱진 화백의 1953년 작 ‘자동차 있는 풍경’에 등장하는 양옥과도 꼭 닮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그려오던 ‘즐거운 나의 집’을 말년에 완성하고, 이 양옥에서 1년 반쯤 살 다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는 현재 장욱진 화백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유족이 마련한 드로잉전을 진행하고 있다. “1년 반 전쯤 어머니의 한복 상자 사이에 있던 옷 보자기에서 수십여 장의 드로잉을 우연히 발견했 어요. 주로 시험지나 스케치북에 유성 매직 잉크나 컬러 잉크 등으로 쓱 쓱 그리신 그림과 여행 중 스케치가 대부분이죠.” 생전에 늘 “사인 없는 그림은 다 태우라”며 그림 속 화가의 사인을 ‘책임의 완성’으로 여기던 장욱진 화백이기에 유족은 이 작품들을 공개할지 오래 고민했다. 하지만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그의 마지막 생활 공간이자 작업 공간이던 곳 에서 그의 면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자는 데 뜻을 모아 80여 점의 드로잉 을 세상에 처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자리한 장욱진 고택. 2008년 등록문화재 제404호로 지정되었다.
장욱진미술재단 이사를 맡고 있는 장욱진 화백의 맏딸 장경수 경운박물관장.
양옥 2층 방에 재현한 그의 화실은 놀랄 만큼 작고 아늑하다. 평생 큰 작품을 그리지 않은 그이기에 이젤도, 커다란 캔버스도, 의자도 없다. 손바닥만 한 그릇을 세 개는 족히 담을 수 있을 법한 쟁반 모양의 커다란 재떨이와 소반,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최소 한의 물감과 붓, 도구들만 있는 작은 화실. “아버 지는 작고 예쁜 그림을 남기셨어요. 늘 새벽에 그 림을 그리셨는데, 등을 잔뜩 구부리고 만지작거리 듯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셨지요. 그래서 화구가 많이 필요하지 않으셨죠. 누군가 외국에 다녀오면 서 좋은 붓이나 이젤 같은 걸 선물하면, 당신이 필 요 없으신데도 ‘정성을 생각해서 먼지라도 닦아야 지’ 하시며 화실 한쪽에 놓아두곤 하셨어요.”
장경수 관장은 “아버지는 늘 외롭고 고독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한다.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늘 그림 으로 표현하셨던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을 그린 작 품에서 당신은 늘 작게, 어머니는 가장 크게, 우리 5남매는 올망졸망 그려놓으신 걸 봐도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어요. 가족이나 제자를 대하실 때는 한없이 여리고 곱고 부드러우셨지만, 그림에 대해 서는 누구보다 단호하고 확고하셨죠.” 최근 장남 장정순 씨가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양주시립장욱 진미술관에 기증한 1972년 작 ‘가족도’에도 가족 을 향한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돌아가시 기 이틀 전에도 가족이 모두 모여 점심 식사를 했 어요. 작고하신 1990년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힘 있고 좋아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은 몰랐지요.”
장욱진 화백이 직접 설계해 지은 양옥 2층에 꾸민 장 화백의 생전 작업실.
‘가로수’, 캔버스에 유채, 30×40cm, 1978
경기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오는 8월 27 일까지 열리는 탄생 1백 주년 기념전 에는 선별한 유화 38점을 선보인다. 장욱진 화백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제외하고 총 9백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나무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거의 없을 정 도로 나무를 사랑했다. <행복> 8월호 표지작 ‘나무와 새’는 1957년 작품으로, 특유의 초록빛 바탕에 나무, 새, 집 등 생전에 그가 천착한 소 재들이 사이좋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분명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 렸는데도 그 형태와 분위기, 색과 빛깔에서 한국적 멋이 우러나는 그의 작품은 생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작 가들의 산수화를 모은 전시에서 가장 마지막 두 점으로 소개되기도 했 다. “아버지 그림은 나무, 새, 해, 달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동양적 느낌이 강하지요. 어떨 때는 정녕 유화물감으 로 그린 게 맞나 싶어 ‘아버지, 이 그림은?’이라 여쭈면 그저 말없이 웃으 시며 ‘응, 그렇게 돼’라고 답하곤 하셨어요.”
현재 장욱진 고택에서 전시 중인 드로잉. 생전의 장욱진 화백이 시험지나 스케치북에 유성 매직 잉크나 컬러 잉크 등으로 쓱쓱 그린 그림과 여행 중 스케치가 대부분이다.
장경수 관장은 장욱진 화백 탄생 1백 주년을 기리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7월 말부터 한 달간 인사가나아트센터, 9월 중순 부산가 나아트센터, 10월 초에는 故 장욱진 화백의 생가가 있는 세종시의 국립 도서관 내 공간에서 특별전을 진행한다. “‘화가 장욱진’을 알리고 싶어 요. 평생 그 어떤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지켜온 아버지 의 그림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도쿄에서 유학했지만 그림에서 일본풍이 느껴지지 않고, 서 구 모더니즘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며 자기만의 것을 고집해온 장욱진 화백. 사이좋게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 하늘 아래 나무, 나무 아래 집, 그리고 나. 평생에 걸쳐 삶과 그림으로 증명하고자 한 ‘나는 심플하다’ 는 철학을 표현하기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아담한 캔버스에 펼 쳐진 그의 우주를 바라본다. 거기에는 천진한 아이의 얼굴로 활짝 웃으 며 곧고 깨끗하며 순수하게 살다 간 그의 일생이 담겨 있다.